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 20일 오전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진행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 국감에서 한나라당 주성영 의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추정되는 100억짜리 양도성 예금증서(CD) 사본을 들어보이며 질의하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
DJ는 고소장에서 “주 의원이 허위의 사실을 적시했고 신중한 검토와 구체적인 증거 수집도 없이 ‘아니면 말고’ 식의 무책임한 폭로행위를 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주 의원 측은 DJ 측이 법적 대응을 한 만큼 검찰 수사 추이를 지켜보면서 ‘DJ 비자금’ 실체를 철저히 파헤치겠다는 입장이어서 파문을 예고하고 있다. 검찰은 DJ의 고소 사건은 서울중앙지검에서 수사하고 주 의원이 공개한 100억 원짜리 CD(양도성 예금증서)의 진위 여부는 대검 중앙수사부가 직접 확인한다는 방침이다. 대검 중수부는 조만간 주 의원에게 CD 사본을 건넸다는 전직 검찰 관계자를 소환하는 등 CD 발행처에 대한 추적을 본격화할 계획이어서 ‘DJ 비자금’ 의혹 사건은 검찰 수사로 그 실체적 진실이 가려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97년 대선정국에서 처음 불거진 이후 10여 년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숱한 소문과 의혹을 증폭시켜온 ‘DJ 비자금’ 논란 속으로 들어가봤다.
만복 전 국정원장이 (비자금 조성에) 개입하고, 이희호 여사 쪽으로 자금이 흘러나간 정황이 있다.”
국회 법사위 소속인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이 지난 20일 대검 국감장에서 꺼낸 주장이다. 한동안 잠잠했던 ‘DJ 비자금’ 의혹 논란에 다시 불을 지핀 것이다.
주 의원은 이날 “전직 검찰 관계자가 나에게 건네준 것”이라며 2006년 2월 중소기업은행이 발행한 100억 원 CD 사본과 은행의 ‘발행사실 확인서’를 제시하면서 DJ 비자금 의혹에 대한 포문을 열었다. 비자금 규모는 모두 6조 원이고, DJ 비자금 문제는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과 달리 전부 해외 계좌와 연결돼 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그는 또 이 문제에 대해 검찰에서 내사를 진행하고 있고 검찰이 의지를 가지고 특별 전담팀을 꾸려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다.
주 의원의 주장에 DJ 측은 즉각 반발했다. DJ의 핵심 측근인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이날 국감장에서 “검찰이 CD를 갖고 있었다면 조사를 했어야지 왜 사본을 만들어 주느냐”며 “수사는 하지 않고 자료를 의원에게 전달했다면 피의사실 공표이자 직무유기”라고 반격했다. 그는 또 “<월간조선>은 지난해 DJ 3000억 원 비자금 조성과 외화 도피 의혹을 보도했다가 사과 보도를 한 사실이 있다”며 “검찰은 문제의 CD가 있는지 수사해 달라”고 역공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특히 “기사를 썼던 기자들 중 한 명은 청와대 행정관으로 재직 중이고 다른 한 명은 공기업 감사로 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DJ를 비방한 사람들이 어떻게 청와대와 공기업에 들어갔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며 정치적 음모 가능성을 시사하기도 했다.
DJ 측 최경환 공보비서관도 성명서를 통해 “주 의원이 20일과 21일에 한 발언 내용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일축하면서 “주 의원의 주장 대부분이 미국에 있는 일부 무책임한 교포신문들이 수년 동안 거듭 주장해온 허무맹랑한 내용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주 의원이 DJ 내외에 대해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명예를 훼손한 것은 매우 개탄스러운 일”이라며 “주 의원이 원외에서 발언(라디오 프로)을 했기 때문에 법적으로 고발할 수 있게 됐다”며 법적 대응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이번 기회에 국내는 물론 미국 일부 교포사회에서 끊임없이 불거졌던 ‘DJ 비자금’ 의혹 논란을 불식시키는 동시에 DJ 내외의 명예를 회복시키겠다는 ‘동교동’의 결의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실제로 ‘DJ 비자금’ 의혹은 97년 대선정국 이후 지금까지 10여 년간 여의도 정치권과 미국 교포사회 주변에서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대표적인 ‘정치 비자금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 있다.
97년 대선정국에서 불거진 ‘DJ 비자금’ 의혹 사건은 당시 대선 판세를 좌우할 수 있는 그야말로 핵뇌관이었다. 대선을 2개월여 앞둔 97년 10월 집권당이었던 신한국당은 새정치국민회의 대선후보였던 DJ의 670억 원 비자금 조성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은 ‘수사 유보’ 결정을 내렸고, DJ는 12월 대선에서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를 39만 표 차이로 누르고 대권을 거머쥐었다.
이에 대해 DJ 측은 “당시 김대중 후보의 비자금 문제는 신한국당이 선거에 이용하기 위해 조작해 낸 것”이라며 “검찰은 근거가 없어 수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반박했다.
2007년 1월에는 <월간조선>이 ‘DJ 정권 비자금 3000억 원 조성’이란 제목으로 ‘DJ 비자금’ 의혹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2001년 국내 금융기관을 통해 비자금 3000억 원을 조성했다”는 DJ 정권 당시 정부기관 고위관계자의 증언을 토대로 비자금 조성 방법을 추적한 것이다.
DJ 측은 <월간조선> 기사에 대해 즉각적인 대응을 자제하다가 8개월이 지난 후에 반박문을 게재하는 동시에 민·형사상의 법적 조치 입장을 밝혔지만 법정으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대우그룹 구명 로비 의혹’ 사건과 관련해서도 ‘DJ 비자금’ 의혹이 끊이질 않았다. 이른바 ‘DJ-김우중-조풍언 삼각 커넥션’ 의혹이 그것이다.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경기고 2년 후배이자 DJ의 측근인 조풍언 씨를 재산 관리인으로 이용했고 △조 씨는 김 전 회장의 지시로 DJ 측근에게 접근해 구명로비를 벌이고 그 대가로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제공했을 것이고 △99년 조 씨가 DJ 일산 자택을 매입한 배경에도 이러한 커넥션이 투영돼 있을 것이란 게 의혹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김 전 회장과 조 씨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 두 사람이 재산을 은닉한 사실은 드러났지만 DJ의 비자금 조성 및 로비 의혹은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
그간 국내 정치권 호사가들과 일부 보수단체, 미국 교포사회 주변에서는 ‘DJ 비자금’ 논란이 확대·재생산돼 각종 루머와 소문을 증폭시켰다. △DJ 비자금 13조 원설 △대북송금 리베이트설 △DJ 비자금 미국 내 친북단체 유입설 △3000만 달러 스위스 계좌설 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DJ 비자금’ 의혹을 둘러싼 무성한 소문은 10여 년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왔고 국내외에서 숱한 폭로와 증언들이 쏟아졌지만 아직까지 그 실체가 드러나진 않았다. 검찰도 97년 ‘DJ 비자금’ 사건 이후 대우그룹 구명 로비 사건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DJ 비자금’ 사건에 손을 댔을 뿐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한 적은 없다.
이와 관련해 10월 22일 기자와 만난 대검의 한 고위관계자는 “‘DJ 비자금’ 의혹이 10여 년간 지속돼 왔지만 대부분 구체적인 증거나 물증이 없는 일방적인 폭로가 대부분이었고 검찰에 직접 고발한 사례도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검찰 수사가 진행되지 못한 배경을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이번에 불거진 ‘DJ 비자금’ 의혹은 현역 의원이 국감장에서 공식적으로 제기했고 관련 증거물도 검찰에 제공한 상태라 검찰 수사가 불가피할 것”이라며 “DJ 측도 검찰 고발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진 만큼 검찰이 ‘DJ 비자금’ 의혹에 대해 전면적인 수사에 착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전했다.
DJ 측과 주 의원 측도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어 ‘DJ 비자금’ 의혹을 둘러싼 파문은 법정 다툼을 넘어 국감 이후 가을 정국을 달구는 뜨거운 감자로 부상할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10월 23일 기자와 만난 박지원 의원실과 주 의원실 보좌진은 ‘공수’ 입장은 서로 다르지만 한결같이 이번 문제 제기를 계기로 ‘DJ 비자금’ 의혹을 둘러싼 실체를 명백히 밝혀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 의원실 권태윤 보좌관은 “과거 ‘DJ 비자금’ 의혹이 헛방으로 끝난 사례가 많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의혹이 있는데 그냥 지나치는 것도 문제가 있지 않느냐”며 “이번 건은 제보자가 확실하고 갖가지 제보와 증거자료를 확보하고 있는 만큼 DJ 측의 대응수위를 지켜보면서 차분히 대응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박 의원실 김시몽 보좌관은 “동교동에서 잘 판단해서 대응하겠지만 이번만큼은 대충 넘어가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안다”며 “2004년 2월 홍준표 의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축하금 등 정치비자금 1300억 원을 CD 형태로 은닉했다’고 폭로했다가 위조 CD로 판명이 나 곤욕을 치렀듯이 주 의원이 공개한 CD 또한 출처 불명의 위조 CD일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정치 공방전을 넘어 검찰 수사로 확전되고 있는 ‘DJ 비자금’ 의혹 논란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실체적 진실을 드러내게 될지 정치권의 이목이 검찰청사로 향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