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나라당 차기 당권을 노리는 박희태 전 국회부의장(왼쪽)과 정몽준 최고위원이 최근 며칠 간격으로 ‘개헌 논의’ 시점에 대해 다른 주장을 내비쳤다. 국회사진기자단 | ||
지난 2일 여권 몫 신임 국회의장 후보로 당선된 김형오 한나라당 의원은 의장 내정 일성으로 “의장 직속으로 개헌자문기구를 만들어 가급적 상반기 국회에서 개헌 문제를 매듭짓겠다”고 밝혀 개헌 논의에 불을 지폈다. ‘권력구조의 변화’라는 점에서 사안이 가지는 폭발력을 감안하면 개헌 논의는 쇠고기 협상 문제나 FTA 문제보다 더 정치권을 ‘혼돈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큰 화두다.
현재 여야는 대체적으로 개헌의 필요성에는 공감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그 속내를 들춰보면 각 정당별로, 정당 내에서도 각 계파별로 개헌을 바라보는 시각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개헌의 폭을 놓고도 단순히 대통령의 임기를 조정하는 문제에서부터 아예 권력 체제를 대통령중심제에서 의원내각제로 바꾸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준에서 논의가 시작되는 모습이다. 특히 개헌이 실제 이뤄진다면 그 내용에 따라 현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문제까지도 거론될 가능성이 있는 만큼 여권 내부에서는 개헌 논의가 언제쯤 본격적으로 공론화될지에 대해서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노 전 대통령이 지난해 1월 ‘원 포인트 개헌론’을 들고 나온 것에 대해 ‘정국 돌파용’이라는 비판도 일었지만, 집권세력의 책임정치 제도화 등 내용 자체는 공감대를 이룰 만한 것이었기에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도 “일단 내년(2008년) 18대 국회에서 논의해보자”는 식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그후 1년여 만에 여야가 뒤바뀌긴 했지만 어쨌든 당시 ‘OK사인’을 냈던 여야 모두 이번 18대 국회에서는 개헌을 해야 한다는 ‘책무’를 지닌 셈이다.
정식 개원식은 못했지만 어쨌든 지난 5일 18대 국회가 ‘개원’했으므로 당연히 정치권에선 개헌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개헌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4년 중임제로의 전환’이 개헌의 관심 포인트였다면, 최근 들어서는 ‘이번 기회에 아예 권력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식의 확대 개헌론까지 나오는 등 다양한 차원에서 개헌논의가 이뤄지는 분위기다.
물론 뚜렷한 승부를 좋아하는 한국민의 정치행태상 의원내각제보다는 ‘승자독식’ 형태인 대통령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아직까지는 지배적이다. 실제 지난달 말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전국 성인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6.7%가 대통령 4년중임제를 선택, 의원내각제(11.3%)를 크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대통령제가 유지되는 한 국민대통합은 요원하다는 점을 들어 내각제 전환을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개헌의 내용도 논쟁거리지만 더 큰 문제는 사실 ‘언제, 어떤 형식으로’ 공식적인 개헌 논의를 시작하느냐는 점이다. 여야 간 시각차는 둘째 치고 개헌 공론화 착수 시점을 둘러싸고 여권 내부에서조차 상반된 의견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나라당 차기 당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박희태 전 국회부의장과 정몽준 최고위원의 입장이 정확히 대척점에 서 있다.
먼저 선수를 치고 나온 것은 박 전 부의장. 박 전 부의장은 최근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개헌 논의는 경제가 안정되는 내년부터 하는 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박 전 부의장은 “현 대통령의 임기는 보장돼야 한다. 이미 국민들로부터 보장 받은 임기이기 때문에 개헌으로 고칠 수는 없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박 전 부의장은 권력구조에 대해서도 대통령제보다는 의원내각제가 가미된 이원집정부제를 선호하고 있다고 밝혔다.
반면 며칠 뒤인 지난 5일 정 최고위원은 한국선진화정책학회가 주최한 개헌 관련 세미나에서 “경제살리기에 주력하기 위해 개헌 논의를 내년으로 미뤄야 한다는데 (박 전 부의장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고 나섰다. 정 최고위원은 “청와대가 개헌공론화에 따른 권력 누수 우려도 있으나 개헌 논의는 한나라당과 청와대가 정보를 공유하면서 진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박 전 부의장과 달리 정 최고위원은 의원내각제나 대통령제에 대한 뚜렷한 호불호를 드러내진 않았다.
정리해보면 주로 박 전 부의장이 조기 공론화에 따른 권력 누수나 이 대통령의 임기단축 가능성에 대한 청와대의 우려를 대변하고 있다면, 정 최고위원은 당 내부 여론에 무게중심의 방점을 찍은 모양새다. 양측의 ‘소신’이 달라서 의견이 상반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7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서로 차별화된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당내 또 다른 ‘대주주’인 박근혜 전 대표는 최근 들어 개헌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힌 적은 없다. 그러나 박 전 대표는 과거 여러 차례에 걸쳐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해온 개헌지지자다. 특히 “4년 중임제는 내 신조”라고 여러 차례 밝힐 만큼 대통령중임제로의 개헌에 대해 적극적이다.
그러나 여권 일각에선 지난해 경선 과정을 통해 충청권과 영남권을 빼면 확실한 지지세를 보이지 못했던 박 전 대표가 결국 내각제 지지로 돌아설 것으로 관측하는 시각도 있다. 여권 핵심부 일각에서도 개헌이 워낙 민감한 문제인 만큼 정치권에서 거론되는 개헌론의 득실을 면밀히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정가 인사는 “여당에선 재집권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이 내려진다면 현행 대통령 임기를 줄여서라도 대통령중임제 개헌을 추진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정치 상황으로 봐선 개헌 추진 자체가 여권 핵심부로선 위험한 도박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민주당 등 야권은 일단 개헌 논의 자체에 대해서는 비교적 호의적이다. 다만 현재 개헌 논의가 여권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불안감을 느끼는 분위기다. 여권이 쇠고기 정국으로 처한 난국을 ‘개헌 카드’를 앞세워 뚫고 나갈지도 모른다는 게 불안감의 주된 이유다. 또 현재 153석을 가진 여당이 헌법상의 ‘헌법개정안을 발의할 요건’을 갖췄다는 점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야당을 ‘들러리’로 세운 채 여당이 일방적으로 개헌 논의를 진행하고, 이 과정에서 정국의 주도권을 뺏길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다.
이 때문에 야당에서는 개헌 논의가 어느 특정 정파의 이해에 얽매이지 않게 공론화의 과정을 충분히 거쳐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헌법인 ‘1987년 헌법’을 비롯해 그동안의 개헌 작업이 대부분 엄청난 정치적 혼란상을 연출한 끝에 이뤄졌다는 점에서 이번 개헌 논의도 얼마나 큰 ‘사회적 손실’을 감수하면서 이뤄질지는 아무도 예측하기 힘든 상태다.
이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