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형인 노건평 씨 구속 후 외부 활동을 중단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재개 움직임에 정치권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 ||
정치권 관계자들은 4월 재·보선을 앞두고 민주당 내 계파 갈등이 폭발할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는 만큼 친노그룹 또한 지지층 결집을 통한 ‘부활 플랜’을 본격화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특히 퇴임 후 ‘사이버 정치’ 등으로 정치권에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해 온 노 전 대통령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감안하면 그의 ‘침묵’이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정치권에선 노 전 대통령과 친노그룹이 ‘3월 대반격’ 플랜을 은밀히 가동하고 있을 것이란 얘기도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퇴임 직후 고향인 경남 김해 봉하마을로 내려가 귀농생활을 해 온 노 전 대통령은 지난해 9월 정치 토론 전문 사이트 ‘민주주의2.0’을 오픈하는 등 직·간접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노 전 대통령이 ‘민주주의2.0’을 매개로 지지층을 재결집하는 동시에 친노그룹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꾀할 것이란 관측을 내놓기도 했다. 특히 한나라당은 “노 전 대통령의 ‘민주주의2.0’ 개설은 사실상 정치 복귀 선언이자 사이버 대통령으로 군림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을 것”이라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은 ‘노공이산’(盧公移山) 필명으로 이 사이트의 토론장에 참여해 민감한 정치 현안이나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피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사이버 여론정치는 지난해 10월 이후 측근비리가 잇따라 터지면서 소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노 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19일 토론사이트에 한미 FTA와 관련한 글을 올린 이후 지금까지 아무런 글을 올리지 않고 있다. 다만 지난 2월 13일 자신의 홈페이지 ‘사람 사는 세상’에 올린 글을 통해 최근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순진한 형님 때문에 밖에도 못나간다’고 발언한 것으로 소개한 언론 보도에 대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명한 게 전부다.
노 전 대통령은 친형인 노건평 씨가 구속된 다음날인 지난해 12월 5일 “따뜻해지면 인사하러 나오겠습니다”라고 관광객들에게 인사한 이후 모습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노건평 씨가 구속되기 이전에는 거의 매일 하루 몇 차례씩 봉하마을 ‘만남의 광장’에서 방문객들과 만남을 가져온 노 전 대통령이 긴 ‘동면’에 들어간 것이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노 전 대통령의 ‘침묵’에 대해 친형과 측근들의 줄구속으로 자신과 참여정부의 도덕성에 심각한 상처를 받은 만큼 관광객들과 국민들을 대면하기가 민망했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노 전 대통령도 13일 홈페이지의 해명 글을 통해 “모든 것이 저의 부족함에서 비롯된 일이라 생각하여 근신하고 있을 뿐 누구를 원망하고 억지를 부려 책임을 감출 생각은 하지 않고 있다”는 소회를 피력한 바 있다. 노 전 대통령 측 김경수 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은 사저에 머물고 있고 사저로 찾아오는 손님을 접견하거나 그동안 읽지 못한 책을 보기도 한다”고 노 전 대통령의 근황을 전하고 있다.
농협의 세종증권 인수비리에 개입해 세종캐피탈 측으로부터 금품을 전달받은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는 노건평 씨에 대한 선고공판은 이르면 3월 중순쯤 열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따라서 노 전 대통령이 긴 동면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는 시점도 3월쯤이 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칩거에 들어가면서 “따뜻해지면 인사하러 나오겠다”던 노 전 대통령 자신의 얘기와도 맞아떨어지는 셈이다.
정치권 주변에선 노 전 대통령이 두 달이 넘는 기간을 ‘동면’하면서 단순히 책이나 읽고 글을 쓰면서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란 관측이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이와 관련해 친노그룹 L 전 의원은 지난 11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지난해 연말까지 노 전 대통령이 친형 일로 많이 괴로워했던 건 사실이지만 올해 들어 새로운 각오를 다지면서 미래 비전 구상에 돌입한 것으로 안다”며 “건평 씨 재판이 마무리되고 4월 재·보선 정국이 도래하면 어떤 식으로든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발휘할 것”이라고 전했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예상치 못한 ‘측근 비리’로 노 전 대통령의 ‘퇴임 후 구상’이 다소 어긋나긴 했지만 이만 한 일로 그가 좌절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노 전 대통령과 친노그룹이 4월과 10월에 실시되는 재·보궐 선거와 2010년 지방선거를 겨냥한 중장기 부활 플랜을 물밑에서 가동시키고 있을 것이란 얘기도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4월 재·보선을 앞두고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의 출마 문제로 민주당 내 계파 갈등이 폭발할 조짐이 감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노 전 대통령과 친노그룹이 어떤 스탠스를 취할 것인지가 당내 역학구도에 상당한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정세균 대표가 이끄는 신주류 측과 정 전 장관을 중심으로 한 구주류 측이 정면충돌할 경우 민주당의 또 다른 대주주인 친노그룹의 역할론이 급부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 대표가 지난 8일 봉하마을을 방문해 노 전 대통령과 비공개 회동을 가진 것도 친노그룹 역할론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날 예방에는 정 대표를 비롯해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 최고위원과 강기정 대표 비서실장, 김해가 지역구인 최철국 의원 등이 동행했고, 한 시간가량 회동이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정 대표는 지난 11일 최고위원회의 직후 노 전 대통령과의 비공개 회동 배경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김해에 행사차 갔는데 인사를 하고 오는 게 기본예의가 아닌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참석자들도 정 전 장관의 출마 문제 등 민감한 정치 현안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고, 노 전 대통령도 13일 홈페이지 글을 통해 “정동영 씨 이야기는 없었다”고 일축했다. 하지만 정 전 장관의 재·보선 출마 문제로 당 안팎이 시끄러운 민감한 시점에서 두 사람이 회동을 가진 배경에 의혹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특히 이날 회동에서 정 대표가 “노 전 대통령은 한국의 오바마”라고 극찬하자, 노 전 대통령은 “언어 구사 능력이나 태도를 볼 때 나보다 한 수 위인 것 같더라”고 화답하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대화가 오간 것으로 복수의 참석자들은 전하고 있다.
지난 12일 기자와 만난 민주당의 한 고위당직자는 “거물급의 회동은 그 자체로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며 “노 전 대통령과 정 대표가 좋은 분위기 속에 회동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친노그룹과 정세균계가 의기투합할 수 있는 모티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친노그룹 부활을 꿈꾸고 있는 노 전 대통령과 호남권 맹주와 차기 대권을 노리고 있는 정 대표가 당내 역학구도 및 ‘반 이명박 전선’에 교감을 나눴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정 전 장관의 출마 문제 등으로 민주당 내 계파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4월 재·보선 정국을 노 전 대통령이 그냥 방치하지 않을 것이란 관측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신-구주류 간 갈등이 전면전으로 비화될 경우 노 전 대통령이 캐스팅보트 열쇠를 쥐고 자신의 역할론을 부각시키면서 친노그룹 부활 플랜을 본격적으로 가동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3월부터 ‘아름다운 국토 가꾸기 사업’을 재개하면서 자연스럽게 외부활동을 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꺼내들 승부카드는 무엇일까. 그의 재등장이 민주당 내 계파 전쟁과 여야 간 대치정국에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정치권의 이목이 봉하마을로 쏠리고 있다.
홍성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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