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간겐다이>가 공개한 역도산의 미공개 사진들. 왼쪽은 스모 선수로 활동할 당시 모습. 작은 사진 왼쪽은 로마 여행 때. 오른쪽 역시 스모 선수 시절. | ||
역도산은 2차대전 패배 후 실의에 빠져있던 일본인들에게 영웅이며 동시에 최고의 스타였다. 그의 마지막을 지켰던 부인 다나카 게이코 씨(65)는 일본 대중지 <주간겐다이>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미공개 사진과 에피소드를 공개했다.
“남편이 칼에 찔려 숨을 거둔 것은 1963년 12월 15일의 일이었다. 그 후로 42년이 흐르면서 실제와는 상당히 다른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이번 기회에 그의 본모습을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게이코 부인. 역도산은 일본 항공의 승무원이었던 그녀의 사진을 보고 한눈에 반해 교제를 시작한다. 두 사람은 사귀기 시작한 지 반 년도 되지 않아 약혼과 함께 동거를 하다가 1963년 6월에 결혼했다. 짧은 결혼생활이었지만 그녀야말로 역도산이자 김신락이며 모모타 미쓰히로인 세 개의 이름을 가진 일본의 영웅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인물이다.
“남편이 죽을 때까지 그가 북한 출신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도 사귀기 전에는 몰랐다. 약혼을 한 직후에 ‘나는 조선인이다. 그러나 일본인으로 링에서 싸우고, 일본인으로 응원을 받고 있다. 그러니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역도산은 1924년 북한의 함경남도에서 태어났다. 2차 대전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스모 선수가 되어 세 번째 등급에 해당하는 세키와케까지 올라갔지만 후에 스스로 그만둔다. 스모를 그만둔 원인에 대해서는 국적 때문에 차별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게이코 부인은 “어째서 스모를 그만둔 건지 본인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차별이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전처와의 사이에) 아이가 셋이나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 그는 국적이나 출신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었다”라고 말한다.
스모를 그만둔 후 술과 싸움에 젖어 살다가 우연히 레슬링을 알게 된 역도산은 미국으로 건너가 레슬링을 익힌 후 일본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일본에서 프로레슬링 사업을 시작하여 국민적인 영웅이 된다. 그의 경기는 일본 TV 역사상 4위라는 엄청난 시청률(64%)을 기록했다.
그는 공산주의를 싫어했지만 늘 북한의 가족들을 그리워했다. 1963년 1월 비밀리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군사분계선에 선 그가 매서운 추위 속에서 웃옷을 벗어던지고 북한을 향해 “어머니!” “형님!”이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다고 한다.
결혼 후에는 전처럼 술을 마시고 난동을 부리는 일도 적어졌다. 게이코 부인과 함께 있을 때는 언제나 신사적이었으며 술도 반주로 맥주를 마시는 정도였다고 한다.
게이코 부인은 “집 밖에서는 늘 ‘영웅’으로 보이고 싶어 했지만, 신혼여행으로 로마에 갔을 때는 길거리에 세워져 있는 스쿠터에 올라타곤 영화 <로마의 휴일>을 흉내 내던 장난기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유럽은 그에게 별로 맞지 않았던 것 같다. ‘말도 안 통하고, 무엇보다 여자의 짐을 들어주는 것이 귀찮다’며 농담을 했다”며 말을 맺었다.
박영경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