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전 대표 | ||
국민들은 정치인들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가장 먼저 보고 그들의 사고방식을 평가하기 때문에 탁월한 화술을 갖춘 정치인들은 분명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당선된 주요 요인 중 하나로 그의 탁월한 연설 능력을 꼽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을 봐도 ‘화술’과 ‘화법’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과연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화술’은 어느 정도의 수준일까. 오랜 동안 정치인과 재계 CEO들을 대상으로 개인 스피치 강의를 해오고 있는 화술 전문가 이정숙 에듀케이션 그룹(Education group.com) 대표를 통해 유력 정치인들의 ‘화술’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았다. 이 대표는 국내 정치인들의 ‘화술’에 대해 대체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진 않았다. 대부분 ‘경험’이 배제된 채 논리력과 감정적 호소에만 의존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화술의 기본은 뛰어난 수사나 문구가 아닌 진정한 교감에 있다”고 강조했다.
박 전 대표는 한나라당 경선 과정에서도 짧고 간결한 말로 유권자들에게 ‘원칙을 고수하는’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경선 룰을 둘러싸고 당시 이명박 후보 측과 치열한 마찰을 벌이는 과정에서 그는 “차라리 1000표를 드리겠다. 원래 만든 합의된 룰대로 하자” “원칙을 걸레처럼 만들어놓으면 누가 그것을 지키겠느냐” “고스톱 치다가 룰 바꾸나”라며 ‘일침’을 가했다. 자신이 손해를 봐도 좋으니 원칙대로 하자는 것이었다. 또 당시 강재섭 대표가 경선룰 중재안을 내세우며 압박을 가해왔을 때엔 “이런 식으로 하면 경선도 없다”며 원칙 고수의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이정숙 대표는 박 전 대표의 화법에 대해 ‘굉장한 노력파’라고 평가했다. 박 전 대표가 내놓는 말에는 치밀한 전략과 노하우가 담겨 있다는 것. ‘장황한’ 말이 아닌 ‘절제된’ 표현을 사용해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신의 이미지를 더 크게 부각시키는 영리한 방법이라는 설명이다. 이러한 화법은 그의 성격과 살아온 삶의 행적과도 어느 정도 맞물려 있다고 분석하는 이들도 있다. 어린 시절부터 권력의 핵심부에서 삶의 역경을 수없이 거쳐 오며 끊임없이 정적들에게 노출돼 왔던 그의 환경이 감정을 겉으로 ‘배출’하기보다는 ‘속으로 삭이는’ 인내력을 키우게 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박 전 대표는 ‘여성’의 나약한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때로 강한 표현도 구사하곤 한다. 2007년 6월 한나라당 여성 지방의원 워크숍에 참석해 “나는 위기에 강한 여자다”라고 말했고, 2007년 11월 이재오 전 최고위원이 ‘좌시하지 않겠다’는 발언에 대해서는 “너무 오만의 극치라고 본다”며 ‘맞불’ 화법으로 응수했다.
화술 전문가들이 박 전 대표의 발언 중 높게 평가하는 것 중 하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표현했던 대목이다. 단순하고 다소 유치한 느낌을 줄 수도 있는 표현인데 박 전 대표의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져 좋은 효과를 발휘했다는 평이다.
하지만 박 전 대표가 토론회 등에서 정해진 매뉴얼에 의존하는 듯한 인상은 고쳐야 할 점이라는 평가다. 이정숙 대표는 “구체적인 근거와 자료를 인용하는 것을 넘어서 매뉴얼대로 말하는 인상을 풍길 때가 많았다. 돌발적 상황에 대한 대처에는 약하다는 점이 단점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런가 하면 200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대통령 후보 TV 토론회에서의 정동영 후보의 화술은 낙제점에 가까웠다는 분석이다. 당시 이명박 후보는 747공약을 내세웠고 어려워 보일 수 있는 공약에 대해 쉽게 풀어서 설명해 눈길을 끌었다. 반면 정동영 후보는 “대통령이 투명해야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신뢰를 주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다소 복잡하고 어려운 표현을 씀으로써 자신의 공약 전달에 실패했다.
당시 일간지의 TV토론 자문을 맡아 토론회를 모니터링했던 이정숙 대표는 “당시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두 후보의 어떤 말이 기억에 남느냐고 물었더니 놀랍게도 많은 유권자들이 이명박 후보의 ‘747’과 정동영 후보의 “나는 저 사람(많은 비리에 거론되고 있는 이명박 후보를 지칭)과 나란히 앉아 토론하는 것이 창피하다”는 말이었다”고 말한다.
어려운 말로 공약 전달에 실패한 탓에 시청자들이 기억하는 것은 단지 이명박 후보를 ‘비방’하는 뉘앙스를 주는 말뿐이었던 것. 이정숙 대표는 비슷한 예로 2008년 10월 초 삼성의 비자금 항소 재판을 마치고 나온 이건희 전 회장이 “재판 결과에 만족하십니까”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법은 잘 모릅니다”라고 쉽고 간단하게 답했던 일화를 들었다. 이 대표는 “당시 이 전 회장의 답변은 그가 재판 후 어떤 행보를 보일지에 대해 추측하던 기자들의 상상력을 차단하는데 큰 효과를 가져왔다”고 설명했다.
방송 기자 출신으로 논리적 화법에 능한 정동영 당시 후보에게 다소 ‘고압적’인 이미지가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처럼 민주당 추미애 의원의 경우도 ‘도전적’인 화법이 감점 요인이 된다는 지적이다. 특히 추 의원은 여성스러운 외모를 가지고 있지만 거칠고 남성적인 ‘여장부’ 스타일의 화법을 구사해 보는 이로 하여금 부조화를 느끼게 한다는 것.
한 이미지 컨설팅 전문가는 추 의원의 이미지에 대해 “강함과 여림이 공존하는 느낌을 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강함’의 이미지는 외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하는’ 스타일에서 풍긴다는 것이다. 이 대표는 “추 의원은 보다 부드러운 언어 구사와 표정으로 이미지에 변화를 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2004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당시 민주당 선대위원장을 맡고 있던 추 의원이 민주당의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위해 ‘3보 1배’를 했던 것에 대해 일각에서는 높은 평가를 하기도 하지만,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 구축에는 그다지 좋지 않은 행보였다고 한다. 이 대표는 “유권자들은 고개를 숙이는 지도자를 원하지 않는 심리가 있다. 또 위기가 닥치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은 쇼맨십으로 비쳐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나라당 내의 친이 대 친박 갈등의 중심에 서서 계파 싸움을 양산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지난해 “좌시하지 않겠다”는 발언으로 박근혜 전 대표 측을 자극했고 이 여파로 최고위원직을 사퇴한 데 이어 총선 공천 과정에서도 친박 측과 공천권을 둘러싸고 논란을 이어갔다. 이 전 의원의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화법은 때로 측근들을 결집시키는 데 ‘촉매’가 되기도 하지만 그만큼 적을 만들어내는 화법이라는 게 화술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이다. 이정숙 대표는 이 전 의원에 대해 “감정적으로 격분된 상태에서 남을 약 올리는 표현을 자주 한다”며 “자기편에게 도움이 될 때는 유용하지만 때론 부담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는 화법이다. 말로 인해 부침이 심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한나라당은 이재오 전 의원의 국내 복귀를 두고도 또다시 계파 갈등이 예고되고 있다. 친이 대 친박 간의 갈등이 아니라 친이 세력 내에서도 그의 복귀에 대한 찬반양론이 나뉘고 있다. 조만간 귀국할 것으로 전해지는 이재오 전 의원은 최근 “미국은 모양이나 구색 맞추기가 아니라 (실제로) 자기 사람들 갖고 정치를 하더라”라는 발언으로 당내 친이계의 내부 결집을 강조해 또다시 주목을 끌고 있다.
한나라당 홍준표 원내대표 역시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유형. 홍 대표는 다소 난처한 상황에서도 노련하게 피해나가는 ‘말솜씨’를 자랑하지만 때로는 이것이 거부감을 주기도 한다는 지적이다. 홍 대표의 화법에 관해 두고두고 회자되는 일화가 있는데 지난 대선 당시 이명박 후보의 BBK 의혹에 관해 집중적인 포화가 쏟아질 때의 일이다. 그는 기자간담회에서 BBK 의혹에 대한 질문이 이어지자 대답 대신 기자들에게 “밥은 먹었어요?”라고 되묻는 ‘현문우답’(?)으로 난감한 상황을 피해갔다. 당시 현장에서는 황당하고 어이없다는 웃음도 흘러나왔다. 난처한 상황을 요령 있게 피해갔으나 홍 대표의 능숙한 말솜씨가 결국 정치인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지적도 있다.
말로 구설수에 자주 올랐던 이로는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이 독보적이다. 전 의원은 한나라당 대변인을 맡았던 2005년 수많은 ‘어록’을 남기며 ‘안티 팬’들을 끌어 모았다. 전 의원이 ‘독설가’로 이름을 날리게 된 계기는 2004년 3월
전 의원의 ‘화법’에 대해서는 반감을 갖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당시 전 의원의 발언은 ‘노 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에게 정서적 쾌감을 주는’, 즉 감정에 호소하는 매우 공격적인 화법이었다. ‘이것이 토론이다’라는 프로그램 타이틀이 무색했을 정도.
전 의원은 그 이후에도 수차례 ‘말실수’를 반복해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2005년에는 “다음 대통령은 대학 나온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학벌’을 비꼬아 비난을 받았고, 2006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치매노인’에 비유했다는 보도가 전해지며 파문이 일기도 했다.
이정숙 대표는 전여옥 의원의 화법에 대해 ‘말실수’라기보다는 사고방식이나 인격에서 우러난 발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사람의 화술은 ‘기술의 연마’로 달라질 수 있는 범위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어휘 구사나 뉘앙스, 제스처 등은 노력으로 고쳐질 수 있으나 그 사람이 가진 ‘생각’ 자체는 바뀌기 어렵다는 것. 때문에 말을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의 수양을 해야 한다는 ‘조언’도 내놓았다. 다만 의도적으로 ‘뜨기’ 위한 노이즈 마케팅의 일환으로 강한 화법을 사용한 것이라면 그 면에서만큼은 성공적이라고 평가할 수는 있을 것이란 평이다.
그런가 하면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역시 얼마 전 ‘욕설 파문’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당시 유 장관의 입에서 나온 말을 두고 욕이었느냐 아니냐를 두고 설왕설래가 오갔지만 그의 모습이 고스란히 찍힌 동영상을 본 대다수 국민들은 그의 입에서 나온 ‘욕설’자체보다 격앙된 그의 태도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유 장관은 파문이 일자 고개 숙여 사죄했지만 큰 이미지 손실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