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박 대통령과 일본 아소 다로 총리(왼쪽). 청와대사진기자단 | ||
금융위기 극복과 경제협력을 명분으로 두 사람이 ‘밀월 모드’로 진입하고 있는 형국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독도 영유권 문제나 과거사 문제 등은 공식 의제로 올리지도 않고 경제협력 문제만 논의한 배경에 강한 의구심을 던지고 있다. MB의 저돌적인 스타일과 강력한 집권 2기 국정운영 구상과 맞물린 ‘빅 프로젝트’가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야권 일각에서는 두 정상이 수십 년간 찬반 논쟁이 식지 않고 있는 한일해저터널 사업 등 양국 간의 초대형 프로젝트에 교감을 나누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까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1·12 한일 정상회담 이후 수면 위로 급부상하고 있는 MB와 아소 총리 간의 ‘밀월시대’ 막후를 들춰봤다.
양국 관계가 ‘가깝고도 먼 나라’에서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로 발전하고 있다.”
MB가 1월 12일 아소 총리와 정상회담을 마치고 기자회견장에서 던진 일성이다. MB는 이날 기자회견 모두발언에서 “지난해 10월 이후 저와 아소 총리는 벌써 다섯 번째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며 아소 총리와의 친밀감을 과시했다.
실제로 두 정상은 지난해 10월 이후 벌써 세 번째 정상회담을 가졌다. 지난해 10월 베이징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 이어 12월엔 후쿠오카에서 열린 한중일 3국 정상회의 때도 두 사람은 별도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회동 횟수로는 전날(11일) 환영 만찬을 포함해 여섯 번째 공식 만남을 가진 셈이다.
회담 의제도 독도 문제 등 과거사 문제는 배제하고 금융위기 극복과 실물경기 회복을 위한 양국 간의 긴밀한 경제협력 체제 구축 방안에 초점을 맞췄다. 특히 두 정상은 회담을 통해 일본 기업의 한국 진출 확대, ‘아리랑 3호’ 발사체 용역업체로 일본 미쓰비시중공업 선정, 한일 신시대 공동연구 프로젝트 추진 등 굵직한 경제협력 방안에 합의했다. 양국 간에 이 같은 대형 경제협력 프로젝트가 성사된 배경을 놓고 세간에는 구구한 해석이 흘러나오고 있다.
여야 정치권은 벌써부터 1·12 정상회담을 놓고 상반된 평가를 내놓으면서 일부 사안에 대해서는 정치쟁점화할 조짐마저 감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나라당은 미래지향적 양국 관계를 위한 긴밀한 공조체제 구축에 나섰다고 호평한 반면 야권은 형식적 회담 속에 독도 문제 등 민감한 문제는 의제에서 모두 빠졌다고 성토했다.
특히 진보신당 신장식 대변인은 “독도문제, 역사교과서 문제로 한국 국민들의 대일 감정은 냉탕인데 아소 다로 총리와 이명박 대통령 두 사람의 관계만은 온탕이니 국민들은 웃어야 하는가, 울어야 하는가”라고 비꼬았다.
미쓰비시중공업이 ‘아리랑 3호’ 발사체 용역업체로 선정된 것과 관련해서는 정치권은 물론 시민사회단체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미쓰비시가 일제 강점기 때인 지난 1944년 나고야의 항공제작소에 조선인 소녀 300여 명을 ‘조선인 근로정신대’란 이름으로 강제동원하면서 임금과 식사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던 ‘전범 기업’으로 인식돼 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은 지난 1998년 소송을 통해 이 회사의 사과와 보상을 요구했지만 일본 최고재판소는 지난해 11월 이를 기각해 반일 감정을 증폭시키고 있다.
미쓰비시가 ‘아리랑 3호’ 발사체 용역업체로 최종 선정됐다는 소식을 접한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등 9개 시민단체들은 즉각 성명을 내고 “과거에 대한 반성과 사죄도 없는 전범 기업에 어떻게 국가의 우주항공 산업을 맡길 수 있느냐”며 맹비난했다.
위성발사 사업자 선정이 한일 정상회담이 열렸던 1월 12일 전격 발표된 배경을 둘러싼 의혹도 증폭되고 있다. 통화스왑 협정 체결 등으로 ‘급한 불’을 끄는 데 일조한 일본에 대한 일종의 ‘선물’이 아니냐는 의구심과 함께 또 다른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기 위한 한일 정상 간의 모종의 ‘밀약’이 숨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일본의 한 유력 신문이 13일 일본 정부 관계자의 발언을 인용해 “한국 쪽이 애초는 러시아의 로켓으로 발사할 예정이었지만 이 대통령이 사업자를 교체했다”고 보도한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민주당 김현 부대변인은 14일 논평을 통해 “‘친구 봐주기’도 부족해 일본 기업과도 ‘프렌들리’하겠다는 몰지각한 태도에 경악을 금할 길이 없다”며 미쓰비시에 대한 발사 용역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은 지난해 10월 말 다목적 위성 ‘아리랑 3호’의 위성발사 사업자 선정을 위한 해외 공개 입찰을 통해 미쓰비시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한 바 있다. 미쓰비시가 외국의 상용 위성 발사를 수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위성 발사는 2011년 하반기로 예정돼 있다.
항우연과 미쓰비시 측은 정확한 수주 금액을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통상 발사 비용이 100억 엔(약 1530억 원)가량이지만 이번 발사엔 ‘아리랑 3호’ 외에 일본 측의 강수 관측 위성이 발사된다는 점에서 수주 금액은 수십 억 엔 수준이 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항우연의 한 고위관계자는 15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미쓰비시가 유로콧(러시아 독일 합작사)이 낸 입찰 가격의 절반을 제시한 것이 높게 평가됐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일본 신문 보도내용을 봤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완전 소설이다. 항우연은 사업주체일 뿐 정치적인 사안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대통령 말 한마디에 대형 국책사업의 방향이 바뀔 수 있겠느냐”고 항변했다. ‘하나의 발사체에 두 개의 위성이 발사되는 것에 대한 위험 부담은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는 “발사체 용량이 매우 커 별다른 문제는 없고, 실패 신뢰도 또한 극히 미약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일부 위성분야 관계자들은 미쓰비시가 경쟁업체보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을 제시했지만 기술이전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장기적인 한국 우주산업 발전에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란 지적을 내놓고 있다. 또 미쓰비시가 외국 위성을 발사한 전례가 없고 한 발사체에 두 개의 위성을 발사할 경우 극히 미약하지만 실패 확률이 그만큼 높아질 수 있다는 점에서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MB와 아소 총리가 ‘한일 신시대 공동연구 프로젝트’를 추진키로 한 배경을 둘러싼 궁금증도 증폭되고 있다. 한일해저 터널 등 거대한 프로젝트에 양 정상이 물밑 교감을 나누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특히 한반도와 일본 열도를 잇는 한일 해저터널 사업은 80년대 초 이후 수십 년간 논쟁이 지속되고 있는 ‘뜨거운 감자’라는 점에서 양국의 입장 조율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는 형국이다.
일본은 민간 차원을 넘어 재계와 지방자치단체 등이 적극적으로 나서 한일해저터널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역설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현 정부 출범 이후 해저터널 사업을 둘러싼 논란이 재점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지난해 10월 31일 대통령실 국정감사에서는 김정권 한나라당 의원이 한일해저터널 사업 타당성 검토 필요성을 묻자 정정길 대통령비서실장은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답변한 바 있다.
부산시와 일부 재계에서도 적극적인 홍보전을 펼치고 있고 양국 간 공동연구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지난해 10월 30일 부산시와 일본 후쿠오카시는 공동으로 세미나를 열고 한일해저터널 건설의 필요성을 제기한 바 있고, 같은 달 10일에는 박삼구 금호아시아나 그룹 회장이 한국 측 재계인사 15명과 도요타자동차 회장 등 일본의 주요 경제인 12명이 참석한 회의에서 한일해저터널 공동 연구를 주장하기도 했다.
한일문제에 정통한 정보기관의 한 관계자는 최근 기자와 만나 “경기침체 장기화 등 총체적 위기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이 대통령과, 지지율이 10%대로 추락하면서 정치적 위기에 직면한 아소 총리와 자민당이 한일해저터널 등 초대형 프로젝트에 교감을 나누고 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며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두 사람이 합의한 양국 간 경제협력 증진 방안도 해저터널 같은 초대형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일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