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전 대통령이 박연차 회장과 거액의 돈 거래를 한 사실이 드러날 경우 법적 논쟁을 떠나 도덕성 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작은 사진은 봉하마을 사저 전경(왼쪽)과 세종증권 간판. | ||
검찰은 지난해 12월 22일 세종증권 사건과 관련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형과 측근들을 구속기소하면서도 정치권 주변에서 끊임없이 나돌았던 ‘박연차·정대근 리스트’ 실체는 부인한 바 있다. 검찰의 수사 발표 이후 소문과 억측이 난무했던 세종게이트 사건은 소강 국면으로 접어드는 듯했다. 하지만 지난 12월 29일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노 전 대통령 퇴임 직후 15억 원을 빌려주면서 써준 것으로 보이는 차용증을 검찰이 확보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세종게이트는 ‘노무현-박연차 커넥션’ 의혹으로 비화되고 있는 형국이다.
법조계 관계자들은 박 회장과 노 전대통령 간의 15억 원 돈거래 과정에서 불법이나 대가성이 발견될 경우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소환조사가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차용증의 진위 및 신빙성 여부, 15억 원의 정체, 아리송한 검찰 행보와 박 회장의 심경 변화 여부 등을 둘러싼 궁금증도 증폭되고 있다.
과연 검찰의 칼날이 측근을 넘어 노 전 대통령을 직접 겨누게 되는 것일까. 두 사람의 금전거래로 불거지고 있는 ‘노무현-박연차 커넥션’ 의혹을 둘러싼 미스터리를 들여다봤다.
노 전 대통령의 주변 인물들과 박 회장 간의 검은 거래 의혹이 불거진 것은 비단 어제오늘만의 얘기는 아니다. 박 회장은 노 전 대통령 주변의 부동산 문제 등 재산 관련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구설수에 오르내린 바 있다. 노 전 대통령 주변의 부동산 거래 등 재산 관련 의혹 중심에는 항상 친형인 노건평 씨가 자리 잡고 있었다.
박 회장은 1971년 경남 김해에 태광실업의 전신인 정일산업을 설립하면서 노건평 씨와 친분을 쌓기 시작했고, 88년 노 전 대통령이 총선에 출마할 당시 노 씨가 내놓은 김해 땅을 사들이며 노 전 대통령의 후원자로 입지를 구축했다.
참여정부 초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 부상해 정치권을 뜨겁게 달궜던 ‘장수천’ 사건 때도 박 회장과 노건평 씨의 부동산 거래를 놓고 의혹이 제기된 바 있다. 노 씨가 실제 거주 목적이 아니면 허가가 나지 않는 경남 거제시 한려해상국립공원 내 토지에 주택 두 채와 커피숍을 소유한 사실이 드러나자 당시 한나라당은 노 씨의 부동산 투기 및 노 전 대통령의 위장 재산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2003년 5월 당시 장수천 사건을 집중적으로 폭로했던 김문수 경기지사는 “노무현 후보가 장수천에 대한 보증채무를 회피할 목적으로 노건평 씨 명의로 되어 있던 이 땅을 친척에게 이전 관리하다가 민주당 경선 도중 박연차 씨에게 넘기고 정치자금을 지원받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청와대 측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했고 박 회장 역시 “제3자의 소개로 연수원 건립을 위해 거제 땅을 매입했을 뿐 처음엔 노건평 씨 땅인 줄도 몰랐다”고 해명한 바 있다.
박 회장이 노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사저 부지 일부를 매입한 배경을 둘러싼 의혹도 증폭되고 있다. 박 회장과 그의 측근인 정승영 정산개발 사장의 세종증권 주식 거래 시점과 봉하마을 부지 매입 시기가 거의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 회장 등이 세종증권 주식을 매입한 시기는 2005년 6월이고, 정 사장이 봉하마을 사저의 일부 부지를 매입한 것은 2005년 7월의 일이다. 정 사장은 봉하마을 사저 터와 임야 등 2만 6565㎡(8050평)를 이 시기에 사들였다가 2006년 11월 이 땅의 일부(4280㎡)를 1억 9455만 원에 노 전 대통령에게 팔았다.
검찰 일각에서는 정 사장이 박 회장의 핵심 측근이란 사실을 고려할 때 박 회장이 정 사장 명의를 빌려 땅을 구매한 뒤 노 전 대통령에게 ‘이전’한 것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검찰은 박 회장과 정 사장, 노건평 씨 가족의 세종증권 주식 매매와 봉하마을 사저 부지 매매 과정에 비밀 거래 등 검은 커넥션이 도사리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분위기다.
검찰 수사 결과 박 회장은 세종증권 주식 매매를 통해 259억 1652만 원의 시세차익을 남긴 것으로 드러났다. 정 사장도 부인 등 가족 명의로 세종증권 주식을 사고팔아 7억 7644만 원의 시세차익을 거뒀다. 노건평 씨의 딸과 사위, 사돈도 6억 31만 원의 시세차익을 남긴 것으로 밝혀졌다.
검찰은 박 회장이 농협의 세종증권 인수 정보를 노건평 씨로부터 전해듣고 이를 정 사장에게 전달했을 개연성이 높다고 보고 보강 수사에 주력하고 있다. 정 사장의 땅 매입에 대한 보상 성격 내지는 토지대금의 보전 차원에서 사전정보 제공이 이뤄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박 회장이 노 전 대통령 퇴임 직후 15억 원을 빌려주고 차용증을 써 준 배경을 둘러싼 궁금증도 증폭되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주변 인물들과 박 회장간의 검은 거래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게 아니냐는 것이다.
검찰 등에 따르면 차용증은 노 전 대통령이 퇴임한 직후에 작성됐고 이자율과 변제일도 적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박 회장을 상대로 실제 노 전 대통령과 돈 거래를 했는지 여부, 차용증을 만든 경위, 대가성 여부 등을 조사할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수사팀 관계자는 “현재까지는 차용증만 확보된 상태고 계좌 추적이나 진술에서 노 전 대통령과의 자금 거래가 확인된 것은 아니다”는 조심스런 입장을 보이고 있다.
법조계 관계자들은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빌린 돈이라면 사인간의 금전거래 영역에 속해 법적으로 문제 삼을 게 별로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검찰 수사 과정에서 퇴임 이전의 이권과 관련한 대가성이 인정될 경우 ‘사후 수뢰죄’가 적용될 여지는 충분하다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15억 원 차용증과 관련해 지난 12월 30일 노 전 대통령 측의 김경수 비서관은 “검찰에서 공식 확인되지 않은 사안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며 “검찰의 공식 발표가 이뤄질 경우 필요시 대응하겠다”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차용증이 위조된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이 박 회장으로부터 돈을 빌린 증거로 만든 것인지 등 정확한 사실 관계를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며 차용증의 진위 및 신빙성에 대한 수사에 착수할 것임을 시사했다.
검찰 조사에서 박 회장이 15억 원을 실제로 노 전 대통령에게 건넨 것으로 확인될 경우 돈 거래 시점과 성격, 이자 지급 여부, 대가성 여부 등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불법 거래나 대가성이 인정될 경우 사법처리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차용증이 진본이라면 15억 원의 성격과 용도를 둘러싼 논란은 더욱 확산될 것으로 보인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은 물론 야당 시절에도 본인이 직접 재산을 관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수천’ 사건을 비롯해 부동산 의혹 등 재산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친형인 노건평 씨나 주변 인물들만 구설수에 오르내렸지 본인이 직접 개입된 물증은 발견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이 지난해 4월 퇴임 후 신고한 재산은 모두 9억 7224만 원이다. 2003년 3월 대통령 취임 후 처음 신고한 재산이 4억 7200만 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재임기간 중 5억여 원의 재산이 늘어난 셈이다. 노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 사저 공사에 대지가액(1억 899만 원)과 신축 중도금(8억 856만 원)을 합쳐 10억 6155만 원이 투입됐고, 사저 신축을 위한 순수 금융 부채는 4억 6700만 원이라고 신고했다. ‘박 회장과의 15억 원 금전거래’가 사실이라면 대체 왜 노 전 대통령은 자신의 전 재산보다 훨씬 많은 돈이 필요했던 걸까.
사정당국 일각에서는 박 회장이 노 전 대통령의 사저 신축 비용 보전 및 금융 부채 탕감 등을 목적으로 돈을 건넸고 안전장치 차원에서 차용증을 준비한 게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다른 한편에선 노 전 대통령이 퇴임한 직후부터 봉하마을에서 ‘살기 좋은 지역 만들기 사업’ 등을 구상해 왔다는 점에서 15억 원이 이 사업과 관련돼 있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도 증폭되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주변에선 “소설 같은 이야기”라며 세간의 의혹에 고개를 내젓고 있지만 노 전 대통령의 ‘침묵’이 이어지는 한 15억 원의 성격을 둘러싼 구구한 억측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리송한 검찰 행보와 박 회장의 심경 변화 여부도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검찰은 그동안 이른바 ‘박연차 리스트’ 실체를 완강히 부인해 왔다. 일부 언론에서 노 전 대통령과 박 회장 간의 돈 거래 의혹이 보도됐을 때도 ‘모르쇠’로 일관하다 ‘차용증’ 확보 사실만 시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문제는 차용증 실체를 언론에 흘린 쪽도 다름 아닌 검찰 내부 인사로 추정된다는 점이다. 내부 수사정보를 외부에 유출한 장본인이 검찰 내부 인사로 드러날 경우 검찰은 이중 행보 논란에 휩싸일 것으로 보인다. 정가에서는 검찰이 노 전 대통령과 박 회장의 ‘거래’에 대한 본격 수사를 앞두고 일종의 ‘간보기’를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까지 일고 있다.
검찰의 이상한 행보와 맞물려 박 회장의 심경 변화 여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박 회장은 친노그룹뿐만 아니라 신구 정권을 망라한 정·관계에 막강 인맥을 구축하고 있다. 박 회장이 이른바 ‘박연차 리스트’ 등 정·관계 로비 의혹을 규명할 핵심 당사자로 지목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구속된 박 회장이 심경 변화를 일으켜 리스트 실체를 진술할 경우 정치권은 거대한 사정 태풍에 직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법무부의 플리바게닝 입법화 추진과 맞물려 검찰과 박 회장이 빅딜을 시도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야권 일각에서는 여권 핵심부가 검찰 수뇌부와의 사전 조율을 통해 ‘박연차 카드’를 신년 정국 주도권 장악 및 4월 재·보선 정국에 활용하려 할 것이라는 소문도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노 전 대통령과 박 회장 간의 15억 원 거래를 둘러싼 각종 의혹에 대한 검찰의 본격적인 수사를 신호탄으로 정치권을 겨냥한 대대적인 사정몰이가 시작될 것이란 관측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로 검찰은 박 회장의 자금 1억 7000만 원이 노 전 대통령의 측근인 민주당 C 의원에게 전달된 물증을 확보하고 박 회장을 상대로 이 돈의 대가성 여부를 집중 추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그동안 전 방위적 수사를 통해 박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을 입증할 만한 물증이나 증거를 상당수 확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연루 정치인에 대한 고강도 사정 드라이브를 예고하고 있는 대목이다. 특히 검찰 수사 결과 차용증대로 노 전 대통령과 박 회장이 실제 거액의 돈 거래를 한 사실이 드러날 경우 노 전 대통령은 법적 논쟁을 떠나 문제 기업인과 ‘거래’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도덕성 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