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국회의원 중 대통령이 된 의원이 있는가 하면 불과 ‘48시간짜리’ 의원도 있었고 임기 중 사망하거나 옥살이를 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60년 국회의 역사에 기록된 흥미로웠던 장면을 되돌아보고 각종 통계를 통해 국회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다.
국회 개원 60년 동안 여러 가지 부침이 많았다. 지난 1988년 5월의 13대부터 지난 17대까지 다섯 번의 국회는 순조롭게 4년의 법정 임기를 채웠지만 과거의 국회는 임기를 제대로 채우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제헌부터 18대까지 배출된 국회의장은 모두 20명. 이 중 최장수 의장은 6~7대를 지낸 이효상 의장으로 7년 6개월 14일 동안 의사봉을 잡았다. 가장 짧은 임기를 지낸 의장은 1948년 5월 31일부터 7월 24일까지 55일간 국회 수장 자리에 올랐던 초대 이승만 의장. 이 의장은 그해 8월 15일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의장직에서 물러났으며 대통령과 국회의장을 모두 지낸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동안 ‘금배지’를 달았던 인원은 총 2628명으로 한 사람이 최다 9선까지 당선되기도 했다. 하지만 어렵게 얻은 의원직을 임기도 채우지 못한 채 사망(초대 이병국(천안), 구논회(대전 서을·2006년 12월 사망))하거나 자살 혹은 타살로 생을 마감한 경우도 있었다. 최윤호(2대), 김홍용(2대), 이종린(초대~2대) 전 의원은 6·25 때 북한군에게 학살당했고 이기붕(3대) 전 의원은 4·19 당시 피신 중 아들이 쏜 권총에 맞아 일가족이 사망했다. 또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거운동 기간 중 사망한 신익희(초대~3대), 조병옥(3~4대) 전 의원의 부음 소식은 전 국민의 슬픔을 자아내기도 했다.
임기별 각종 통계를 살펴보면, 임기가 가장 짧았던 ‘48시간짜리’ 의원도 있었다. 1961년 5월 13일 5대 보궐 선거에서 당선된 정인소(음성), 김사만(괴산), 김성환(정읍), 김종길(남해) 전 의원은 선거 3일 뒤 5·16이 일어났기 때문에 기록상으로 13~16일 4일 동안 재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14일 아침에 당선이 선포되고 16일 아침 국회가 해산됐으니 시간으로 계산하면 ‘48시간’이다. 이들 중 아무도 의원등록을 못했고 세비도 못 타간 채 국회가 문을 닫았다. 정인소 씨와 김사만 씨는 각각 8회, 5회씩 출마한 끝에 당선됐던 것이었다.
‘다선’ 의원으로 기록을 세운 이들도 있다. 18대까지 최다선을 기록한 이는 3명(김영삼, 김종필, 박준규)으로 모두 9선을 지냈다. 특히 박준규 전 의원은 9번을 선거구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 당선돼 더 값지다. 김영삼, 김종필 씨는 전국구와 유신정우회(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한 국회의원) 당선이 포함돼 있다. 8선도 모두 3명(김재광 이만섭 정일형)으로 정일형 전 의원은 2대~9대까지 8번 연속 같은 선거구(서울 중구)에서 당선되는 기록을 세웠다. 7선은 모두 12명(김재순 김진만 신상우 오세응 유진산 이기택 이병희 이재형 이철승 정해영 조순형)으로 이들 중 18대 현역은 조순형 의원뿐이다.
이름에 얽힌 사연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원명은 김대중(金大仲)이었으나 4, 5대 선거 때 강원도 인제에 출마해 모두 낙선한 뒤 김대중(金大中)으로 개명했다. 개명의 영향도 있었던지 그는 5대 보선에서 당선됐고 6~8대 때 연속으로 등원했다. 이후 13~14대 때도 당선돼 6선을 기록한 데 이어 4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는 영예를 얻기도 했다. 한건수 씨도 원명이 한건수(韓鍵洙)였으나 2대 선거에서 낙선하자 건 자의 ‘쇠금 변’을 없앤 한건수(韓建洙)를 사용했다. “1년에도 수천 수만 통의 엽서와 편지를 써야 하는데 건(鍵)자가 너무 거추장스러웠다”는 것의 그의 변.
그런가 하면 집안에서 국회의원이 여럿 탄생하는 ‘경사’가 이어진 경우도 적지 않았다. ‘부부 의원’이 된 서영희(유정회) 김제원 전 의원(8, 9대)은 1973년 3월 9대 의원에 같이 당선된 후 그 해 8월 ‘국가관의 일치가 마음에 들었다’며 결혼했다. 이후 1974년 10월 12일 국회본회의장에서는 당시 정일권 의장이 서영희 의원의 질문 순서를 앞당기자 야당인 신민당 의석에서 항의로 소란을 피운 일이 있었다. 이때 남편 김제원 의원이 신민당 의석을 향해 “시끄러워! 누가 의장인지 모르겠다”고 고함을 질러 장내 분위기를 정리해주는 ‘외조’를 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부부가 함께 등원한 경우도 있었는데 2004년 4월 17대 선거에서 당선된 최규성 의원(17, 18대)과 이경숙 전 의원(17대)이 주인공. 또 박철언 전 의원(13~15대)이 14대 때 의원직을 상실하자 부인 현경자 씨가 남편의 지역구에서 보선에 출마해 당선된 경우도 있었다. 또한 15대 김찬진 의원의 부인 이영애 변호사는 18대에 자유선진당 비례대표로 등원해 역시 ‘부부의원’ 경력을 보유했다.
‘부자 의원’을 지낸 이들도 있었다. 조병옥 박사(3, 4대)와 아들 조윤형 전 의원(5~8, 13~14대), 조순형 의원(11, 12, 14~18대) 이들 3부자가 모두 의원을 역임했고 이재학 씨(1~5대)와 아들 교선(5, 8대), 응선(13, 15대) 형제, 김대중 전 대통령(5~8, 13, 14대)과 아들 홍일(15~17대), 홍업(17대) 형제, 김동석 씨(4대)와 아들 윤환(10, 11, 13~15대), 태환(17, 18대) 형제 등이 있었다.
‘형제 의원’으로는 전남 담양의 김 씨 삼형제가 눈에 띈다. 동생 김문용 씨가 제헌의원 때 먼저 등원했으나 그 뒤 고배를 마시자 맏형 김홍용 씨가 출마해 당선됐다. 하지만 이어 한국전쟁이 발발, 홍용 씨는 북한군에 학살당하고 보궐 선거에서 동생 문용 씨가 당선돼 남은 임기를 이어갔다. 문용 씨는 3대 때 낙선하고 정계를 은퇴했는데 막내동생 김성용 씨가 두 형의 뒤를 이어 정계에 입문했고 6, 7, 9대에 당선된다. 김 의원의 동기는 3남4녀인데 강세형 전 의원(3대)이 매형이어서 7남매 중 4명이 ‘의원 가정’을 이룬 셈이 됐다. 또 김 씨 형제의 외조카가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15, 16, 18대)여서 이 총재는 결국 외삼촌 세 명과 이모부를 국회의원으로 둔 셈이 됐다.
‘부녀 의원’도 눈에 띈다. 김두한 전 의원(3, 6대)의 딸 김을동 씨가 18대에서 친박연대 비례대표로, 10대 유정회 이경호 의원의 딸 이영애 씨가 18대 자유선진당 비례대표로 각각 당선됐다. 이영애 의원의 남편 김찬진 씨도 15대 국회의원을 지냈으니 장인과 사위 모두 국회의원을 지낸 셈이다. 또 한나라당 이혜훈 의원(17, 18대)은 시아버지 김태호 전 의원(12, 13, 15, 16대)에 이어 의원이 된 첫 ‘구부(舅婦)의원’이다.
선거구가 없어지거나 생기는 바람에 운명이 뒤바뀐 의원들도 있었다. 6·25 전쟁으로 없어진 선거구는 개성을 비롯해 개풍, 장단, 연백 갑·을, 옹진 갑·을 등 모두 7개구. 2대 때 경기도 옹진 갑에서 당선된 서범석 씨는 6·25 전쟁으로 섬 몇 개를 제외한 옹진 대부분이 휴전선 너머로 날아가 ‘실향의원’이 됐다. 그러다 다음 선거에서 조소앙 의원의 납북으로 선거구가 빈 서울 성북 을로 옮겨 4~8대까지 다섯 차례 당선됐다. 또 2대 때 고향 개성에서 출마했다가 낙선했던 민관식 씨는 6·25 뒤 서울 동대문에 정착해 3~6대, 10대 의원을 지냈다.
그런가 하면 수복지역의 의원들은 남다른 선거전을 펼치기도 했다. 4대 선거 때 강원도 양구에 출마한 김재순 씨(5~9, 13, 14대)는 군인 표를 모으기 위해 눈물겨운 작전을 썼다. 군부대가 내려다보이는 고지에 여성 운동원을 밤마다 올려 보내 마이크로 한 표를 호소한 것. 군인 표는 많은데 낮에는 훈련 중이어서 어떻게 할 수 없고 밤에도 병영에 들어가 선거운동을 할 수 없어 이 같은 묘안을 생각해 냈던 것. 결국 아쉽게 패배했으나 야당인 민주당 공천으로 나가 선전한 셈이라 할 수 있었다.
양구 외에도 강원도 철원 화천 김화 양양 고성 인제, 경기도 연천 등 8개 군은 4대 때부터 처음으로 선거가 실시된 6·25 수복지역이다. 주로 군인 주둔지역이기 때문에 군인 표가 대세를 좌우했고 고정표나 지연을 내세울 수 없었기에 외지인들이 ‘무주공산’에 덤비듯 쇄도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영원한 숙적’으로 대결한 이들도 있었다. 이상돈 씨(제헌 보선, 5, 6대)와 김종철 씨(4, 7~10, 12대)는 20여 년 동안 대결한 최장기 숙적. 이들은 의원선거에서 무려 6번 만나 3승 3패를 기록했다.
그런가 하면 단 세 표 차로 당락이 결정된 경우로 유명한 ‘문세표’ 일화도 있었다. 16대 경기 광주에서 한나라당 박혁규 후보는 민주당 문학진 후보보다 3표가 많은 1만 6675표를 얻어 턱걸이로 당선됐고 그뒤 문 후보의 별명이 ‘문세표’가 되었다. 또 3대 전남 완도에서 김선태 후보와 이준호 후보 간에도 불과 7표 차로 당락이 갈렸고, 17대 충남 당진의 김낙성 후보는 상대 박기억 후보를 9표 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당시 박기억 후보는 당진군 선거관리위원장을 상대로 당선무효소송까지 냈으나 결국 대법원에서 원고패소 판결이 난 바 있다. 이후 18대에서 김낙성 후보는 무려 60%에 가까운 득표로 한나라당 정덕구 의원을 여유 있게 따돌리고 재선에 성공했다. 김 의원은 17대에서의 아슬아슬했던 득표 결과에 대해 “어렵게 얻은 자리인 만큼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17대 의정활동에 대한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국회 상임위 활동에 대한 ‘이색통계’도 흥미롭다. 박한상 전 의원(6~10, 12대)은 1969년 8월 30일 국회법사위에서 무려 10시간(29일 오후 11시 10분~30일 오전 9시 10분) 동안 발언해 ‘최장발언’을 기록했는데 이를 받아적느라 속기사만도 60여 명이나 동원되었다고 한다. 또 가장 말을 빨리 한 사람은 고 김선태 전 의원(3~5대)으로 그는 타 의원들의 평균 연설 속도(1분에 300자)를 훨씬 뛰어넘는 분당 468자의 말을 쏟아냈다고 한다. 초당 7.8자 꼴로 말하는 ‘속사포’ 김 전 의원의 발언을 기록하기엔 1명의 속기사로는 역부족이었고 이후 국회에선 2명의 속기사가 의원 발언을 기록하는 전통이 생겼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박영종 전 의원(3대)은 국회 4년 본회의 동안 무려 450회의 발언을 해 ‘최다 발언’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끈질긴 집념으로 국회의원직에 ‘수없이’ 도전한 이도 있었는데 김두섭 전 의원(14대)이 바로 그 주인공. 김 전 의원은 18번의 총선 중 무려 13차례나 도전해 단 한 번 금배지를 달았는데 5대 때부터 지난 18대까지 한 번을 제외하고 모두 출마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