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6일 한나라당의 쟁점 법안 처리를 저지하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을 점거한 민주당 의원들. 연합뉴스 | ||
여기에 국회 사무처가 ‘12·18 국회 폭력 사태’를 주도한 야당 의원 2명과 당직자들을 검찰에 고발하는가 하면 한나라당도 폭력 사태에 따른 강경 대처 방침을 분명히 하고 있어 여야 간 갈등의 골은 치유 불능 상태로 치닫고 있는 실정이다. ‘폭력 국회’를 넘어 피 말리는 첩보전을 동원한 전쟁터를 방불케 하고 있는 여야 정치권의 ‘여의도 대첩’ 속으로 들어가 봤다.
12월 18일 국회 외교통상위는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한나라당이 FTA 비준안 상정을 위해 회의장을 점거하고 각종 집기류를 이용해 출입문을 봉쇄하자 민주당은 대형 해머와 노루발(속칭 빠루), 전기톱 등을 동원해 문을 부쉈다. 이 과정에서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극렬한 몸싸움이 전개됐고 소화기 분말과 소화전 ‘물대포’까지 동원되는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국회 경위 안 아무개 씨가 몸싸움 중 전치 3주의 부상을 당해 입원했고 각 당 관계자들도 크고 작은 상처를 입는 등 인적 피해도 적지 않았다. 국회 사무처는 이날 4시간여에 걸친 폭력 사태로 파손된 시설 복구에 출입문 400만 원, 회의 테이블 330만 원, 카펫 150만 원 등 총 1987만 원이 들 것으로 예상했다.
국회 사무처는 24일 민주당 문학진·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 등 국회의원 2명과 양당 소속 보좌진 5명을 검찰에 고발하는 한편 앞으로도 회의를 방해하기 위해 쇠망치나 해머 등 불법 장비를 반입하거나 사용하는 자에 대해서는 국회법에 따라 현장에서 체포할 방침이라고 경고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야당은 박진 외교통상위원장의 ‘경호권 불법 발동 의혹’ 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면서 행위자만 문제 삼는 것은 적반하장이라며 일체의 조사에 응하지 않겠다는 강경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폭력 사태가 검찰 고발로 비화되면서 여야 간 앙금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에 각종 쟁점 법안 처리를 놓고 민주당은 본회의장 점거로 결사 항전을 준비하고 있는 반면 한나라당은 연말 처리를 고수하고 있어 2008년 마지막 날까지 여의도 국회는 물리적 충돌 등 대혈투를 피할 수 없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여야가 끝내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여당이 쟁점 법안을 단독 처리할 경우 여야 모두 극심한 후폭풍에 직면, 신년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정국 속으로 빠져들 것으로 보인다. 과거 국회에서도 법안 처리를 둘러싼 극한 대치와 폭력 사태는 거센 후폭풍을 몰고 온 사례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1996년 12월 26일 새벽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이 복수노조 허용 등을 골자로 한 노동법 개정안 등 20여 개 법안을 단독 처리한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른바 ‘노동법 날치기’ 사태는 당시 여당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 국회는 마비됐고 노동계가 총파업에 돌입하는 등 여론이 악화일로로 치달으면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레임덕을 불러온 결정적 빌미를 제공했다. 국민적 저항에 몰린 여당은 이듬해인 97년 노동법을 재개정하는 수순을 밟았다.
김대중 정권 시절인 99년 1월에는 당시 공동여당이었던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한일어업협정 비준동의안, 교원노조법 등 70여 개 법안을 한나라당 불참 속에 단독 처리한 바 있다. 이후 정국은 한나라당의 강력한 저항 속에 1년 내내 경색 국면을 면치 못했다.
▲ 국회 정상화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한 한나라당 의원들. 연합뉴스 | ||
쟁점 법안 처리를 놓고 여야가 겉으로는 ‘사즉생’ 각오를 다지면서도 내심 후폭풍을 염려하고 있는 배경에는 과거 역풍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신중론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나라당 내엔 연내 강행 처리를 위해 정면돌파도 불사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우세하다. 민주당이 잇단 대화 요청을 무시하고 국회 본회의장을 기습 점거한 데 대한 반발 기류도 거세지고 있다. 박희태 대표는 “우리는 법안들을 연내 처리해야 하고 이제는 법안을 처리할 때”라는 강경 입장을 천명하고 있고, 홍준표 원내대표도 “민주당이 노리는 것은 탄핵 때처럼 끌려나가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소위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키려는 자해정치”라며 “연내 법안 처리는 불변”이라고 강조하면서 소속 의원들에 대한 비상 대기령을 발동한 상태다.
하지만 당내 일각에선 신중론도 고개를 들고 있다. 또다시 국회 유혈 사태를 유도해 국민적 저항을 일으키려는 민주당의 고도의 전략에 말려들 소지가 다분하다는 논리다.
한나라당 내 소장파 리더 격인 원희룡 의원은 12월 24일 열린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96년 노동법 강행통과와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때 여론의 역풍을 맞지 않았느냐. 역대 정권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 힘으로 미는 정치는 민심의 역풍을 맞을 수밖에 없다”며 신중론을 폈다. 당 내 개혁성향 의원들로 구성된 ‘민본 21’ 소속 김성태 의원도 같은 날 의총에서 “반드시 해야 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해서 접근해야 한다”는 선별 처리론을 주장했다.
4선의 남경필 의원은 이날 비공개 중진연석회의에서 “국정원법이나 집시법, 사이버모욕죄는 찬반이 엇갈리는데 한나라당이 일방적으로 처리하면 자유와 인권을 제한하는 방향으로 간다는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며 문제가 되고 있는 쟁점 법안들의 입법 연기를 공식 요구하기도 했다. 법안 처리를 둘러싼 여야 간 대치 국면이 한나라당의 적전분열 양상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본회의장을 점거한 민주당은 한나라당이 강행 처리를 시도할 경우 원외 투쟁은 물론 의원직 총사퇴까지 꺼내 들겠다는 초강경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정세균 대표는 12월 26일 “한나라당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법안 수십 건을 사전 논의나 국민에 대한 설명 없이 일방적으로 입법하려는 상황”이라며 “어떤 비용을 치르더라도 모든 방법을 동원해 악법들을 막아낼 책임이 있다”면서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원혜영 원내대표도 이날 한 라디오 프로에 출연해 “모든 것을 다 거는 각오로 임할 것”이라며 ‘의원직 총사퇴’ 가능성까지 열어놓은 상태다.
당 지도부의 강경 노선과는 달리 일부 소장파 의원들은 국회 폭력 사태만큼은 피해야 된다며 여당과의 막판 대타협을 주문하고 있다. 만에 하나 지도부가 2004년 ‘탄핵의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얄팍한 술수로 일관할 경우 더 큰 역풍에 직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여야 내부에서 신중론과 타협론이 고개를 들고 있지만 여야 지도부가 강경 노선을 고수하고 있는 만큼 쟁점 법안 처리를 둘러싼 여야 간 대충돌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는 형국이다. 과연 2008년 마지막 ‘여의도 대첩’에서 어느 쪽이 승자가 되고 또 어느 쪽이 후폭풍의 희생양이 될지 결전의 날을 맞이하고 있는 여의도 국회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