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수환 추기경의 시신이 안치된 서울 명동 성당으로 역대 대통령들의 조문 발길이 이어졌다. | ||
10월 유신, 5·18 광주항쟁, 6·29선언 등 격동의 역사 현장을 가까이서 지켜봐온 김수환 추기경은 우리나라 정치 발전과 민주화 과정의 산 증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종교계의 현실정치 참여에 대해서 끝없이 고민하기도 했지만, 국가의 중요 사안이 있을 때마다 자신의 역할을 결코 회피하지 않았다. 김 추기경은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역대 대통령들과도 남다른 인연을 만들어왔는데 개중에는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비화도 적지 않다. ‘십자가와 권력’, 그 예사롭지 않은 만남의 뒤안길을 살펴봤다.
김수환 추기경은 역대 대통령들과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털어놓은 적이 있다. “어떤 대통령과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마주앉아 담판을 짓고, 또 어떤 대통령과는 그럭저럭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청와대에서 만나자는 전갈이 오면 ‘제발 날 그만 불렀으면…’ 하는 마음부터 들게 하는 대통령도 있었다.”
역대 대통령 중 김수환 추기경이 남다른 ‘애증’을 가진 인물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김 추기경은 과거 <평화신문>에 연재했던 글(자서전 <김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사랑>으로 출간)에서 ‘내가 만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자세히 회고한 적이 있다.
김 추기경은 1968년 6월 7일 서울대교구장 취임 인사차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고 한다. “독일 유학시절 신문에서 검은색 선글라스를 끼고 5·16 군사정변을 지휘하는 사진을 통해 알게 된 터라 선입견은 좋지 않았었지만 첫인상은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는 게 그의 회고담.
하지만 얼마 뒤 박 대통령은 3선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관철시키고 장기집권 야욕을 이어갔다. 설상가상으로 그 해 말 박 정권은 “대통령에게 ‘국가보위에 관한 비상대권’을 주는 법을 의결해야 한다”고 국회에 통보하기에 이른다. 김 추기경은 TV로 생중계된 성탄자정미사에서 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발언을 했는데 이를 보고 있던 박 대통령이 방송국에 ‘방송중지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마침 책임자가 자리에 없어 하고 싶었던 말은 끝까지 나갔지만, 김 추기경은 “박 대통령이 날이 밝는 대로 장관들을 소집해 나에 대한 처리문제를 논의하려 했다는 얘기까지 내 귀에 들려왔다”고 밝히기도 했다.
김 추기경은 1972년 유신헌법 선포 직전까지만 해도 박 대통령을 인간적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스스로 권력을 내놓을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한 후부터는 그럴 수가 없었다는 것. 그는 “언론과 지식인들이 공포정치에 숨죽이고 있을 때 나는 인권과 정의를 위해서 해야 할 말을 했다”고 회고했다.
라이벌 관계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대목도 있다. 1987년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 대표위원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을 발표하면서 군사정권의 종식을 알렸던 그 해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황이었다. 양 김 씨(김대중·김영삼)가 대선 후보 자리를 두고 경쟁을 벌이고 있을 때 김 추기경은 “난 공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김영삼 씨가 먼저 대통령이 되는 게 낫다는 입장이었다. 그 이유는 김대중 씨를 기피하는 군 정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술회했다.
80년 ‘서울의 봄’ 때 만난 위컴 한미연합사 사령관은 김 추기경에게 “군에서 김대중 씨의 사상과 행적에 관한 비밀문서를 냈는데 ‘그는 제거되어야 한다’는 게 문서의 최종 결론”이라고 귀띔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김 추기경은 펄쩍 뛰면서 “그건 잘못된 보고서”라고 반박했다고.
또 야당후보 단일화 문제로 시끄러울 때도 누군가가 “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되면 군에서 가만있겠느냐”면서 그 쪽 정서를 일러준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당시 양 김 씨가 타협을 통해 후보 단일화에 성공했다면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훨씬 앞당겨졌을 것”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접견실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는 모습. | ||
김수환 추기경이 김영삼 정부의 도덕성에 크게 실망했던 일화도 있다.
1995년 6월 6일 현충일 아침 명동성당에 경찰병력이 기습적으로 투입된다. 당시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이었던 한국통신 노조간부들을 잡아가기 위해서였다. 김 추기경은 당시 상황에 대해 “명동성당의 성역 개념은 공권력과 국민 사이의 완충지대와 같은 것이었다. 서슬 퍼런 역대 군사정권도 명동성당의 이런 상징성을 존중해 주었다. 유신정권과 제5공화국 정권도 명동성당에 경찰병력을 투입한 적이 없었다. 김영삼 정부의 도덕성에 실망했다”며 애통해 했었다고 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92년 12월 말 대통령에 당선돼 인사차 찾아왔을 때 김 추기경은 “좀 섭섭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다른 후보를 찍었다. 그러나 기쁜 마음은 다를 바 없다”며 문민통치시대의 막이 오른 것을 축하했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자신이 ‘다른 후보’를 선택했던 이유에 대해 “김대중 씨가 지금 이 시점에서 대통령이 된다면 지역감정 문제가 크게 완화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역대 대통령 중 김수환 추기경과 가장 사이가 좋지 않는 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1979년 12·12 사태를 일으킨 뒤 1980년 정월 초하룻날,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새해 인사를 왔을 때 김 추기경은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다. 서부 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지 않느냐”라며 ‘쓴소리’를 한 일이 있다고 한다. 당시 이 말을 들은 전두환 소장은 표정이 굳어졌었다고.
김 추기경은 지금까지 가장 괴로웠고 분노한 때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였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끊었던 담배를 이때 다시 피우기도 할 정도로 초조한 심정이었다고 한다. 광주항쟁이 일어난 뒤인 80년 5월 20일 오전 김 추기경은 어느 안가에 있는 전두환 사령관을 직접 찾아갔다. 대화를 나누던 중 광주 보고를 계속 받던 전 사령관은 ‘도저히 안 되겠다. 광주에서 내란이 일어나 국방부에 가봐야겠다’며 자리를 떴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으려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애석해하기도 했다.
1983년에도 김 추기경은 전두환 대통령과 3시간여 동안 ‘마주 앉은’ 적이 있다고 한다. 학생시위를 비롯해 여러 가지 시국 문제에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전달하려고 윤공희 대주교(전 광주대교구장)와 함께 청와대에 들어갔다는 것. 그런데 김 추기경과 윤 대주교는 3시간 동안 앉아 있으면서 별 얘기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전 대통령 내외가 돌아가면서 쉬지 않고 얘기하는 바람에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 내외는 누군가에게 속사정을 털어놓고 싶었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어 꾹 참고 지내는 것 같았다”는 게 김 추기경의 회고.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었을 때에는 ‘늙은이’로서의 솔직한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당시 한 언론 인터뷰에선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노무현 씨를 불안하게 생각했다. 북핵문제도 그렇고 대미문제도 그렇고 노 후보 얘기가 뭔가 해석의 여운은 남기는데 석연치가 않다. 시세에 어두워서 그런지 몰라도 난 그냥 늙은이의 심정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뿐이다”라고 언급했다.
김 추기경은 서울시장 취임 이후부터 매년 신년인사를 온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2006년 참여정부의 사학법처리 강행 논란 당시 찾아온 이 시장에게 그는 “단순히 사학비리를 없애는 데 있다기보다 실제로는 숨은 뜻이 있는 것 같다”는 지적을 하기도 했다. 대통령 당선 뒤 찾아온 이 대통령에게 그는 “무엇보다 국민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양극화로 갈라진 사회를 하나로 통합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2002년 한 인터뷰에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축하멘트 대신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는 앞으로 배출될 우리나라의 ‘미래 대통령’들도 새겨들어야 할 말인 듯싶다.
“대통령 당선자에게는 축하할 말이 없어요. 당선이란 축하할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누구나 당선되는 사람들은 축하받을 말만 해왔는데 여태까지 아무도 그 축하를 받을 만한 짓을 해온 사람이 없거든요. 축하는 당선자에게 할 것이 아니라 퇴임자에게 할 수 있어야 해요. 축하는 들어서는 자의 것이 아니라 물러서는 자의 것이 되어야 한다, 이 말이오.”
조성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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