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 31일 캐나다 법원 관계자가 ‘로버트 픽튼(오른쪽) 사건’과 관련해 실종된 여성들의 포스터를 법원 앞에 걸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
사상 최악의 연쇄살인사건이라는 이른바 ‘로버트 픽튼 사건’의 시작은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밴쿠버 다운타운의 슬럼가인 이스트사이드에 있는 사창가에서 한 매춘부가 실종되는 사건이 일어난 것. 그러나 경찰은 곧바로 수사에 나서지 않았다. 매춘부 상당수가 마약과 관련이 있고, 가족과 연락이 제대로 닿지 않기 때문에 실종신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것.
실종자 가족도, 경찰도 뒷짐을 질 수밖에 없는 틈새를 노렸던 것일까. 잇따라 윤락여성들이 사라졌지만 누구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수사당국과 언론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한 2000년까지 다운타운 사창가에서 무려 54명의 여성이 실종됐다. 언론의 뒤늦은 이슈화로 실종자 가족들이 신고를 하면서 2002년 2월 실종여성들은 모두 60명으로 늘어났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경찰이 꼽은 유력 용의자 리스트 맨 윗줄에 로버트 픽튼이라는 이름이 있었다는 점이다. 경찰은 이미 1998년 7월부터 픽튼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그의 트레일러에 한 여성이 있는 것을 봤고, 피 묻은 옷 봉지와 여성들의 신분증을 봤다는 제보가 들어왔던 것. 이어 1997년 3월에 픽튼이 자신의 농장에서 한 윤락 여성을 칼로 공격한 혐의로 기소됐다는 기록도 있었다. 보다 결정적으로 확신을 심어준 것은 마약을 사기 위해 매춘을 하던 웬디 다인테터라는 여성이 픽튼의 농장에서 가까운 길에 버려진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가다가 노부부에 의해 병원으로 실려간 기록이었다. 픽튼은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살인기도, 불법감금, 가중폭행 혐의로 기소됐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기소중지 조치가 취해졌다.
경찰의 수사망은 점점 픽튼에게 집중됐다. 경찰은 그의 돼지농장을 수색하기 위해 일단은 그에게 불법무기 소지 혐의를 적용해 2002년 초 체포했다. 특이하게도 픽튼은 자신이 기르던 돼지나 양을 도살할 때 항상 탄알을 장전해두고 있는 22구경 리볼버 권총을 사용했다.
이후 경찰은 캐나다 사상 최고 수사비용을 투입해 픽튼이 비운 돼지농장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수사당국에 의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한 픽튼의 범행은 충격의 정도를 넘어 경악할 수준이었다. 그는 자신이 살해한 희생자의 시체를 썰어 사료분쇄기에 넣어 빻은 후 그 인육이 들어간 사료들을 돼지에 먹였다. 냉장고 안에는 사람의 뇌를 담아놓은 5갤런짜리 양동이 2개를 넣어두었다. 그는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톱으로 자른 두개골 안에 사체의 손발을 끼워 넣어 두기도 했다. 쓰레기통에는 많은 양의 사람 뼈와 장기, 피 등이 버려져 있었다. 실종 여성들의 유류품도 나왔다.
검찰은 그러나 곧바로 픽튼을 법정으로 불러내지 못했다. 사건이 워낙 방대한 데다가 물증을 일일이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 그래서 검찰은 먼저 스크리나 아보츠웨이, 브렌다 울프 등 6명의 여성들에 대한 살인혐의로 픽튼을 기소했다. 이후 어느 정도가 증거가 확보된 20명의 여성에 대한 살인혐의도 추가했다.
검찰은 픽튼이 적어도 49명의 실종여성을 죽였다고 믿고 있다. 픽튼이 자기 입으로 그렇게 얘기했다는 것이다. 검찰은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픽튼이 복역하고 있는 교도소에 수사요원을 재소자로 위장시켜 투입했다. 검찰에 따르면 픽튼이 그에게 “딱 50명을 채운 뒤 살인을 그만두려 했으나 일을 그르치는 바람에 1명만을 남겨놓고 붙잡히게 됐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픽튼은 검찰의 주장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이번 재판에서는 2002년 2월 23일 11시간 동안 진행된 경찰의 조사내용을 담은 비디오테이프 일부가 공개됐는데 픽튼은 “사라진 여성들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머리를 흔들며 “모른다. 나는 내 농장에 실종 여성 그 누구도 초대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는 또 “당신은 실종된 50명의 여성들 때문에 조사를 받고 있다”는 경찰의 말에 “말도 안 되는 소리며 설정”이라면서 “나는 돼지를 키우는 농부일 뿐”이라고 반발했다.
로버트 픽튼이 희대의 인간백정인지 아닌지는 수많은 지원자 가운데 선발된 12명의 배심원들에 의해 가려지게 된다. 그 최종적인 결론은 앞으로도 1년이나 지나야 나올 것으로 보인다.
밴쿠버=문암 해외정보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