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청관계가 청와대의 일방통행으로 기울자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왼쪽부터 홍준표 원내대표, 이명박 대통령, 박희태 대표. | ||
원내 172석의 ‘거대 여당’ 한나라당이 깊은 무기력증에 빠져들고 있다. 이명박(MB) 정부 출범 초반 ‘당 우위’를 내걸며 의욕을 보이던 것도 잠시, 주요 정책 현안을 놓고 청와대의 ‘일방통행’에 맥없이 무너지는 경우가 빈발하면서다.
지난 주 당 안팎을 뜨겁게 달구었던 종합부동산세 개편 논란이 대표적인 예다. 과세기준을 현행 6억 원에서 9억 원으로 상향조정하는 것을 뼈대로 한 정부의 종부세 개편안에 대해 여당 인사들이 “‘한나라당=부자정당’이란 이미지를 굳힐 우려가 있다”며 한껏 제 목소리를 쏟아내다가 MB의 ‘원안 통과’ 지침이 내려지자 결국 ‘없던 일’이 된 것을 두고 하는 얘기다.
당초 지도부 내에선 박희태 대표, 임태희 정책위 의장 등의 ‘정부안대로 처리’ 주장에 홍준표 원내대표, 정몽준 최고위원 등이 ‘수정 불가피론’으로 맞서는 등 이견이 심각했다. 양측은 “종부세 완화는 17대 대선, 18대 총선에서 공약한 것이다. 만일 좌절된다면 신뢰를 잃게 된다”(박 대표), “종부세 세제 자체는 잘못됐지만 서민의 상대적 박탈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홍 원내대표)며 팽팽히 맞섰다.
그러나 ‘수정론’은 이 대통령이 이틀 뒤 “종부세 개편 방안은 잘못된 세금 체계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원안대로 추진한다는 데 변함이 없다”(9월 24일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고 못 박자 일거에 힘을 잃었다. 그동안 “국민들의 감정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다. 과세기준을 6억 원으로 유지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며 정부안 수정에 의욕을 보였던 홍 원내대표도 청와대의 압박에 속수무책으로 꼬리를 내렸다.
당내에선 정부의 개편안 발표(9월 22일) 이후 나흘간 벌어진 ‘종부세 파동’이 청와대의 ‘완승’으로 끝나면서 당·청 관계가 더욱 왜곡될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당을 이끄는 ‘삼두마차’라 할 수 있는 당 대표와 원내대표, 정책위 의장이 ‘딴 소리’를 하는 것도 볼썽사나운 일이지만 MB의 한마디에 당론이 정리되는 상황은 더 더욱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은 “청와대와의 관계에서 당이 우위에 서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대등한 관계는 돼야 하는데 지금은 ‘예속’이라 표현해도 반론을 펴기 어려운 형편”이라며 “종부세 개편 문제만 해도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입법에 관한 사안인 만큼 당에서 책임을 져야 하는데 지도부가 청와대 눈치를 보느라 질질 끌려가다가 망신만 당한 꼴”이라고 비판했다.
당 분위기가 이런 만큼 지도부의 ‘청와대 추종’ 행태에 반발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김선동 김성식 김성태 정태근 의원 등 초선 12명이 소속된 ‘민본21’은 공개성명을 통해 “당 지도부는 국민의 중대한 정책현안에 관한 한 적절한 의견수렴을 통해 당정협의에 임하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민본21에 참여하는 한 의원은 “만약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의 원안을 그대로 받겠다고 당론을 결정한다면 후폭풍이 만만찮을 것이다. 당이 또 다른 혼란으로 빠져들 것이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당·청 관계가 이처럼 ‘왜곡’되고 있는 것에 대해 지도부의 한계와 MB의 ‘당 무시’ 행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탓이라는 분석이 적지 않다. ‘원외의 관리형 리더’면서 ‘당·정·청 일체론자’인 박 대표와 독선적 원내 운영에 스스로 “여전히 나는 비주류”라고 할 만큼 기반이 약한 홍 원내대표, 관료 출신답게 웬만해선 청와대와 정부의 방침에 ‘노’라고 하지 않는 임 정책위의장 등의 컬러를 볼 때 청와대에 맞서 소신행보를 하리라 기대하기는 구조적으로 어려운 것 아니냐는 분석이다.
당·청 간 ‘코드(Code) 불일치’ 현상이 여전한 것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박 대표가 대북 특사 파견 필요성을 제기했다가 MB가 직접 나서 깔아뭉개고, 홍 원내대표가 합의해 온 국회 원구성안을 청와대가 “원칙에 맞지 않는다”며 백지화시킨 것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종부세 완화를 둘러싼 갈등도 따지고 보면 홍 원내대표 등 수정론자들이 MB의 의지를 제대로 못 읽은 채 섣부르게 ‘항명’하고 나섰다가 모양새만 우습게 된 것이란 평가다.
당 일각에선 여당을 대하는 MB의 권위주의적 태도도 당·청 관계를 틀어지게 만드는 핵심요인이란 지적이 나오고 있다. 말로는 ‘당 중심’을 말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 자신의 뜻과 맞지 않을 경우엔 ‘마이 웨이’를 고집하는 이중적 행태를 두고 하는 얘기다.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당에서 대북 특사 파견이나 어청수 경찰청장 경질, 종부세 과세기준 현행 유지 등을 건의했으나 MB가 건건이 정면으로 묵살했던 것을 두고 하는 얘기다.
한 중진은 “기본적으로 대통령이 챙기는 분야가 너무 넓고 구체적인 데다 한 번 결정하면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으니 정부와 여당이 제대로 운신을 할 수 있겠느냐. 당은 MB의 코드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정부는 청와대의 눈치만 지나치게 보다 보니 구조적으로 혼선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고 말했다.
당내 일각에선 MB가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의 영수회담(9월 25일)을 계기로 야당과의 직접대화를 통해 정국을 풀어나가려 할 경우 한나라당의 ‘소외감’이 더욱 짙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홍 원내대표의 대야 협상력이 자주 도마에 오르고 있는 만큼 MB가 야당과의 관계도 직접 챙기려 한다면 그만큼 당의 입지가 좁아질 것이란 우울한 전망이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실제 MB는 정 대표와의 회담에서 ‘국정 동반자 관계 구축’ 등 7개 항의 합의를 이루는 등 예상 밖의 성과를 거두자 야당과의 직접 대화에 상당한 자신감을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측이 “글자 그대로 ‘투 굿 투 비 트루’(too good to be true)다. 참으로 더 이상 좋을 수 없다. 두 분이 모든 국정 현안에 대해 대화를 한 생산적 회담이었다”(이동관 대변인)고 공개적으로 밝힐 정도였다.
한나라당 원내대표단의 한 의원은 “영수회담이 성과적으로 마무리됐으니 좋은 일 아니냐”면서도 “청와대가 야당과 직접 상대하는 데 재미를 붙이면 통상 대화창구인 원내대표단은 힘이 빠질 텐데 걱정이다. 평소 같으면 (영수회담 성공에) 진심으로 환영하겠지만 추경예산안 파동과 종부세 논란 등으로 원내대표단이 의기소침해 있던 터라 사정이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복잡한 심경을 피력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