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개설한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2.0’. | ||
민주주의2.0은 개통 직후부터 접속자수가 폭주하면서 오후 한때 서버가 다운되는가 하면 노 전 대통령이 올린 글은 반나절 만에 4만 6000여 명이 클릭할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정치권은 ‘친노세력 결집 신호탄’ ‘사이버 상왕 정치’ 등 저마다 아전인수식 해석을 내놓으면서 노 전 대통령의 향후 정치행보와 맞물린 민주주의2.0 사이트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가을 정국을 달구는 새로운 화약고로 부상한 민주주의2.0의 파괴력과 여의도 정가를 폭풍전야로 몰아넣고 있는 노 전 대통령의 ‘인터넷 정치’ 후폭풍을 진단해 봤다.
어있는 시민이 시민주권시대를 엽니다.”
민주주의2.0 사이트가 내건 슬로건이다. 노 전 대통령도 18일 사이트 오픈을 기념하는 인사말에서 ‘소통’을 키워드로 제시했다. 그는 ‘노공이산’(shangus)이란 아이디로 올린 ‘자유로운 대화, 깊이 있는 대화를 기대하며’란 제목의 글을 통해 “성숙한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는 대화와 타협이고 이를 위해 주권자인 시민 사이의 소통이 한 단계 발전해야 한다”며 “소통의 양도 많아져야 하고, 소통의 수준도 높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이 사이트 개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천명한 바 있는 ‘참여 민주주의 토론문화 정착’이라는 기획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민주주의2.0은 자유마당, 토론마당, 연구마당, 자료마당 등 크게 4개 메뉴로 구성돼 있다. 토론마당과 연구마당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제 외교 미디어 등 분야별로 세분화돼 있어 네티즌들이 주제에 맞는 토론장에 쉽게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의 토론게시판인 ‘아고라’와 비슷한 서비스 지원 및 사이트 구성도 눈에 띈다. ‘아고라’에서 가장 활성화된 자유토론방에 해당하는 ‘자유마당’을 전면에 배치했고 다른 사람이 게시물을 추천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다.
한나라당이 “봉하마을 표 ‘아고라’ 짝퉁이 되지 않도록 성숙한 국가원로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비꼬고 있는 것도 민주주의2.0과 ‘아고라’의 비슷한 서비스 기능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토론목록을 보여주는 방식은 최신순, 토론글순, 추천순, 조회순 등 네 가지로 구분돼 있어 기존 토론 사이트의 순기능을 그대로 접목시켰다. 사이트에 올라 온 글은 누구나 클릭만 하면 열람이 가능하지만 사이트에 글을 올리려면 회원가입을 해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은 향후 사이트 운영 계획과 관련해 “운영진은 토론을 주도하지는 않지만 시스템 관리 등 운영에 필요한 책임을 질 것”이라며 “앞으로 여건이 되면 공익적 성격의 재단을 구성해 그 공익재단이 운영 주체가 되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다. 노 전 대통령 측 김경수 비서관도 “시민민주주의 발전을 위한 문제 제기라는 순수한 뜻”이라며 “현실정치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노 전 대통령의 뜻은 언제나 확고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은 노 전 대통령이 인터넷 토론사이트를 주도적으로 개설한 것 자체를 사실상 정치 재개를 알리는 신호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다. 사이트 오픈 이후 노사모 등 열성 지지층뿐만 아니라 친노세력과 일반 시민들이 대거 참여해 토론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데다 노 전 대통령에게는 찬사를 보내는 반면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글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민주주의2.0 사이트에는 “왕의 귀환을 진심으로 환영한다”(노짱조아) “다음번에 출마 하시면 안 되나요”(호빵맨아빠) “내 인생 최고의 대통령”(조중동킬러) 등 ‘노무현 영웅 만들기’를 무색하게 할 정도의 찬양 일색의 글들이 대거 게재되고 있다. 반면 “이명박 정부를 밀어낼 수 있는가”(하늘아빠) “조중동 이대로 두고 볼 것인가”(앤카로스) “아고라 만큼은 사수해야 한다”(짐산) 등 이 대통령과 현 정부 정책과 관련해서는 노골적인 비난의 장으로 변질되고 있는 양상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벌써부터 민주주의2.0이 ‘친노세력 재결집의 장’을 넘어 친노그룹이 정치세력화를 꾀하는 디딤돌 역할을 할 것이란 관측이 나돌고 있을 정도다. 내년 4월로 예정된 재·보궐 선거와 2010년 지방선거 등을 겨냥해 ‘반 이명박’ 세력을 결집하는 전초기지 역할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이 바짝 긴장하며 경계수위를 높이고 있는 것도 이러한 가능성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이 인터넷 토론 사이트 개설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왔던 한나라당은 사이트 오픈이 현실화되자 여론 추이를 예의주시하면서 집중포화를 날리고 있다.
한나라당 전략기획본부장을 맡고 있는 이명규 의원은 9월 19일 주요당직자 회의에서 “노 전 대통령의 민주주의2.0 개설은 사실상 정치 복귀 선언이고, 사이버 대통령으로 군림하려는 의도라는 의혹을 갖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이 의원은 이어 “이 사이트로 지난 참여정부 당시 노무현 정부의 실정을 미화시키고 이명박 정부의 국책에 대해 사사건건 발목잡기에 나설 우려가 많다”며 “11만의 노사모 회원이 촛불 정국에서 이용했던 포털사이트 ‘다음’의 ‘아고라’처럼 이 사이트를 이용해 인터넷을 장악하고 국민 여론을 왜곡하려는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윤상현 대변인도 18일 논평을 통해 “대통령 재임시절의 노 전 대통령은 대화와 타협을 모르는 분열, 편 가르기, 코드, 끼리만의 소통의 대명사로 국민의 기억에 남아 있다”며 “노 전 대통령은 정치세력화나 현실정치 개입에 대한 지적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일침을 놓기도 했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노 전 대통령과 친노그룹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향후 전·현 권력 간의 자존심을 건 서바이벌 사이버 대전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이명박 정부를 상대로 ‘여론전쟁’ 선전포고를 한 만큼 양측의 피 말리는 혈투가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쇠고기 파동과 국가기록물 유출 파문 등으로 ‘오프라인’에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자존심 대결을 펼쳤던 전·현 권력이 이제는 ‘온라인’에서 여론 전쟁을 전개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형국이다.
여론기관 전문가들은 신구 권력이 사이버상에서 충돌할 경우 노 전 대통령이 보다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것으로 진단하고 있다. 참여정부가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 인터넷과 네티즌의 보이지 않은 힘이 작용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고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은 물론 퇴임 후에도 인터넷 정치를 통해 사이버상에서 상당한 세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절대 권력을 쥔 이 대통령이더라도 온라인에서 탄탄한 기반을 확보하고 있는 노 전 대통령을 사이버상에서 상대하기에는 버거울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여기에 쇠고기 정국 당시 촛불집회를 주도했던 네티즌들과 ‘아고라’의 누리꾼들이 대거 가세할 경우 민주주의2.0은 엄청난 파급력을 지닌 슈퍼사이트로 거듭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특히 사이트 개설 이전부터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현 정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우회적으로 표명한 바 있는 노 전 대통령이 현 정부 정책이나 민감한 정치 현안에 대한 의견을 사이트에 게재할 경우 ‘반 이명박’ 내지는 ‘반 정부’ 기류가 민주주의2.0을 통해 급속히 확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나라당이 ‘사이버 상왕 정치’ 운운하며 극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과연 오프라인 강자인 이 대통령과 온라인 주도권을 쥔 노 전 대통령의 사이버 대전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여의도 정가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