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추가경정예산안 처리 실패(12일)를 계기로 진퇴 논란에 휩싸였던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의 심경에 대한 한 중진의 촌평이다. 그를 둘러싼 진퇴론은 이제 수그러든 상황이지만 우여곡절 끝에 추경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18일까지 일주일여 동안 홍 원내대표는 자신의 12년 정치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의 거취를 둘러싸고 벌어진 여권 내부의 파워게임과 후유증을 짚어봤다.
4선 관록의 홍 원내대표는 지난 16일 의원총회장에서 초선 의원들로부터 ‘훈계’와 ‘훈수’를 들어야 했다. “손상된 리더십으론 당 안팎을 컨트롤할 수 없다”(김용태 의원), “국민신뢰를 얻기 위해 (홍 원내대표가) 책임지겠다고 했으니 그 말을 책임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김영우 의원)는 발언이 쏟아졌다. 원내 과반(150석)을 훨씬 넘는 172석의 ‘공룡 여당’의 원내사령탑이 집안 단속을 제대로 못해 의안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데 대한 혹독한 대가였다.
이날 발언 중엔 “당 대표와 청와대에 대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많이 넘었다”(안형환 의원)는 지적도 있었다.4개월이 채 되지 않은 재임기간 중 홍 원내대표의 각종 ‘돌출성’ 발언을 싸잡아 비판한 것이다. 자신에게 빗발치는 성토에 홍 원내대표는 “할 말은 있지만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억울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홍 원내대표의 거취 논란은 여야 합의로 추경안이 처리되면서 외형상으론 ‘종결’됐다. 한때 사퇴 의사를 밝혔던 홍 원내대표가 18일 기자들에게 “당내 분란의 중심에 내가 있었다. 앞으로 당내 분란이 없으면 좋겠다”며 사실상 유임 의사를 밝히고 그의 퇴진을 요구했던 MB계 소장파들도 잠잠해지면서다.
그러나 이번 사태로 불거진 당내 세력 간 ‘불협화음’은 적지 않은 후유증을 남길 것으로 보인다. 당내에선 홍 원내대표의 거취 논란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는 ‘휴화산’이라는 지적도 상당하다. 아울러 향후 당내 역학구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으리란 관측이 나온다.
‘추경 파동’의 최대 희생자가 홍 원내대표라는 점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애초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국회 예결특위를 통해 추경안을 표결 처리하려던 여권의 계획이 무산됐던 데엔 한나라당 의원들의 불출석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 안팎에선 홍 원내대표의 ‘시련’은 스스로 초래한 면이 크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5월 말 원내대표 임기를 시작하며 “정치권에 들어와서 12년 동안 ‘비정규직’으로만 있다가 처음 ‘정규직’이 됐다”며 의욕을 보였지만 연이은 자충수와 악재 속에 당내 위상이 급격히 저하됐다. 이번 사태를 겪으면서 본인 스스로 “12년 비주류 끝에 주류가 된 줄 알았는데 여전히 나는 비주류였다”고 토로할 만큼 상처가 컸다.
홍 원내대표를 더욱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퇴진 위기에 몰렸을 때 민주당이 벌인 ‘구명’ 운동 덕택에 기사회생했다는 ‘근거 있는’ 얘기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뜩이나 당내에서 “소수 야당에 질질 끌려 다닌다”는 비판을 받아 왔던 홍 원내대표. 그런 처지를 아는지 모르는지 민주당에선 “홍 원내대표가 추경안 문제에서 대립과 갈등을 봉합하는 수완을 발휘했다는 평가가 있다”(최인기 예결특위 간사), “추경안 수정안을 마련하는 데 홍 원내대표가 특별히 고생을 많이 했다”(우제창 의원)고 치켜세우니 당사자로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박근혜계 한 중진은 “홍 원내대표가 겨우겨우 연명엔 성공했지만 앞으로 발언권을 제대로 행사하기는 힘들 것”이라며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일주일 사이에 얼굴이 반쪽이 돼 측은하게 느껴질 정도였다”고 말했다. ‘홍준표 퇴진’을 주장했던 MB계 한 재선 의원은 “국민의 눈높이에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관점에서 (퇴진을 요구했던) 입장에 전혀 변함이 없다”고 말해 앞으로도 홍 원내대표의 ‘시련’이 계속될 것임을 예고했다.
당내 주류인 MB계도 일련의 사태 진행과정에서 ‘고질병’이라 할 수 있는 내부 분열상을 다시 드러내 데미지를 입었다는 평가다. 수도권을 기반으로 한 초·재선그룹들이 홍 원내대표의 퇴진을 적극 요구한 반면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을 축으로 한 영남권·중진그룹은 ‘대안부재론’을 내세워 유임을 주장해 결국 관철시켰다.
18대 총선을 전후해 이 전 부의장의 ‘용퇴론’과 ‘권력사유화’ 논란, 당 체제정비 등에서 충돌했던 양 그룹이 이번 사태로 다시 부딪힌 것. 덩달아 한동안 잠잠했던 이 전 부의장과 이재오 전 최고위원·정두언 의원 간의 ‘불화설’도 다시 불거졌다. 이 전 부의장과 가까운 한 중진은 “이 전 최고위원과 가깝다는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매사에 배타적·공세적으로 나오는지 모르겠다. 말로는 자신들이 없으면 MB정부의 성공이 요원한 것처럼 행세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이 당내 불화의 원천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반면 이재오계에선 이 전 부의장이 영남권에 기반을 둔 기득권 세력을 감싸느라 개혁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초선 K 의원은 “홍 원내대표의 진퇴 문제만 해도 사안의 중대성을 가려서 판단해야 하는데 이 전 부의장 측에선 무조건 ‘좋은 게 좋다’ ‘갈등을 빚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래서는 당이 MB정권의 성공을 이끄는 견인차가 되기는커녕 부담만 주는 결과만 빚을 것이다”고 비판했다.
박근혜계가 이번 사태의 와중에서 ‘홍준표 구하기’에 적극 나선 것도 주요 관전포인트 중 하나였다. 홍 원내대표의 진퇴 논란을 불러온 단초가 된 12일 국회 예결특위 추경안 표결에 유기준 유승민 이계진 이진복 조원진 의원 등이 대거 불참한 ‘원죄’도 여기에 작용했지만 그 이상의 ‘심모원려’(깊은 꾀와 먼 장래를 내다보는 생각)가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특히 홍 원내대표의 퇴진을 주장했던 MB계 소장파들이 후임을 박근혜계 중진이 맡는 ‘카드’를 제시했음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허태열 최고위원은 한 라디오에 나와 공개적으로 이른바 ‘친박(친 박근혜 전 대표) 원내대표론’에 대해 “현실이 그렇게 안 될 것이다. ‘대탕평’이라는 이름하에 친박 의원 쪽에서 원내대표를 맡았다고 치면, 그 사람이 그렇게 강력한 리더십을 가질 수 있겠느냐”며 일축했다.
박근혜계 한 핵심 중진은 “집단적으로 논의한 결과는 아니지만, 친박 의원들이 홍 원내대표의 손을 들어준 것은 자칫하다 MB계 내 강경파가 후임이 되면 상황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란 판단이 작용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면서 “특히 MB계가 홍 원내대표의 퇴진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상대적으로 우리와 말이 통하는 이 전 부의장 쪽이 유임으로 입장을 정리했는데 굳이 퇴진론에 동조할 필요가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이 중진은 또 ‘친박 원내대표론’에 대해 “한마디로 그쪽(MB계 지칭)의 저의가 의심스럽다. 한때 ‘박근혜 총리설’을 퍼뜨려 당을 뒤숭숭하게 만들더니 이번엔 원내대표 자리를 놓고 떠보기를 하느냐”고 꼬집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