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0일 청와대 오찬회동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이명박 대통령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이나 박근혜 전 대표가 서로 들어줄 수 없는 억지요구를 하며 상대방의 굴욕을 강요하는 ''치킨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보고 있다. 양측이 청와대 회동까지 했지만 합의점을 찾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서 두 사람이 결별에 앞서 명분을 축적하고 있다는 섣부른 관측도 나오고 있다. 그래서 이번 친박 인사 복당 문제가 ''선별 복당''으로 매듭지어진다 해도 이 과정에서 현 정권에 ''질려버린'' 박 전 대표가 장기적으로는 결별을 준비할 것이라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과연 박 전 대표의 ''마이 웨이''는 성공할 수 있을까.
“또탈당 이야기냐. 박근혜 전 대표가 무슨 양치기 소녀냐. 오지도 않는 늑대 이야기를 벌써 몇 번째 하느냐.”
지난해 8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무렵부터 올해 4·9 총선 국면까지 친이(친 이명박 대통령)그룹과 친박그룹 간의 권력투쟁이 극에 달할 때마다 박근혜 전 대표 주변에서는 ''탈당''이라는 초강수가 ''입버릇''처럼 터져 나왔다. 이번 친박인사 복당 문제를 둘러싸고도 탈당 이야기가 퍼지자 친이그룹에서는 ''여당이 되었는데도 철없는 어린애처럼 생떼만 부리고 무책임한 벼랑끝 전술로 대통령을 흔들고 있다''며 격앙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에 박 전 대표 측이 흘리는 ''탈당설''은 예전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는 점에서 여당 분열의 단초를 던져주고 있다. 먼저 정치적 상황이 변했다.
박 전 대표는 지난해 5월 경선 룰을 합의하는 과정에서 당시 이명박 후보를 향해 “세 번이나 양보했는데 또 양보하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제는 결정을 지어야 한다”며 ''양보 불가'' 의지를 재확인하며 최후통첩을 날린 바 있다. 당시 박 전 대표는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경선에 불참하겠다는 초강수를 던졌다. 이에 이 후보 측은 결국 ''대승적 차원''에서 경선 룰 중재안의 핵심인 여론조사 하한선 보장 조항을 양보하면서 당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았다. 이는 박 전 대표의 벼랑 끝 전술이 이 후보 측의 양보를 이끌어낸 대표적 사건이었다.
그 뒤 대선이 끝나고 4·9 총선 공천 과정에서 박 전 대표는 다시 한 번 ''탈당 카드''를 포함한 초강수를 빼들었다. 박 전 대표는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측이 총선 공천과 관련해 광화문 등지에 비밀 캠프를 차려놓고 친박그룹 살생부 리스트를 작성하는 등의 ''밀실 공천'' 징후를 포착하고 그것에 대비해 실제로 탈당을 적극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사정을 잘 아는 한 친박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 측이 실제로 탈당 시나리오를 준비했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 이를 감지한 이명박 당선인 측에서 먼저 만남을 제의해와 1·23 회동이 이루어져 ''국정의 동반자'' 선언이 나오게 됐다”라고 말했다.
당시 박 전 대표는 주변 지지자들로부터 “공천이 불공정하게 될 바에야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갈라서자”라는 요구를 수없이 받아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탈당카드는 지난해 경선 룰 협상 과정 때보다 훨씬 강한 명분을 가지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때도 이명박 당선인 측이 양보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그는 박 전 대표와의 1·23 회동을 성사시켜 두 사람의 신뢰관계 회복에 정점을 찍는 이벤트를 보여주며 양측 간의 갈등을 봉합한 바 있다. 당시 박 전 대표는 하루 뒤인 1월 24일 진통을 겪던 공천심사위 구성안을 전격 수용했다. 탈당 직전까지 갔던 공천 갈등 국면에서 이 당선인이 공정 공천을 약속하며 내민 손을 박 전 대표가 덥석 잡았던 셈이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의 박 전 대표 탈당 국면은 유사한 점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12·19 대선과 4·9 총선을 앞두고 당을 이끌어나가는 주류로서 정치적 양보를 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떠안고 있었다. 한나라당의 한 초선 의원은 이에 대해 “지난해 5월 경선 룰 합의 때는 10년 만의 대선 승리라는 당내 공감대가 있었다. 경선이 깨지면 한나라당의 대선 승리도 없다는 위기감이 있었기 때문에 박 전 대표의 요구를 이명박 후보가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번 4·9 총선 전 1·23 회동도 이명박 정부의 성공을 위해 의회권력을 장악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박 전 대표와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었다. 예전 두 번의 상황은 박 전 대표가 탈당 카드로 압박해 올 때마다 이 대통령이 양보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번 친박 인사 복당 문제는 앞선 두 개의 정치적 상황과는 다른 점이 있다. 한나라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공개석상에서 ''이제 내 경쟁자는 당 내에 없다. 세계의 지도자들과 경쟁하겠다''라고 여러 번 언급했다. 이런 인식은 대권을 이룬 이 대통령에게 박 전 대표는 국정의 동반자가 아닌 ''협력자''에 불과하다는 점을 에둘러 선언한 것이다. 대선·총선 국면에서는 대의명분 때문에 박 전 대표의 협력이 필요한 상수였지만 이제는 그를 야당의 다른 지도자와 똑같이 종속변수로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라고 말했다.
최근 박 전 대표가 ''5월 말 일괄 복당''이라는, 이 대통령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카드를 들이민 것도 그가 지난 1시간 50분 동안의 단독 회동에서 이 대통령의 ''복심''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런 정치적 상황 변화 때문에 박 전 대표는 탈당 카드를 ''수동형''이 아닌 ''능동형''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정치적 상황 변화와 함께 극단적으로 치닫는 양측의 감정싸움도 박 전 대표의 탈당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지난해 5월 박 전 대표와 이명박 후보 측이 첨예한 감정 대립을 벌일 때 당시 박 전 대표는 “(원칙을) 걸레같이 너덜너덜 만들어야 되겠느냐”라며 이 후보에게 직격탄을 날렸고, 이에 이 후보 측의 정두언 의원은 “공주 같은 발언”이라고 폄하하며 극도의 불신을 보였다.
▲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 ||
현재의 국면은 경선 전후부터 날카롭게 대립해온 친이·친박 양측의 감정이 4·9 총선 과정을 거치며 더욱 악화돼 이번 친박 인사 복당 국면에서 결국 곪아 터지게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이번 사태가 곧 박 전 대표로 하여금 '탈당 카드'를 내지를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치적 상황 변화, 극단적인 감정 대립과 함께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도 박 전 대표가 탈당 카드를 예전보다는 더욱 쉽게 꺼내들 공간을 만들어주고 있다. 이 요소는 향후 박 전 대표의 탈당과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와의 연합, 더 나아가 야당 내 보수성향 세력들과 정계개편을 이루어내는 큰 틀의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일단 전문가들의 대체적 분석은 박 전 대표가 쉽게 탈당을 하지는 않겠지만 이 대통령의 지지율이 급락하고 국정 운영자로서 자격미달이라는 국민적 공감대가 높아진다면 탈당을 결행해 이명박 정권의 엄중한 감시자가 되겠다는 명분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와 자연스런 연대를 하고 통합민주당 내 보수성향을 가진 세력과도 연합을 이끌어내는 큰 틀의 정계개편에서 박 전 대표가 주도권을 쥘 수도 있다. 이런 보수 대연합 정계개편 가능성은 박 전 대표가 이미 '한반도 대운하 건설 반대',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개방 재협상' 등을 외치며 야당과 정치적 주파수를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 박 전 대표는 적어도 몇 가지 중요 정책 면에서는 야당과도 언제든 공조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다.
한나라당의 한 친이계 의원은 이에 대해 “현재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이유는 이 대통령의 '역량'을 감안하면 국정을 완전히 장악해 성공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면 (박 전 대표가) 국정실패의 공동책임자로 몰릴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음을 인식하고 일정한 시점에서 발을 빼려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미국산 쇠고기 파동을 겪으면서 박 전 대표의 이 대통령의 정치적 역량에 대한 이 같은 불신이 더욱 탈당 카드를 부추기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그래서 나온다. 하지만 원칙을 중요시하는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의 실패 공간을 치고 들어가 정치적 성공을 이루어내는 기회주의적 태도를 취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런데 이마저도 이 대통령이 계속 박 전 대표를 몰아세우고 무시할 경우 그 부메랑은 탈당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다.
친박 인사의 일괄 복당을 부르짖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 과연 이번에도 그의 '결단'이 '양치기 소녀'의 얘기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그가 경고했던 '늑대'가 실제로 나타나 이명박 대통령을 물어버릴지 궁금증이 더욱 커지고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