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쇄신책 핵심인 인적쇄신 범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이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류우익 대통령 실장(왼쪽), 한승수 국무총리(오른쪽) 등과 함께 회의실로 들어오는 모습. | ||
그동안 쇠고기 정국의 해법을 놓고 여권 내부에서는 치열한 파워게임이 벌어져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이 대통령의 ‘결심’도 늦어졌다는 후문이다. 그간 여권에서는 전면적 개각 수준의 ‘대개편론’부터 일부 장관과 수석 교체 수준의 ‘소개편론’까지 백가쟁명식 해법이 논의돼온 것으로 알려진다. 이 같은 ‘권력게임’에 가까운 논쟁과 내부 충돌은 쇄신책 발표 연기로 이어져 ‘국민과의 소통’에 대한 이 대통령의 진정성이 의심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난국의 수습책을 놓고 과연 여권 이너서클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쇠고기 정국 뒤에서 숨 가쁘게 펼쳐지고 있는 여권 내부의 갈등을 추적해 보았다.
지난 5월 3일부터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켜지기 시작한 ‘촛불’이 한 달 넘게 타오르고 있다. 집회 참석자는 이미 100만 명을 넘어섰고 이를 중계하는 모 인터넷 중계 사이트의 1주일 간 누적 접속자 수도 400만 명을 훌쩍 넘겨 폭발적인 여론 결집력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명박 대통령의 100일 지지율도 역대 최저 기록을 경신하며 16.9%(6월 5일 리얼미터 조사)로까지 곤두박질쳤다. 특히 한나라당은 지난 6·4 재·보선 수도권 3곳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전패하는 등 ‘재·보선 불패신화’에 마침표를 찍고 말았다. 촛불집회가 ‘네티즌 일부’에서 비롯된 지엽적이고 이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이고 구체적인 민심 이반을 노정하고 있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그럼에도 이명박 대통령이 손에서 만지작거리고 있던 국정 쇄신책은 2주 가까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한나라당에선 “타이밍을 놓쳤다”며 아우성을 쳤지만 청와대 분위기는 초반 ‘화들짝’에서 ‘버티기’ 모드로 바뀌고 있는 듯하다는 소리도 나왔다. 여기에는 국정 쇄신책의 핵심이 될 인적 쇄신의 범위를 놓고 당·청을 비롯해 이상득-소장파 계파까지 복잡하게 얽힌 권력투쟁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게 정가의 분석이다.
먼저 당·청 간 갈등을 살펴보자. 현 정권 들어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은 지난 총선 공천과정에서 드러났듯이 철저하게 청와대의 들러리였다. 당 대표 인선을 비롯, 친박그룹 복당 문제 등에 관해 청와대 입만 바라보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차기 대권주자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강재섭 대표도 당연히 이 대통령의 ‘전령’ 역할에 만족, 쓴소리를 할 수 없었다. 한나라당 당직자들도 7월 전당대회를 통해 등장할 새 지도부 구성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다. 위(청와대)에서 오더가 내려오면 그대로 따를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한나라당이었기에 최근 이명박 정부의 ‘일시적 붕괴’는 집권 여당의 위상을 되찾기 위한 모멘텀을 주었던 게 사실이다. 당에서는 “인적 쇄신으로 민심을 진정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대책이든 타이밍을 맞춰야 한다”거나 “과거 대통령의 인사스타일처럼 시간을 끌어선 곤란하다”라는 말들이 거침없이 튀어나왔다. 청와대가 당 의견을 무시하고 독주를 하다가 ‘민심이반’이라는 대형 사고를 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여당에 대한 섭섭함을 감추지 않고 있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정부가 미국에 월령 30개월 이상 쇠고기의 수출 중단을 요구했을 때 민심 흐름을 역전시킬 수 있었다. 한나라당이 민주당과의 홍보전에서 패했다”라고 주장했다. 청와대로서는 한나라당의 민심 수습 요구에 떠밀려 국정 운영 실패를 자인하는 굴욕을 당하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가 많은 것으로 알려진다.
여의도의 한 전략 전문가는 여권의 ‘네 탓 공방’에 대해 “이번 기회에 당·청 간 새로운 권력 견제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까지 여당은 철저하게 청와대의 ‘원격조종’에 의해 움직였다. 그 결과 여당은 악화된 민심을 제대로 권력 핵심부에 전달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청와대가 다 알아서 하니 당은 충실히 따르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쇠고기 파동에서 당·청이 적당히 거리를 두고 견제를 해야 상생할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여당은 계속 청와대 그림자에 가려져 있다가 일이 터지면 같이 망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이런 ‘권력 균점’ 필요성은 각계각층에서 이 대통령에게 쏟아내는 국정 쇄신안의 핵심 모토로 인식되고 있다. 청와대가 욕심을 버리고 권력을 적당히 분배해 놓았다면 이번 쇠고기 파동처럼 ‘이명박 퇴진론’이라는 직격탄을 맞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런데 여권 일각에선 당·청 갈등보다 더 심각한 것이 여권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득 계파와 범 이재오 계파(소장파 포함)의 권력 투쟁이란 지적도 나오고 있다. 상처뿐인 이번 ‘전투’에서 누가 승리하느냐는 결국 핵심 인물 몇 명의 진퇴 여부로 결정 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양 진영 간 전투 결과의 키 포인트는 류우익 대통령실장과 박영준 기획조정비서관의 교체 여부다. 두 사람은 청와대에서 이상득 의원과 가까운 대표적 인사들이다. 여권 내부에서는 “류 실장은 취임 초부터 범 이재오 계파로부터 ‘정무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아마추어’라는 공격을 받아왔고, 박 비서관도 이 대통령 국정 실패의 핵심인 인사 파동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경질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 소장파 의원은 류 실장의 능력을 평가절하하며 “그의 존재는 청와대 최고 참모로서 정부 전반의 조정 및 국정철학 전파 역할에서 빵점에 가깝다. 일각에서는 ‘2인자의 존재를 싫어하는 이 대통령이 관리형으로 대통령실장에 임명했는데 그의 의욕과 욕심이 지나쳐 오히려 더 큰 권세를 행사하고 있다’라는 얘기도 있다”라고 말했다. 청와대 사정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이와 관련해 “청와대의 상당수 직원들이 이번에 류 실장이 교체돼야 한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박 비서관은 또한 여권에서 “인사에 관한 한 실권을 가지고 있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일각에서는 “모든 인사는 박 비서관에게 물어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돈다. 또한 현 정부에 줄을 대려는 ‘구직자’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바로 박 비서관이라고 전해진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 비서관이 정권 초부터 청와대와 정부 부처 핵심 요직에 대한 인사에 관여한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그가 여권 최고 실세로 떠올랐다. 실제로 당 인사들 가운데 몇몇은 그와의 친분 때문에 정부 정무직으로 옮겨가 ‘과연 박영준이 세긴 세구나’라는 이야기도 나돌았다”라고 말했다. 박 비서관은 이에 대해 “그런 주장은 악의적 소문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여권에서 그의 영향력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만약 이 대통령이 류 실장과 박 비서관의 경질을 포함한 청와대의 전면적 쇄신을 단행할 경우 여권의 권력 중심이 범 이재오 계파로 옮겨가는 징검다리가 될 전망이다. 하지만 두 사람 가운데 한 명만 살아남아도 이번 이상득-범 이재오 계파의 전쟁은 이상득 계의 승리로 막을 내릴 가능성이 크다.
류 실장의 진퇴와 함께 박형준 전 의원의 청와대 입성 여부도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번 이 대통령의 국정 쇄신책 핵심은 박 전 의원의 청와대 입성 여부에 달려 있다”라고까지 말한다. 그가 만약 이 대통령의 부름을 받는다면 범 이재오 계파 중 소장파가 전면에 등장하는 신호탄이 될 것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는 지난 경선-대선 과정에서 맹활약했던 정무 라인의 복원이라는 점에서 여권 권력 운용의 전면적 변화가 예상된다. 현재 쇠고기 정국이 악화된 핵심적 배경이 정무 라인의 붕괴에 따른 민심 이반으로 연결됐기 때문에 그가 신설될 홍보보좌역(수석비서관급)으로 부활한다면 정무 라인의 대폭 이동도 예상된다.
지난 대선과정에서 활약했던 한 인사는 이에 대해 “사실 지난 경선-대선 때 이명박 캠프의 정무라인은 정두언 박형준 정태근 이태규 등의 소장 전략가들이 주축이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청와대로 들어가면서 정무라인이 모두 바뀌었다. 옛 정무 비서진은 한 명도 입성하지 못했다. 이상득 의원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는 현재의 정무라인은 경험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이번 민심 악화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앞으로 정무 라인의 변화 없이는 이명박 정권의 성공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박 전 의원의 청와대 입성과 관련해 이 대통령이 ‘총선 낙선자의 6개월 이내 권력 진입 배제’라는 장벽을 쳐놓긴 했지만 지금이 비상시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족쇄를 풀어 줄 수도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박 전 의원 측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사실 청와대로부터 직접적인 ‘콜’을 받은 적이 없다. 처음에는 부정적 분위기였는데 현재로서는 청와대행 가능성이 반반 정도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청와대의 핵심실세 A 씨가 박 전 의원이 입성해 주류로 부상할 경우 자신이 변방으로 밀려날 것을 우려해 끝까지 반대하고 있다는 얘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일부에서 박 전 의원과 관련된 검증되지 않은 소문을 흘리며 저항을 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다.
이제 이 대통령은 조만간 광범위한 국정 쇄신책을 내놓을 예정이다. 그런데 여권 일각에서 진행되고 있는 죽기 살기식 권력 투쟁으로 인해 이 대통령의 국정쇄신 선택지가 ‘누더기’가 될지도 모른다는 게 정치권의 우려이자 진단이다. 과연 국민들의 ‘촛불’은 그 누더기마저 태워버릴까.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