▲ 이번 총선의 최대 수혜자로 박근혜 전 대표가 꼽히지만 수도권에서의 바람은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 향후 대권가도에 적신호가 켜졌다. 사진은 박 전 대표와 친박 당선자들의 회동 모습. | ||
하지만 화장실에서 혼자 웃고 있어야 할 박 전 대표는 정작 총선 직후 “친박 인사를 무조건 복당시켜야 한다”라고 말한 뒤 계속 ‘묵언수행’ 중이다. ‘선거의 여제’가 왜 당당하게 승리의 기쁨을 표출하지 못하고 정치권 주변을 관망하고 있는 것일까. 이번 총선이 박 전 대표에게 또 한번 ‘묻지마 인기’를 확인시켜 주긴 했지만 일각에서는 “이번 선거로 박 전 대표의 대권은 물 건너갔다”라는 극단적 전망도 제시한다. 총선 승리 뒤에 감춰진 박 전 대표의 고민을 들여다봤다.
과연, 박근혜 전 대표는 선거에 관한 한 대통령감이었다. 그는 선거운동 기간 내내 지역구인 대구 달서구에 거의 머물렀지만 뉴스의 초점은 온통 박 전 대표 얘기뿐이었다. 박 전 대표가 가는 곳에는 어김없이 그와 ‘포토라인’에 서려는 후보들로 붐볐다. 심지어 친박 그룹의 핵심으로 한나라당 탈당 의원 1호로 기록됐던 곽성문 의원은 자유선진당 후보로 선거에 나섰지만(대구 중·남구) ‘박풍’의 위력을 절감, 박 전 대표 지역구에서 약속도 없이 1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사진 한 장을 건질 수 있었다. 곽 후보는 “제가 왔습니다. 참 살아남기 힘듭니다”라며 읍소작전을 펼쳤다. 박 전 대표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아무런 말도 없이 승용차에 올랐다. 정치권에서는 “이 해프닝은 이번 선거에서 ‘박풍’의 위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것이었다. 동시에 정책적 비전 제시 없이 ‘박근혜’ 이름 석 자에 의지하려는 유아적인 발상을 보여준 부끄러운 사건이기도 했다”라는 촌평이 나왔다.
그렇다. 박 전 대표는 이번 선거에서도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 ‘우리들의 스타’임을 입증시켜 주었다.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에서는 친박 성향 당선인이 34명에 이르고, 친박연대·무소속 등과 합치면 60여 명의 지지 의원이 생겼다. 17대 국회(친박 의원 42명)에 비해 오히려 수적으로 늘어났다. 정치권에서는 박 전 대표의 위력을 대체로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먼저 박 전 대표만이 가진 ‘아우라’(사람이나 물체에서 발산하는 독특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기운 또는 영기(靈氣) 같은 것을 뜻하는 말)를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라는 신화적 인물과 그를 동일시하는 국민들의 과거 회귀적인 성향이 한몫을 한다. 동시에 ‘오로지 국민과 결혼했다’는 그의 자기희생적 이미지도 사람들의 동정심을 자극한다. 이러한 박 전 대표의 ‘아우라’는 정책이나 비전과는 상관없는 ‘묻지마 투표’ 성향을 보인다는 점에서 선거 때마다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러한 박 전 대표의 ‘아우라’는 그가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라는 이미지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친이(친 이명박 대통령) 그룹 일각에서 7월 전당대회에 박 전 대표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러한 친이 그룹 일부의 정치적 스탠스는 ‘차기 대권주자 만들기에서 대안이 없다고 판단이 들면 박 전 대표의 손을 들어줄 수도 있다’는 정치적 복선을 내포하고 있다. 야권에서 그와 대적할 인물이 없는 만큼 ‘박근혜 브랜드’만큼 확실한 대안이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 때문이다.
이밖에 박 전 대표에게는 영남을 기반으로 하는 확실한 지역적 배경이 있다. 그가 대구 출신이긴 하지만 부산·울산·경남에 더 많은 지지세를 확보하고 있다는 점도 그의 성장 잠재력을 높여주는 대목이다.
▲ 친박연대의 서청원 대표와 비례대표 1번 양정례 당선자.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먼저 이번 선거에서 친박연대가 얻은 의석 수를 보면 지역구는 6석이었던 것에 비해 비례대표는 8석으로 기형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 통상 지역구 의원 수가 많은 게 상식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의 한 친이 의원은 “친박 그룹의 약진은 박근혜 전 대표를 지지하는 세력이 ‘묻지마 투표’를 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선거 운동을 하면서 느낀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초반 국정 운영 실책과 무원칙한 공천에 대해 국민들이 높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비 한나라당, 반 통합민주당’ 정서로 나타나 ‘친박연대’라는 대안을 통해 한나라당에 채찍을 든 것으로 분석된다. 이런 점을 보면 친박연대의 약진을 꼭 박근혜 브랜드의 영향력으로만 볼 수 없고 오히려 한나라당과 이 대통령 독주에 대한 견제의 성격으로 봐야 한다. 이는 보수세력 가운데 부동층이 박 전 대표를 이번 선거에서 대거 지지해 친박연대가 도약할 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한시적이고 비판적인 지지 성향으로 언제든 지지를 철회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또 한 가지는 수도권에서 당선된 친박 그룹 대부분은 ‘박근혜 브랜드’로 승부한 것이 아니라 지역 현안과 인물론으로 승부했다는 점이다. 친박 그룹 60여 명 가운데 수도권 당선자는 18명으로(영남권이 30여 명) 지난해 경선에 비해 수적으로는 늘어났다. 하지만 영남권에서 그토록 강했던 당외 ‘친박 바람’은 3곳(경기 용인 수지 한선교, 안산 상록을 홍장표, 인천 서·강화을 이경재)에서 성과를 내는 데 그쳤다. 또한 이혜훈 이성헌 구상찬 김선동 당선자 등은 서울의 친박 계열로 분류되지만 ‘박근혜 마케팅’에는 덜 적극적이었다. 구상찬 당선자 정도가 박 전 대표의 지원 동영상을 활용했다. 이는 수도권 표심은 ‘박근혜 브랜드’ 자체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지역 현안과 미래 비전을 여전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성적 투표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박풍’이 수도권에서 그리 먹히지 않았다는 것은 박 전 대표의 향후 정치적 입지를 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이번 선거를 통해 박 전 대표는 영남권의 확실한 맹주로는 떠올랐다. 하지만 이는 박 전 대표 스스로가 자신을 영남의 ‘도지사’급으로 낮추는 부메랑이 되고 있다. 한나라당을 오랫동안 출입해온 정보관계자들은 이에 대해 “이번 선거로 박 전 대표의 대선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라고 단언한다. 그들은 “대권을 꿈꾸는 사람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영남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은 그만큼 대권과 거리가 멀어졌다는 뜻이다. 대선의 승패는 결국 인구의 반이 몰려 있는 수도권의 승패 여부에 달려 있다. 특히 이번 선거를 통해 수도권에서는 출신 기반이 아니라 뉴타운 건설 등 지역현안에 따라 표심이 변하는 신지역주의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점에서 대권을 향하고 있는 박 전 대표가 수도권 표심을 움직일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영남을 기반으로 하는 계보정치에 머무는 퇴행적 행보를 보인다면 차기 대권 꿈도 요원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가 4·9 총선 결과에 대해 ‘웃어도 웃는 게 아닌’ 이유는 또 있다. 특히 친박연대의 출현은 그에게 웃음보다는 두통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한나라당 내부에선 “박 전 대표가 자파 세력을 키우기 위해 서청원 홍사덕 당선자 같은 낡은 정치세력을 불러들이고 그들을 비호해주면서 그들과 똑같이 구태세력으로 몰리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당 일각에서는 “서청원 전 대표의 경우 2002년 대선자금 사건으로 이미 정치적 사형 선고를 받은 인물인데 이번 선거에서 자신의 정치적 재기를 위해 박근혜 브랜드를 악용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한나라당의 한 친이 의원은 이에 대해 “박 전 대표가 서청원 전 대표 등을 다시 정치권으로 불러들인 장본인이라는 점에서 이번 ‘양정례 파문’은 자업자득이다. 만약 미래지향적인 선택을 해서 서 전 대표의 재기 의지를 뿌리쳤다면 이번 사건 같은 일이 생겼겠느냐. 이런 점에서 양정례 파문은 서 전 대표의 문제가 아니라 박 전 대표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박 전 대표도 ‘양정례 파문’의 심각성을 알았기 때문인지 최근 정치권에선 “박 전 대표가 친박연대 비례대표 양정례 씨 문제가 불거지며 동요하고 있는 탈당한 일부 측근들에게 전화를 걸어 ‘행동통일’을 당부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친박 그룹이 ‘양정례’라는 둑이 터지면서 균열 조짐이 보이자 박 전 대표가 서둘러 봉합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일단 박 전 대표 측은 이 같은 소식에 대해 “전혀 근거 없는 얘기”라며 적극 부인하고 나섰다. 소문을 조기 진화하지 못할 경우 ‘박 전 대표가 계파 이익만 계속 챙기는 작은 정치에 몰두하고 있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양정례 딜레마’는 박 전 대표에게 친박 그룹 전체를 관리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던져주고 있다. 친박 그룹은 현재 김무성 의원이 주축이 된 당외 무소속 의원들과 서청원 전 대표로 대표되는 친박연대 등이 이번 사건을 두고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복당에 있어서도 김무성 의원은 조건 없는 복당을, 서청원 전 대표는 비례대표의 자격 문제가 걸려 있어 당 대 당 통합을 선호하기 때문에 단일대오를 형성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번 총선의 최대 수혜자로 평가받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 하지만 그도 일각에서 제기하는 ‘소탐대실’을 냉정하게 생각해야만 하는 전환점에 서 있다. 어차피 박 전 대표에게는 2012년 대선이 목표다. 이런 점에서 이명박 정부의 성공이 없다면 그의 정권 재창출도 산 넘어 산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그의 지원을 필요로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도 이 대통령의 성공이 대권 가도를 위해 필수적이다. 이런 점에서 박 전 대표가 계속 ‘영남권 공주님’으로만 머물며 계파정치에 몰두하는 인상을 준다면 그를 ‘선거의 여제’로 만든 국민 여론도 언제든 변할 수 있다. 박 전 대표는 이제 ‘친박연대’와 ‘영남’이라는 ‘알’을 깨고 나와야 할 시점에 있는지도 모른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