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20일 청와대에서 한나라 당 의원들과 만찬에 앞서 의원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국회 원 구성 협상에서 ‘부실한’ 리더십을 드러내 이 대통령의 라이벌로서는 맷집이 약하다는 평가가 많다. 오히려 이 대통령의 ‘거침없는 하이킥’을 막아낼 강력한 상대는 바로 박근혜 전 대표라는 말이 나온다. 실제로 이 대통령을 지지하는 친이(친 이명박 대통령) 그룹은 향후 정국 운영 과정에서 친박(친 박근혜 전 대표) 그룹이 ‘여당 내 야당’으로서 이 대통령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전망한다.
사실 여권에서는 촛불정국에서 보여준 친박 그룹의 ‘무책임한’ 행보에 이 대통령이 실망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통한다. 이에 이 대통령도 향후 정국에서 친박 그룹과의 ‘연대’보다는 ‘관리’를 통해 힘 빼기를 할 것이란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장기적으로 ‘친박 그룹 고사작전’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최근 ‘친이 성향’의 한나라당 A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을 독대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개국 공신들을 챙기지 않으면 이 정권은 성공할 수 없다. 지난 경선·대선 과정에서 중립을 지켰거나 친박 그룹에 속했던 인사들은 결국 이 대통령을 끝까지 지켜주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선거에서 고생한 사람들을 꼭 챙겨주는 선례를 남겨야 그들도 이 대통령을 배신하지 않고 충성을 할 것이다”라는 요지의 조언을 했다고 한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 대통령도 A 의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A 의원의 말은 일견 ‘자기 사람만 챙겨라’는 편협한 조언으로도 들린다. 하지만 이는 최근 친이 그룹이 안고 있는 위기의식의 발로라는 점에서 분석해볼 만한 대목이다. 정권이 출범하자마자 ‘촛불정국’으로 이 대통령의 권위와 파워는 ‘실신’ 직전까지 갔는데도 친이 그룹 인사들 가운데 단 한 명도 대통령의 방패막이를 자처한 사람이 없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 대통령이 정권 출범 뒤 자신의 최대 지지계파인 친이 그룹을 거의 관리하지 않은 데 따른 ‘자업자득’적인 요소가 컸다는 분석이 많다. 당의 골치 아픈 갈등 조정은 모두 형인 이상득 의원에게 맡기면서 이 의원에게 파워가 집중됐고 정두언 의원의 ‘항명 사태’와 같은 권력 투쟁이 이어졌던 것이다. 이상득 의원의 핵심 계보에 속하지 못한 대부분의 친이 그룹은 당연히 그 소외감에 상처를 받았고, 그 결과 이 대통령이 촛불정국의 벼랑 끝에 서 있음에도 수수방관하는 자세를 보였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당시 정치권에선 ‘촛불정국에서 매 맞는 사람은 이 대통령밖에 없다’라며 의아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 뒤 이 대통령은 ‘촛불정국’이라는 호된 매를 맞고 나서야 ‘개국공신’과 자신을 몸으로 지켜줄 ‘친위부대’에 대한 중요성을 깨달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앞서의 A 의원도 “어려울 때 지켜주는 사람은 옛 동지밖에 없다”라는 조언을 했던 것이다. 또한 이 대통령도 A 의원의 뜻에 동의를 표하고 대선 뒤 사실상 방치하고 있던 ‘계파관리’도 최근에는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실제로 이 대통령은 바쁜 국정 운영에도 여의도의 당 인사들을 많이 만나고 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의 이런 ‘당심 다지기’의 하이라이트는 지난 8월 20일 한나라당 당직자들을 청와대로 불러 만찬을 함께한 것이었다. 참석자들의 전언에 따르면 이 대통령은 이날 당직자들과 만찬을 하면서 매우 ‘흥분’돼 있었다고 한다. 한 당직자는 “촛불정국으로 난타를 당하다가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도약을 하려던 때 ‘아군’의 지원사격은 얼마나 달콤했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대통령은 을지훈련 때문에 술잔을 나눌 수 없었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며 아쉬워했다는 후문이다. 물론 참석자들의 덕담도 이 대통령의 기를 세워주었다. 하지만 이 날 자리는 이 대통령이 지금까지 ‘탈 여의도 정치’를 외치며 등한시했던 ‘여의도 사람’들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된 상징적인 만남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나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이 그동안 탈 여의도 정치와 우군의 잠재적 확보를 혼돈했던 것 같다. 결국 집토끼를 어떻게 확실하게 지키면서 외연을 확대하고 실용주의를 내세우느냐는 점이었는데 그동안 청와대와 정부의 리더로만 머물며 당 인사들의 소중함을 간과했던 것 같다. 하지만 최근 이 대통령이 당직자들을 자주 만나고 통화하면서 확실히 변화를 실감하고 있다. 물론 맹형규 정무수석이나 박형준 홍보기획관 등 여의도 출신 인사들이 청와대로 대거 들어가면서 ‘소통’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대통령 본인이 적당히 관리만 하면 자신의 우군이 될 수 있는 당내 인사들을 사실상 방치하다가 촛불정국을 겪으면서 그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는 게 긍정적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자기 식구 챙기기’를 발판으로 강력한 국정 드라이브를 거는 배경에는 친박 그룹과의 관계를 재설정해 ‘이명박 브랜드’의 개혁정책을 확실하게 추진하겠다는 의도도 깔려 있다는 게 정치권의 분석이다. 사실 이 대통령은 촛불정국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친박 그룹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여러 차례 토로한 것으로 알려진다. 촛불정국이 정점에 올랐을 때 민주당이야 야당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도 같은 여당이면서 친박 그룹 일각에서 “(정부가) 잘못할 줄 알았다”라는 반응을 보이며 은근히 이 대통령의 사면초가를 즐기고 있던 정황이 여기저기서 포착됐기 때문이다.
▲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런데 친이 그룹의 친박그룹에 대한 서운함은 감정 차원을 넘어 향후의 대권 구도에 근원적인 변화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이 대통령이 최근 자신의 지원군들을 ‘친위부대’로 이끌며 직접 개혁 드라이브를 걸겠다고 하는 것은 친박 그룹의 점진적 국정 운영 배제와 ‘동의어’로 볼 수 있다. 여권의 한 핵심 관계자는 이에 대해 “최근 이 대통령의 거침없는 행보 이면에는 ‘박근혜 전 대표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국가를 운영해 나가겠다’는 입장을 확실하게 표방하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대통령의 장기적인 전략은 박 전 대표 세력을 점진적으로 약화시켜 확실한 대권 주자로 올라서는 것을 끝까지 견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라고 말했다.
친이 그룹과 이 대통령의 장기적 친박 세력 배제 원칙은 친이 성향 의원들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정치학 교수이자 정치 컨설팅을 하는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너무 이른 얘기지만 이 대통령도 2010년 지방선거를 지나면서 권력 이양에 대한 검토를 시작해야 한다. 이 대통령은 그동안 귀에 못이 박히도록 ‘친박 세력을 포용해야 개혁을 성공할 수 있다’라는 조언을 들었다. 이 대통령을 만난 인사들은 대통령이 조언을 듣는 자리에서는 ‘알았다’라고 말하지만 귀찮은 듯 반응하기 때문에 계속 말을 이어나가기가 어렵다고 하더라. 그리고 나중에라도 그 말을 다시 하려고 하면 못 들은 척 슬그머니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친이 그룹 핵심 관계자들은 이 대통령이 개혁에 실패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미 불신의 늪에 깊이 빠져 있는 박 전 대표에게 절대 대권 후보의 자리를 주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게 권력의 속성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정치권에선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의 관계는 촛불정국을 지나면서 완전히 남남의 길로 들어선 것으로 본다. 친박 그룹이 여당 내 야당으로서 이 대통령의 독주에 대해 ‘견제자’ 역할을 할 것을 예상하긴 했지만 ‘같은 식구’가 난국에 처했는데도 그 상황을 즐기는 듯한 행보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박 전 대표는 쇠고기 정국 한 달여 만에 처음으로 “정부가 너무 급하게 일처리를 한 것 같다”라고 발언해 이 대통령의 아픈 곳을 찌른 바 있다.
그런데 친이 그룹은 앞으로 친박 그룹과의 관계 재설정에 대해 ‘투 트랙’으로 접근할 것으로 예상된다. 친이 그룹의 한 재선 의원은 이와 관련해 “일단 2010년 지방선거 전까지 양측의 갈등이 표면화되면 대통령의 개혁 드라이브에도 차질을 빚는다. 그래서 그때까지 ‘갈등을 적절한 수준에서 관리하는 게 더 현실적인 목표’라고 볼 수 있다. 어차피 양측이 당장 갈라설 일은 없기 때문에 ‘한 지붕 두 가족’으로 지내는 것이다. 저쪽도 당분간 세력화보다는 관망 상태로 있을 것이기 때문에 쓸데없는 충돌은 최대한 줄이는 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친박 그룹을 국정의 동반자로서 실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국외자로서만 머물게 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나라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장기적 관점에서 친박 그룹 배제 전략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관계자는 “2010년 지방선거를 지나면서 친이·친박이 계속 같은 배를 타고 가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어차피 정권 재창출의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분열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 이때 70여 명의 의원들로 똘똘 뭉친 친박 그룹을 배제시키는 전략 가운데 하나로 내각제 개헌을 통한 정계개편 시나리오를 예상해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미 친이 그룹 내부에서도 논의된 바가 있는 것으로 전해지는 이 시나리오의 핵심은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이 대통령 중심의 정계개편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는 이 대통령이 정권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개헌론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확보를 명분으로 여야를 아우르는 정계개편을 전격 추진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시나리오의 핵심은 박 전 대표가 주장하는 대통령 중임제가 아닌 내각제를 매개로 정계개편을 추진,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 세력과 민주당 내 호남의 보수성향 세력까지 아우르는 전국적인 거대 여당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박 전 대표는 영남권의 정통보수 세력으로 고립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내각제에 대한 국민의 선호도가 낮고, 친이 그룹이 자신들의 깃발 아래 모이라고 큰소리 칠 만한 든든한 차기 대권 주자를 내세우지 못할 경우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도 있다.
이 대통령은 주변의 조언에도 여전히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해 불신을 가지고 있는 만큼, 향후의 국정 운영에 있어서도 친박 그룹을 배제한 ‘이명박식 마이웨이’에 더욱 가속도를 낼 전망이다. 하지만 이 같은 이 대통령의 독단 행보는 박 전 대표와 친박 그룹의 생존본능을 자극해 또 다른 여권 분열의 불씨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