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최기문 전 청장, 이택순 전 청장, 허준영 전 청장. | ||
특히 이 전 청장의 경우 지난 6월 말 유진그룹 고문으로 영입된 사실이 <일요신문> 취재 결과 드러나면서 적잖은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지금까지 고위공직자들의 퇴직 후 기업행과 관련 이 전 청장의 행보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다지 곱지 않은 게 사실이다. 임기제가 처음 도입된 참여정부 시절 경찰총수를 지낸 최·허·이 세 사람의 퇴임 후 행보를 둘러싼 구설수 속으로 들어가 봤다.
참여정부 출범 직후 경찰청장에 발탁된 최기문 전 청장(2003년 3월~2005년 1월)은 임기제 첫 경찰수장이라는 프리미엄을 살리지 못하고 임기 3개월을 남겨놓고 ‘용퇴’했다.
당시 최 전 청장의 갑작스런 사퇴 배경을 놓고 정치권과 사정당국 주변에서는 갖가지 추측이 나돌기도 했다. 경찰 인사를 둘러싼 여권 핵심부와의 갈등설과 경찰 조직을 위한 ‘용퇴설’이 대표적이다.
최 전 청장은 퇴임 후 한동안 외부활동을 자제해 오다가 2년 뒤인 2007년 1월 재벌기업인 한화그룹 고문으로 영입되면서 사회활동을 재개했다. 퇴직 공직자의 경우 퇴직 전 3년간의 업무와 관련된 회사에 2년간 취업을 제한하고 있는 공직자윤리법상 취업제한 대상에도 포함되지 않는 합법적인 취업이었다.
하지만 2개월 후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이 터지면서 최 전 청장은 위기상황을 맞게 된다. 최 전 청장은 보복폭행 사건 무마 로비의 ‘몸통’으로 지목되면서 검찰에 의해 불구속기소됐고 지난 1월 24일 법원으로부터 실형(징역 1년)을 선고 받아 고위공직자로 쌓아온 명예를 송두리째 날려버리는 수모를 당했다. 이후 최 전 청장은 지난 7월 24일 항소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의 판결을 받았다.
당시 경찰청장이었던 이택순 전 청장도 사건 발생 후 한화 측 고위인사와 골프 모임을 갖는 등 부적절한 행보를 보여 구설수에 올랐지만 검찰 수사 결과 이 사건에 개입한 직접적인 정황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 전 청장은 특히 당시 사건 은폐 의혹과 관련해 자신을 비판했던 황운하 총경에 대해 중징계 의결을 요구해 경찰 내부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최 전 청장에 이어 참여정부 두 번째 경찰수장에 오른 허준영 전 청장(2005년 1월~같은 해 12월)은 임기의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11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했다. 2005년 12월 쌀개방 반대 시위 도중 농민 2명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사퇴 압력을 못 이기고 물러난 것.
허 전 청장은 퇴임 후 정치권 진출을 다각도로 모색했다. 재·보궐 선거 때만 되면 그의 출마설이 끊이질 않았다. 허 전 청장은 지난 4·9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서울 중구에 공천 신청을 했다. 참여정부에서 경찰총수를 지낸 허 청장의 한나라당 공천 신청을 놓고 정치권은 한때 ‘철새’ 공방전을 펼치기도 했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허 전 청장은 자신이 정치적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한나라당을 선택했지만 결국 한나라당은 이 지역을 전략공천 지역으로 분류하고 나경원 후보를 투입했다.
공천에서 탈락한 허 전 청장은 설상가상으로 사전 선거운동 혐의로 검찰 수사 대상에 오르는 등 이래저래 혹독한 시련기를 보내고 있다.
참여정부 마지막 경찰총수를 지낸 이택순 전 청장(2005년 12월~2008년 2월)은 임기를 다 채운 첫 경찰청장으로 기록되고 있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김승연 회장 보복폭행과 관련한 구설수에 오르는가 하면 지난해 12월에는 기자실을 강제 폐쇄하는 등 언론 탄압에 앞장섰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이 전 청장의 퇴임식을 지켜본 경찰 관계자들이 ‘상처뿐인 영광’으로 비유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 전 청장의 경우 퇴임한 지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대기업 고문으로 영입된 사실이 밝혀지면서 또 다른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일요신문> 취재 결과 이 전 청장은 지난 6월 말 유진그룹 측과 고문 계약직을 체결하고 경영진에 대한 조언과 자문역을 맡아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 전 청장은 기사가 딸린 고급 승용차를 제공받고 있고 적지 않은 고문료와 판공비를 지급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진그룹 측의 한 관계자는 6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 전 청장과 6월 말 고문 계약을 체결한 건 사실”이라며 “일반 대기업처럼 이 전 청장은 통상의 고문 업무를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청장이 어떤 대우를 받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관계자는 “담당자가 휴가 중인 관계로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줄 수 없으나 사규에 따른 대우를 받게 될 것”이라고 답했다.
재계 일각에서는 과거 고위공직자들이 대기업 고문 등을 맡아 대정부 로비 창구 역할을 해온 전례에 비춰볼 때 유진그룹의 이 전 청장 고문 영입 배경에도 말 못할 속사정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감추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유진 측은 “우리 그룹은 대정부 로비가 필요 없는 기업”이라며 “이 전 청장의 영입 배경에 말 못할 속사정은 없고 과거부터 유력 인사들을 고문으로 위촉한 전례가 많다”고 해명했다.
전통적인 레미콘 산업의 강자로 군림해 온 유진은 참여정부 당시 고려시멘트와 하이마트를 인수하는 등 공격적인 M&A를 통해 중견그룹으로 급성장한 대표적인 그룹이다. 하지만 유진그룹은 올해 들어 건설경기 악화로 주력업종인 레미콘 부문이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고 하이마트 인수에 따른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권 주변에서는 한때 유진그룹의 유동성 위기설이 나돌기도 했다.
업계 일각에서는 유진그룹이 이 전 청장을 고문으로 영입한 배경에는 그룹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모종의 해법 찾기와 무관치 않을 것이란 조심스런 관측을 내놓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