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리그는 오랫동안 새 얼굴의 등장에 목말랐다. 갓 입단한 신인 선수들의 활약을 보기가 어려웠다. 프로와 아마 간의 실력 격차가 커지면서 입단 첫 해에 프로에서 자리 잡는 선수들이 많지 않았다. 최근에는 첫 시즌부터 시범경기에서 뛸 기회를 잡는 선수조차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러나 올해는 조짐이 좋다. 모처럼 1군 무대를 흔들어 놓을 만한 신인들이 등장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높다. 이들은 그 바늘구멍을 통과한 것은 물론,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기량을 펼쳐 보이고 있어 더 고무적이다.
# 이정후 필두로 한 순수 신인들의 반란
넥센 1차 지명 선수인 이정후가 그 선두에 서 있다. 아버지가 ‘바람의 아들’로 유명한 이종범 MBC SPORTS+ 해설위원이라 일찌감치 ‘바람의 손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시범경기에서도 처음부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첫 경기였던 14일 마산 NC전 첫 타석부터 2루타를 쳤고, 16일 대전 한화전에선 3회까지 퍼펙트로 밀리던 팀의 첫 안타를 4회 만들어 냈다. 19일 고척 두산전에선 2-3으로 뒤진 8회 역전 결승 적시타를 때려내 장정석 신임 감독에게 첫 공식경기 승리를 안겼다. 이정후의 경기 장면을 지켜본 많은 야구인들이 “타격에 생각보다 더 재능이 있다”며 혀를 내두르고 있다.
이종범 해설위원의 아들 이정후는 ‘바람의 손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진출처=넥센 히어로즈 홈페이지
당초 이정후를 ‘미래 전력’으로 여겼던 넥센도 서서히 시선을 바꿨다. 1군에서 쓰기 위해 내야가 아닌 외야수로 내보내기 시작했고, 이정후도 기대 이상으로 잘 적응했다. 신인답지 않게 타석에서 침착하고, 상황 대처 능력도 뛰어나 더 감탄을 자아낸다. 장정석 넥센 감독이 “너무 잘하고 있어서 할 말이 없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다. 아버지의 후광에 스스로의 재능까지 더해져 쟁쟁한 선배들 틈을 뚫고 자신만의 빛을 발하는 중이다.
삼성 신인 투수들도 무섭다. 1차지명 투수 장지훈과 2차지명 1라운드에서 선발한 최지광이 연일 호투하면서 미래를 밝혔다. 장지훈은 키가 190cm로 크고, 시속 140㎞ 중후반대의 묵직한 직구를 던진다. 최지광은 스프링캠프 연습경기부터 두각을 나타내 일찌감치 눈도장을 받았다. kt 외야수 홍현빈과 넥센 내야수 김혜성 역시 빠른 발로 주목받고 있다. 롯데 신인 내야수 김민수 역시 이번 시범경기에서 유명해졌다. 탄탄한 수비로 눈도장을 확실하게 받았고, 타격에서도 재능을 보이고 있다.
이뿐만 아니다. LG 투수 고우석은 스스로 만루 위기를 만들고도 시속 146~148km의 위력적인 직구로 위기를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 두산이 2차 지명 1라운드와 2라운드에서 뽑은 신인 투수 박치국과 김명신도 선배 투수들과 함께 치열한 5선발 경쟁을 펼쳤다. 마운드 상황에 따라 언제든 1군에서 뛸 수 있는 전력으로 대기한다. 팀에 새 활기를 불어 넣을 수 있는 젊은 피들이다.
# 9년간 사라졌던 순수 신인왕
물론 시범경기 성적이 1군에서의 활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축 선수로 발돋움하려면 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아직 프로의 세계를 경험해보지 못한 젊은 선수들이 144경기 체제에서 풀타임을 소화하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동안 ‘순수 신인왕’을 보기가 어려웠던 이유다.
삼성 1차지명 투수 장지훈의 경주고교 시절. 사진출처=삼성 라이언즈 홈페이지
2006년 한화 류현진과 2007년 두산 임태훈 이후 입단 첫해 신인왕을 거머쥔 선수는 9년간 나오지 않았다. 지난해 신인왕 신재영(넥센)도 2012년 NC에 입단한 중고 신인이었고, 2015년 신인왕 구자욱(삼성) 역시 2012년 삼성에 입단한 뒤 군복무까지 마치고 돌아와 1군에 데뷔한 선수였다. 2008년 신인왕 최형우(KIA·당시 삼성)와 2012년 신인왕 서건창(넥센)은 아예 한 차례 방출됐다가 군복무를 마친 뒤 다시 입단 절차를 밟은 케이스였다. 2009년 신인왕인 이용찬(두산)은 2007년 신인왕 임태훈과 동기생이다. 수술을 받고 재활하느라 2년 늦게 꽃이 피었다. 사연 많은 중고 신인왕들이 줄을 이었다.
특히 아직 만 나이로는 10대인 고졸 신인 선수들에게는 프로의 벽이 더 높다. 순수 고졸 신인 투수의 10승 기록이 프로야구 35년 역사에서 단 13번밖에 나오지 않았다는 게 이를 입증한다. 1991년 김태형(롯데), 1992년 염종석(롯데)-정민철(빙그레)-안병원(태평양), 1993년 이대진(해태), 1994년 주형광(롯데), 1998년 김수경(현대), 2000년 이승호(SK)-조규수(한화), 2002년 김진우(KIA), 2004년 오재영(현대), 2006년 류현진(한화)-한기주(KIA)가 전부다. 류현진과 한기주가 각각 18승과 10승을 올린 이후로는 11년째 고졸 신인 10승의 씨가 말랐다.
이뿐 아니다. 입단 첫해에 3할을 친 신인 타자는 1998년 대졸 신인이었던 삼성 강동우 이후 20년 넘게 나오지 않았다. 신인 선수들은 프로 투수들의 변화구에 적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1군 풀타임 출장은커녕 신인 야수가 개막 엔트리에만 들어도 화제가 될 정도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이정후의 시범경기 돌풍은 여러모로 신선하다. 아버지인 이종범 위원조차 “객관적으로 봐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선수치고는 프로에 적응을 잘하고 있는 것 같다. 확실히 방망이에 맞히는 능력이 있다”고 조심스럽게 칭찬했을 정도다.
140km 후반대 묵직한 직구를 던지는 고우석. 사진출처=LG 트윈스 홈페이지
# 유망한 신인 투수들의 부상과 수술
이정후는 올해 1차 지명을 받았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1차 지명을 받아 더 화제였다. 1차 지명은 모든 아마 야구선수들이 바라는 ‘꿈의 단어’다. 전국에 10개밖에 없는 프로 구단에서 가장 먼저 선택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각 지역에서 내로라하는 야구선수로 인정받았다는 의미다. 억대 계약금은 1차 지명 뒤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수순이다. 기대를 많이 받는 만큼 기회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림자도 분명히 존재한다. 입단 첫 해에 프로 1군에서 활약하는 1차 지명 선수들이 거의 없다. 특히 고교 시절 에이스로 활약하면서 많은 공을 던진 투수들은 더 그렇다. 야구선수들의 수술과 부상을 전문으로 다루는 서울의 한 정형외과에는 1년 내내 팔꿈치 수술을 받으러 오는 고교 야구 투수들이 줄을 선다는 후문이다. 고교 야구의 혹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올해도 이미 1차 지명 투수의 부상 소식이 전해졌다. 최대어로 꼽혔던 롯데 1차 지명 투수 윤성빈의 어깨 상태가 좋지 않다. ‘부상’이라고 단정 지을 만한 상황은 아니라고 해도, 마무리캠프와 1군 스프링캠프 모두 참가하지 못했다. 2군 스프링캠프에서도 캐치볼과 롱토스만 소화했다. 고교 3학년이 끝날 무렵부터 어깨에 이물감을 느낀 게 문제였다.
지난해 역시 두산 1차 지명 투수인 이영하가 입단 직후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NC 1차 지명 투수인 박준영도 시속 150㎞ 강속구로 시즌 초반 화제를 모았지만, 결국 지난해 9월 수술대에 올랐다. 회복이 끝난 뒤 프로 선수로서 다시 출발을 해야 한다.
특급 유망주일수록 부상과 수술의 위험에 더 많이 노출된다. 2009년 두산에 1차 지명으로 입단한 성영훈이 대표적이다. 성영훈은 그해 계약금 5억 5000만 원을 받은 기대주였다. 김태형 두산 감독은 “처음 입단해서 불펜에서 던지는 것을 보고 다른 선수들과 기본적인 재능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고 떠올렸다. 그러나 성영훈은 고교 시절 혹사 여파로 프로에서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다. 부상과 재활을 지금까지 거듭하고 있다.
NC 윤형배도 그렇다. 2013년 NC에 특별지명으로 입단하면서 계약금 6억 원에 사인했다. 성영훈 이후 최고 금액을 받은 신인 선수였다. 그러나 입단 이후 팔꿈치 수술을 받았고 어깨에도 통증을 느껴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현역으로 군대까지 다녀온 뒤 결국 지난 16일 이름을 윤호솔로 개명했다. 옛 이름과 함께 부상과도 작별하고 싶다는 의지였다.
과거에는 ‘수술한 선수’를 향한 부정적 시선이 많았다. 천하의 류현진도 인천 동산고 시절 팔꿈치 수술 경력 탓에 연고 지역 1차 지명을 받지 못했을 정도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 않다. 선수층이 두꺼운 팀은 수술 경력이 있거나 수술이 필요한 선수라도 재능이 있으면 뽑는다. 올해 두산 1차 지명 투수인 최동현도 동국대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지난해 4월 팔꿈치 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두산은 예정대로 최동현을 1차 지명한 뒤 재활할 시간을 줬다. 어차피 곧바로 1군에서 던지기보다 미래를 보고 키우겠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고교야구 투구수 규정 논란…WBC처럼 안 되겠니? 여전히 너무 많은 투수들이 프로에 입단한 뒤 수술대에 오른다. 고교 야구가 투수들의 팔꿈치와 어깨를 제도적으로 보호해야 할 시기가 온 듯하다. 실제로 관련 규정이 만들어질 움직임도 보인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KBSA)는 프로-아마추어 공동 발전을 위한 대책 가운데 하나로 아마 야구 투구 수 제한을 논의하고 있다. KBSA와 KBO는 최근 태스크포스(TF)팀을 구성해 지난 8일 첫 미팅을 했다. TF팀의 현안 가운데 하나가 유소년 조기 부상 방지를 위한 대책 마련이다. ‘투구 수 제한’과 ‘변화구 투구 금지’가 이 안에 포함돼 있다. KBSA의 한 관계자는 “고교 야구 투수들의 투구 수 제한 문제도 함께 논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고교 야구에는 투구 수 제한이 있다. 그러나 너무 느슨하다. ‘한 경기 130구 이상 투구 금지’라는 조항뿐이다. 이후 휴식일은 보장되지 않는다. 이틀 연속 130구씩 던지는 일도 가능하다. KBSA의 또 다른 관계자는 “현실적인 벽에 부딪히는 일이 많았다. 성적을 내야 하는 각 학교들은 아무래도 중요한 경기에 에이스를 계속 낼 수밖에 없다”며 “선수 수가 지역이나 학교별로 불균형이 심하다”고 했다. 예를 들어 서울의 A나 B 고교는 야구부 전체 인원수가 70명을 웃돌기도 한다. 학년별로 20명이 넘고, 3군까지도 운영이 가능하다. 반대로 일부 지역에서는 야구팀 운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선수밖에 모이지 않는다. 그 인원으로 같은 조건에서 전국 대회를 치러야 한다. 잘하는 투수 한 명에게 부하가 걸리게 되는 구조가 될 수밖에 없다. KBSA는 고교 투수들의 혹사를 방지하기 위해 주말리그를 도입했다. 주말리그는 말 그대로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경기를 치른다. 일요일 경기에서 공을 많이 던져도 5일을 쉴 수 있다. 그러나 토너먼트 방식으로 치러지는 전국 대회는 어쩔 수 없다. 위로 올라갈수록 매일같이 경기가 이어진다. 우승을 향한 압박감도 심해진다. 결국 도돌이표다. 따라서 KBSA도 주말리그가 아닌 토너먼트 형식의 대회에 한해 투구 수 제한을 도입하는 안을 고려하고 있다. 미국의 고교 야구가 좋은 예시를 제공한다. 미국 고교체육연맹은 올해부터 모든 고교 투수들의 투구 수를 제한하기로 결정했다. 이전까지는 일주일 14이닝, 이틀 10이닝 식으로 이닝 제한 규정을 주마다 다르게 적용했다. 그러나 이 규정에는 문제점이 많았다. 일주일에 14이닝이라면 한 경기에서 7이닝을 던진 뒤 하루만 쉬고 다음 경기에서 다시 7이닝을 던져도 제재할 방법이 없다. 규정의 허점을 파고들 여지가 충분히 많았다. 따라서 올해부터는 기준을 이닝이 아닌 투구 수로 바꿨다. 미국 50개 주가 각 주 실정에 맞는 투구 수 제한 규정을 만들고 따르기로 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주가 일주일 투구 수를 100~120구 내외로 제한하기로 했다. 조지아주의 경우 한 경기 최대 투구수를 110구로 제한했고, 35구 이상이면 1일 휴식, 69구를 초과하면 이틀 휴식, 85구를 초과하면 사흘 휴식을 무조건 보장해야 한다는 규칙을 정했다. 34구 미만으로 투구해야 이틀 연투가 가능하다. 앨라배마 주도 2학년과 3학년은 120구까지 던질 수 있지만, 1학년은 100구를 넘기지 못한다. 75구를 초과하면 사흘을 쉬어야 하고 25구 이하를 던져야 이틀 연투할 수 있다는 규정이다. 프로-아마 야구 공동 발전 TF팀도 이 같은 미국 야구의 룰을 모니터하고 있다. KBSA 관계자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적용했던 투구 수 제한과 비슷한 형식이라고 보면 된다”며 “어린 선수들의 혹사를 방지하기 위해 KBSA와 KBO가 우리 야구 현실에 맞는 최적의 방법을 강구하고 있다”고 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