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폐쇄된 폴란드 스지마니 공항 입구. CIA 비행기가 일년에 두어 차례 공항을 이용한 것으로 드러나 ‘특수수송’ 의혹이 일고 있다. | ||
폴란드 바르샤바 북쪽에 위치한 스지마니 공항. 숲 속 깊숙한 곳에 위치한 이 국제공항은 4년 전부터 운영이 중단된 상태다. 진입로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으며, 철조망 너머로는 공항을 지키고 있는 듯 보이는 안전요원만이 보초를 서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스지마니 시민들 사이에서는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는 수군거림이 시작됐다. 이상하리만치 민간인의 접근을 막는 보초병들의 경계심이나 1년에 두어 번은 꼭 들리는 비행기가 이착륙 소리 등을 감안하면 말이다.
이상한 것은 공항뿐만이 아니었다. 스지마니 공항에서 약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폴란드 비밀정보기관의 훈련소 주변도 언제부턴가 경계가 더욱 삼엄해지기 시작했다. 철조망 울타리가 이중으로 설치된 입구에는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주민들이 훈련소 울타리를 따라 산책이라도 할라치면 어느새 군인들이 승용차를 타고 천천히 뒤를 쫓아온다. 이에 불쾌감을 감출 수 없었다고 말하는 한 주민은 “마치 뭔가를 들킬까 염려하는 눈치였다”고 말한다.
이곳이 마지막으로 언론에 공개된 것은 지난 1993년이었으며 그 후 이 안에 들어간 민간인은 아무도 없었다.
최근 불거진 파문에 의하면 바로 이 스지마니 공항과 폴란드 비밀정보기관의 훈련소가 각각 CIA 비밀 수송기 기착지 및 불법 수용소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폴란드 정부는 펄쩍 뛰면서 이런 주장을 부인하고 있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을 듯싶다. 최근 스지마니 공항의 한 직원이 <슈테른>과 인터뷰한 내용에 따르면 폴란드 군부대가 CIA의 불법 수송에 깊숙이 관련돼 있음이 명백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이 소식통에 의하면 유럽 한복판에서 은밀히 진행되는 CIA의 포로 수송, 다시 말해서 ‘특수 수송’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
CIA 비행기가 스지마니 공항에 처음 착륙한 것은 지난 2002년 1월. 그 후 CIA는 보통 1년에 두어 차례 공항을 이용했다. 공항에 내린 비행기는 이상하게도 관제탑에서 멀리 떨어진 활주로의 가장 끝부분에만 주차했으며, 그 누구도 비행기 근처에 2백m 이상 접근하는 것은 금지됐다.
비행기가 도착하면 유리창을 까맣게 선팅한 폴란드 군부대의 소형 버스 한 대가 비행기 옆으로 접근했으며, 한 번은 응급차 한 대가 함께 도착한 적도 있었다. 더욱 이상한 것은 그 다음부터다. 보통 세관원이 검문을 하는 것과 달리 CIA 비행기가 착륙할 때면 꼭 고위직의 국경수비대원이 나서서 비행기를 검문한 후 이착륙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버스가 비행기에서 내린 몇몇의 승객(?)을 태우고 활주로를 떠나면 비행기도 다시 이륙한 후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이처럼 ‘이상한 수송’이 이루어진 다음 날이면 어김 없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폴란드인이 공항 관계자에게 3천~4천유로(약 3백70만~4백90만원)를 현금으로 지불하곤 했다. 이는 보통 비행기 한 대가 공항을 사용하는 데 지불하는 액수보다 무려 10배 가까이 많은 것이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닌 이런 수송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게다가 아프가니스탄 이집트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왜 하필이면 아무도 찾지 않는 이런 외진 곳에 착륙한단 말인가.
사실 테러 용의자들을 제3국으로 수송하는 CIA의 ‘특수 수송’은 이미 클린턴 정부 때부터 시작됐다. 당시에는 주로 이집트 수용소가 사용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부시 정부가 수용소를 운영하는 목적은 단 하나, “가능한 빠른 시간 안에 용의자들로부터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인권단체들은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 즉 고문이 자행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법적으로 고문이 금지돼 있는 미국에서는 불가능한 일. 때문에 미국이 택한 것은 폴란드나 루마니아처럼 고문이 합법화돼 있는 일부 동유럽 국가였다.
지난 5월 ‘국제사면위원회(AI)’가 조사 발표한 바에 따르면 미국이 사용하고 있는 심문 및 고문 기술은 무려 60가지나 된다. 여기에는 ‘맨발로 철조망 위 걷기’ ‘전기로 고문하기’ ‘개나 뱀으로 위협하기’ ‘항문에 빗자루, 곤봉, 형광등, 바나나 쑤셔 넣기’ ‘잠 안 재우기’ ‘독방에 감금하기’ ‘성적으로 굴욕감 주기’ ‘랩 음악으로 고문하기’ ‘침낭 속에 넣고 질식시키기’ 등 온갖 가혹한 방법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때리거나 짓밟는 것은 물론, 물고문으로 익사시키거나 쇠사슬에 장시간 묶어 놓은 채 세워 놓는 방법 등도 있다.
언제 어디서 붙잡혔는지, 또 어디에 수감되어 있는지 그리고 도대체 살아 있는지 행방이 묘연한 이런 포로들을 가리켜 ‘유령 죄수’라고 한다. 이들 중에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채 석방된 사례도 있다.
최근 미국을 대상으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캐나다 국적의 아랍인 마헤르 아라르(34)가 대표적인 경우다. 지난 2002년 뉴욕 JFK 공항에서 불시에 검문을 당한 그는 뚜렷한 이유 없이 감금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그 후 시리아로 수송되어 고문을 당했다. 10개월 간 형무소에서 보냈던 그는 일주일 내내 심문을 당하는가 하면 손가락 굵기만한 전선으로 맞는 등 온갖 폭력을 견뎌야 했다. 결국 그는 알 카에다 조직원과 단순히 이름만 같을 뿐 아무런 혐의가 없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처럼 목숨을 건지는 경우는 드물다. 지난 2003년 이탈리아에서 체포된 아부 오마르는 이슬람 사원을 운영하면서 알 카에다 조직원을 양성했다는 혐의로 체포된 후 이집트로 수송되었으며, 아직까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행방이 묘연하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에서 택시 운전사로 일하던 딜라바는 고문 끝에 급기야 목숨을 잃고 만 경우.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에 의해 테러 용의자로 지목되어 체포된 그는 수백 차례 무릎 위를 밟히는 고문을 당한 끝에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아직까지 부시 정부는 비밀 수용소의 존재 여부에 대해 시인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다. 단지 부시 대통령이 나서서 “절대로 고문을 하지 않는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명확한 답변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불법 수송에 협조한 혐의를 받고 있는 폴란드 루마니아 스페인 독일 스웨덴 덴마크 등은 자체 조사에 착수한 상태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