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난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이명박 대통령의 위기관리 능력이 의심받고 있다. 사진은 부산 신항에 들러 근로자들을 격려하는 모습. 청와대사진기자단 |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의 위기관리 능력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다. 민주당의 비판은 그나마 정치적 공세의 측면이 있기 때문에 객관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연일 ‘처방전’을 쏟아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병을 앓는 시장은 전혀 회복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국민들도 ‘경제=이명박’의 환상에서 깨어나면서 이 대통령의 지지율도 다시 곤두박질치고 있다. ‘위기의 남자’ 이명박 대통령은 과연 탈출로가 있는 것일까.
‘이명박 대통령’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위기’다. 그는 자신의 리더십 요체를 ‘위기에 강하다’로 정의한다. 이 대통령 스스로 리더로서 가장 경쟁력 있게 내세우는 요소가 바로 위기에 강한 해결사적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대통령에게 ‘위기’라는 단어는 어떻게 다가올까. 작은 에피소드 하나가 그 단서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2006년 10월 이명박 대통령은 한반도 대운하의 성공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독일을 포함한 유럽 각국을 방문한 바 있다. 그 즈음 대선 후보 지지율 조사에서 처음으로 1위로 올라섰기 때문인지 그의 유럽 행보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스위스 제네바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과정에서 일이 터졌다. 수행원들이 비행기 좌석을 잘못 예약하는 실수를 저질러 예정된 스케줄이 펑크 나는 사고가 발생한 것. 더구나 당시 수행원들이 다음 방문 예정지의 연락처도 확보하지 못해 지연 도착을 알리지도 못하는 실수를 연발했다고 한다.
오랫동안 ‘사장’ 체질에 익숙한 이 대통령에게 그런 실수는 용납할 수 없는 중대한 사고였다. 특히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 재직 때 기자들과의 사소한 사적 모임도 수행원들을 동행시키고 사전에 모임의 성격 등을 꼼꼼히 챙기기 때문에 보좌진이 항상 긴장했다고 한다. 그런 이 대통령의 ‘불같은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수행원들과 기자들. 이 대통령이 화가 단단히 났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대통령의 얼굴은 그리 기분 나쁜 표정이 묻어나지 않아 주변에 있던 기자 한 사람이 “화가 나지 않느냐”라고 나직이 물어봤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오히려 그럴 때는 화를 내지 않는다. 화를 내면 더 상황이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다. 일을 처리하고 나중에 원인 분석을 한다. 위기 때는 오히려 매우 침착해진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이 대통령 자신도 그런 ‘사고’를 처음 경험했기 때문에 당황스러웠지만 수행원들의 ‘작은 실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요즘 이 대통령이 느끼는 위기감은 지난 유럽 방문 ‘사고’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면 일단 침착해지면서 상황 판단을 면밀히 한 다음 그 탈출구를 조용히 찾아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 대통령의 그때 그 ‘위기관리론’은 최근의 경제 국난에 대한 ‘이명박식 해법’을 유추해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 이명박 대통령과 최근 경질 압박을 받는 강만수 장관. 청와대사진기자단 | ||
이런 점으로 미루어 정·재계에서 강만수 장관 교체를 주장하면 할수록 이 대통령은 그의 유임을 더욱 고집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실제로 이 대통령은 최근 참모들에게 “강 장관이 국감에서 소신 있게 잘하고 있다”는 취지의 말을 하며 ‘무한 신뢰’를 보내고 있다. 이 대통령은 또한 강 장관과 수시로 통화하면서 경제 상황을 직접 점검하고 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은 최근의 강 장관 교체 주장과 외환위기 해법에 대한 각계의 비판에 대해 “상황이 어렵지만 이것저것 눈치 보지 않고 해야 할 일을 일관되게 해나가겠다”라는 각오를 여러 차례 밝힌 것으로 알려진다. 현재 터져 나오는 백가쟁명식 해법에도 일리가 있지만 일단 정부는 소신을 가지고 ‘마이 웨이’를 가겠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이 대통령이 야권의 끈질긴 강 장관 교체 요구가 자신에 대한 정치적 공세의 측면이 강하다는 점을 고려한 측면도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러한 이 대통령의 ‘소신’ 뒤에는 나름대로의 현실적 이유가 있긴 하다. 이 대통령은 자신의 말처럼 위기가 닥칠 때마다 오히려 냉정해지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최근 여야를 막론하고 터져 나오는 ‘강만수 장관 교체 요구’에 대해 오히려 더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지도 모른다. 최근의 경제 국난에 자신마저 들떠 장관을 교체하는 등의 모험수를 두다가 오히려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계산도 작용했을 것이다.
최근 이 대통령은 주변 상황이 악화되고 있지만 오히려 얼굴에는 강한 자신감이 묻어난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이번 경제 위기도 자신의 실물 경제 경험과 이론을 토대로 충분히 극복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실물 경제가 다른 나라에 비해 튼튼하고, 외환 여유도 충분하다는 현실적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이 대통령은 현재 우리나라 외환시장을 ‘과민 반응’ 상태로 보고 있다. 필요 이상으로 시장을 교란시키는 요인을 찾아 정부가 대응하면 충분히 진정시킬 수 있다는 게 이 대통령의 판단”이라고 말한다.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은 내심 지난 촛불정국에서 까먹은 점수를 이번 ‘위기’를 통해 만회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겠다는 생각을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대통령 위기관리론의 핵심인 ‘소신’은 때때로 상황 판단 미스에서 나오는 ‘고집불통 리더십’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의 현 위기에 대한 인식은 근거 없는 낙관론에 치우치고 있고, 그 대처법도 대증요법적인 측면이 강하다”라고 지적한다. 이는 이 대통령의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마저 “이번에도 지난 촛불정국 때처럼 실기(失機)해 더 큰 재앙을 부를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현재 정치권에서 터져 나오는 이 대통령의 위기관리에 대한 허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이 대통령의 위기에 대한 인식이 너무 느슨하다는 지적이 많다. 그는 지난 9월 30일 금융위기에 대한 ‘낙관론’을 피력하면서 “우리 정부가 긴급한 상황에 대해 선제 대응해 나간 것은 아주 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자찬’까지 곁들였다. 정작 이날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은 전날보다 달러당 18.20원 상승한 1207.00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외환시장이 이 대통령의 발언을 ‘무시’한 셈이다.
이 대통령의 ‘낙관적 대응’은 이미 여론조사를 통해 그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지난 10월 초 <내일신문>이 조사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를 살릴 능력과 리더십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대답한 응답자가 45.5%나 된다(‘있다’는 응답은 40.5%). 다른 조사에서는 ‘이 대통령이 국정 운영을 잘 못하고 있다’고 응답한 경우가 66%에 이르고 있다. 지지율은 다시 20%대 초반으로 내려앉았다. 여기에 경제 시장도 이 대통령의 ‘안정’ 발언을 무색케 하고 있다. 코스피 지수는 하루에도 50p 이상씩 빠지며 패닉상태로 접어들고 있고, 환율 시장도 정부와 기업의 개입으로 하루에 235원이나 널뛰기하는 등 불안정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재계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안심하라고 할 때마다 오히려 시장은 더욱 불안해지고 있다”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민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이에 대해 “결국 이 대통령의 위기 관리 능력이 의심을 받는 것은 촛불 정국 뒤 좌우 이념 대결 성격이 짙은 편 가르기를 하고, 국민 소통과 통합을 거스르는 독단적인 국정운영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위기국면이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라는 외부의 객관적 조건에 기인한 측면도 있지만, 우리 사회가 이에 대처할 ‘통합 대응력’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 주체가 되어야 할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적 신뢰를 이미 상실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이번 경제 위기는 우리 스스로의 내부적 상황에 의해 더욱 악화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가 일각에선 경제난이 심화되는 이유 중 하나로 이 대통령의 안일하고 왜곡된 상황인식과 함께 현 정권의 위기 탈출 전략이 근본적이지 못하고 대증적인 요법에 그치고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외화 모으기 해프닝’과 ‘은행 팔 비틀기’를 들 수 있다. 이 대통령이 직접 언급한 적은 없지만 지난 10월 초부터 정부의 고위 관계자와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 등은 “외환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집집마다 100달러라도 내다 팔자”라는 주장을 했다가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자율적 운동에 맡기자’는 선으로 후퇴했다. 또한 강만수 장관은 최근 은행장들을 모아 놓고 “은행들이 해외재산을 팔아 스스로 부채를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발언했다가 곤욕을 치른 바 있다. 결국 ‘외화 모으기 운동 제안’이나 ‘은행의 책임론’ 등은 모두 “한국의 달러 유동성에 문제가 있다는 점을 외국에 대고 자복하는 꼴”이라는 비판만 불러왔다. 이런 정제되지 않은 ‘묻지마식’ 해결책 남발은 이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현 여권에 위기에 대한 총괄 컨트롤 타워가 부재하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현대그룹에서 오랫동안 기업가 생활을 했던 한 관계자는 이명박 대통령의 위기관리론에 대해 우려 섞인 반응을 보인다. 그는 “이 대통령은 고 정주영 회장이 가졌던 몇 안 되는 장점 중의 하나인 ‘상대적인 유연성과 탄력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 더 걱정이다. 현재의 금융위기가 당분간 브레이크 없이 지속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정말 답답하다”라고 말했다. 정작 국민들과 시장이 우려하는 최악의 위기 상황은 작금의 경제 국난이 아니라, 이 대통령이 자신의 나침반만 믿고 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망망대해에서 헤매고 있는 ‘경제 10단’을 발견할 때가 아닐까.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