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전 대통령(왼쪽)과 이명박 대통령. | ||
노 전 대통령 측은 7월 19일 새벽 대통령 기록물을 국가기록원에 반환했지만 ‘e지원’ (청와대 온라인업무관리시스템) 서버 반환 문제를 놓고 양 측은 또다시 정면 충돌하고 있는 형국이다. 청와대는 기록물의 추가 유출 여부 확인을 위해 봉하마을에 설치돼 있는 ‘e지원’ 서버 등 전산 장비도 당연히 반환해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노 전 대통령 측은 반환 대상이 아니라며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18일 밤에는 기록물들을 직접 성남의 대통령 기록관에 일방적으로 넘기기도 했다. 봉합 국면으로 접어들었던 기록물 유출 사건이 또다른 난관에 부딪힌 형국이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이번 사건이 어떤 식으로 종결되든 신구 정권간의 불신과 앙금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정치적 실리와 명분을 놓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피 말리는 두뇌게임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는 기록물 유출 사건 제2라운드 속으로 들어가 봤다.
“이미 퇴직한 비서관과 행정관 7~8명을 고발하겠다는 마당에 어떻게 더 버티겠느냐.” “두려운 마음으로 이 싸움에서 물러선다.”
노 전 대통령이 7월 16일 ‘이명박 대통령께 드리는 글’에서 밝힌 내용이다. 국가기록물 유출 사태를 둘러싼 신구 정권간의 지루한 줄다리기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는 사실상 백기투항을 선택한 셈이다.
청와대는 즉각 환영의 뜻을 밝혔고 이 대통령도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어긋남이 없도록 처리하라”고 지시해 이번 사건이 봉합 국면으로 접어드는 듯했다.
하지만 청와대 측은 대통령 기록물 유출은 명백한 불법인데다 형사소송법에 ‘공무원은 불법행위가 있으면 고발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어 고발하지 않을 경우 직무유기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를 명분으로 검찰 고발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측이 반환한 기록물이 원본인지 여부, 추가 사본을 갖고 있는지 여부 등을 좀 더 파악한 후 최종 결정을 내리겠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더구나 ‘대통령께 드리는 글’에 나온 여러 가지 표현에 대해서는 내심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측이 뭔가 칼을 갈고 있다는 의구심을 지우기 힘들다는 것이다.
양측이 국민적 관심사로 부상한 국가기록물 유출건에 대해 정치적 실리와 명분을 놓고 치열한 수 싸움을 벌이며 고도의 두뇌게임을 펼치고 있는 양상이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승부사로 통하는 노 전 대통령이 쉽게 백기투항을 한 배경에 무언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뿐아니라 총체적 위기국면에 처한 청와대와 여권 핵심부도 이번 카드를 국면 전환용으로 최대한 활용할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정치권 주변에서는 노 전 대통령이 기록물 반환 결정을 한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를 놓고 뒷말이 무성하다. 노 전 대통령은 결단 전날(15일)까지 “기록물을 봉하마을로 갖고 와 열람하는 것은 실정법상 정당한 권리 행사다. 정략적 의도에 기반한 전직 대통령 흠집내기를 중단하라”는 완강한 입장을 보인 바 있다. 하루아침에 기존 입장을 뒤집으면서 노 전 대통령이 내놓은 명분은 자신의 청와대 참모들이 법적 시비에 휘말리는 것을 우려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은 반환 결정 당일 오전 참모들과 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나를 괴롭히거나 고발하는 것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지시하고 결정한 일을 놓고 애꿎게 부하 직원을 고발하고 괴롭히는 것만은 인간적으로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청와대를 강하게 성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정치권 관계자들은 노 전 대통령의 결단 배경에는 또다른 승부수가 내포돼 있을 것이란 의구심을 감추지 않고 있다. ‘3김’ 못지않게 ‘정치 9단’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노 전 대통령이 드러난 명분만으로 백기를 들었을 리 만무하다는 이유에서다.
노 전 대통령이 이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서한 마무리에서 ‘경제 위기’를 지적한 배경에도 정치적 노림수가 내포돼 있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노 대통령은 서한 말미에 “우리 경제가 진짜 위기라는 글들은 읽고 계시느냐”며 “참여정부 시절의 경제를 ‘파탄’이라고 하던 사람들이 지금 이 위기를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지금은 대통령의 참모들이 전직 대통령과 정치 게임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고 비꼬았다.
잇따른 외교정책 실정과 경제위기 등 총체적 난맥상에 빠진 이 대통령과 여권이 기록물 유출 사태를 부각시켜 정국 반전을 꾀하고자 할 수 있음을 미리 차단코자 하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친노그룹 인사들이 약속이나 한 듯 이날 일제히 이명박 정부의 국정 난맥상을 비판하고 나선 것도 이러한 분석을 뒷받침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이광재 민주당 의원은 한 라디오 프로에 출연해 “현재 상황이 경제도, 외교도, 국민도 힘이 든 상황이 아니냐. 이런 어려운 상황을 감안해 노 전 대통령이 결단을 내린 것”이라면서 “이 대통령이 진짜 어려운 현실을 직시하고 이런 일에 정력을 소모하는 일이 없길 간절히 바란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친노직계인 백원우 의원도 모 방송과의 인터뷰를 통해 “전직 대통령을 끌어들여 자기들이 지금 맞고 있는 위기에 대한 시선을 돌려보려고 하는 대단히 야비한 꼼수를 쓰고 있었다”고 비판했다.
노 전 대통령이 공개서한에서 6월 중순께 열람권 보장 문제를 놓고 이 대통령과 한 차례 통화한 사실을 공개한 것도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열람권 보장 문제와 관련해 이 대통령의 무성의한 태도를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의 논리에 명분을 쌓고 나아가 여론전에서 우위를 점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청와대가 노 전 대통령의 결단에 대해 겉으로는 환영의 뜻을 피력하면서도 내심 사건 처리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도 이러한 고도의 정치게임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검찰 고발’이라는 초강수를 꺼내 들자니 여론의 역풍이 걸리고 그렇다고 노 전 대통령이 원하는 대로 게임을 종결짓는 것도 정치적 실리를 챙길 수 없다. 이래저래 진퇴양난이다.
청와대는 공식적으론 “검찰 고발 문제는 국가기록원이 알아서 할 문제”라며 일정한 선을 유지하고 있다. 사태 추이에 따라 언제든 치고 빠질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려는 듯한 모양새다.
여권 내 일부 강경파는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의도와 관계없이 원칙적으로 사건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치고 있다. 위법상태를 알고도 묵인하는 것은 엄연한 직무유기인 만큼 정공법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차명진 대변인은 “범법행위를 없던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며 공세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부에서는 노 전 대통령 측이 자료반환에 비협조적이거나, 제2, 3의 복사본을 만들었을 경우엔, 검찰 고발로 갈 가능성도 없지 않다는 입장이다.
국가기록원 측은 여전히 ‘완전한 자료 반환’이 되려면 노 전 대통령이 복사해 간 e지원 시스템과 내부 자료, 사저에 설치된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메인 서버도 모두 회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e지원 시스템은 국가소유이며, 하드디스크와 서버를 남겨둘 경우 자료복원을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 측은 청와대 자료는 모두 반환하되, e지원 시스템과 개인 돈으로 구입한 컴퓨터 메인 서버는 사저에 두고 사용하기를 원하고 있다. 양측이 자료 반환 범위를 놓고 갈등을 빚을 소지가 있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의 반환 결정으로 잠시 봉합 국면으로 접어들었던 기록물 유출 사건이 반환 대상을 놓고 또다시 정면충돌하는가 하면 신구 정권간 고도의 정치게임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과연 신구 정권의 자존심 싸움과 맞물린 고도의 두뇌게임에서 누가 웃고 누가 울게 될지 국민적 시선이 봉하마을로 쏠리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