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때 한자리에 모인 김대중 김영삼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왼쪽부터). 맨 오른쪽은 노무현 전 대통령. 이들은 모두 비자금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 ||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이 최근 발행된 <월간조선> 3월호 인터뷰를 통해 과거(92년·97년) 대선자금 등 정치 비자금과 관련한 폭탄 발언을 하는가 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측근들에 대한 현 정권의 전방위적 사정 드라이브도 참여정부 비자금을 겨냥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 전 회장은 92년 대선 때 김영삼 전 대통령(YS)에게 100억 원을 전달했고, 97년 대선 때 김대중 전 대통령(DJ)에게 선거자금을 지원하지 않아 ‘정치 보복’을 당했다고 주장해 또 다른 논란을 예고하고 있다.
천문학적인 대선자금과 최고 권력자의 검은 비자금 문제는 오랜 세월 ‘성역’으로 통했다. 하지만 95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과 2003년 대선자금 수사를 거치면서 철옹성 같았던 ‘성역’은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대선자금을 포함한 과거 정권의 검은 비자금 의혹이 완전히 해소된 건 결코 아니다. 비자금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전·노 전 대통령은 물론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등 전직 대통령의 대선자금과 정치 비자금을 둘러싼 갖가지 구설수와 숱한 의혹들이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최 전 회장의 폭탄 발언과 사정 당국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와 맞물려 뜨거운 감자로 재부상하고 있는 과거 정권의 ‘비자금 X파일’ 속으로 들어가 봤다.
“과거 대선자금이 조 단위에서 수천억 원, 수백억 원대로 점차 작아졌다.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와 나는 모두 간이 작아 과거와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8월 노무현 당시 대통령이 청와대 출입기자단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던진 발언이다. 2002년 대선자금 수사가 종결된 이후 내친김에 97년 대선자금도 수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자 반대 논리를 펼치면서 한 말이었다. 2002년 대선자금 수사를 통해 대선자금 전모가 이미 공개됐고 시대가 흐르면서 대선자금 규모도 대폭 줄어든 만큼 더 이상 과거 대선자금 문제로 소모적인 정쟁이 지속돼서는 안 된다는 노 전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풀이됐다.
노 전 대통령의 발언 이후 97년 대선자금 수사 논란은 수그러들었지만 최고 권력자의 입을 통해 과거 대선자금 규모가 드러났다는 점에서 정치적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미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으로 과거 정권의 검은 비자금 실체가 드러난 바 있고, 2002년 대선자금 수사를 통해 베일에 가려졌던 대선자금 의혹도 어느 정도 해소됐지만 이미 드러난 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란 관측도 적지 않았다.
특히 YS와 DJ는 퇴임 후 대선자금 및 정치 비자금과 관련해 숱한 구설수와 갖가지 의혹이 끊이질 않고 있지만 지금까지 이렇다 할 실체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또 비자금 사건으로 사법처리된 전·노 전 대통령이나 재임시절 정치 비자금 문제가 불거졌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선자금이나 정치 비자금 문제에 자유로운 것도 결코 아니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일부 전직 대통령의 검은 비자금이 스위스 은행 등 해외 비밀계좌에 숨겨져 있을 것이란 소문까지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노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대기업 총수 등 40여 명으로부터 41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드러나 95년 11월 전직 대통령으로는 최초로 구속되는 수모를 당했다.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노 전 대통령은 대국민 성명을 통해 재임 중 기업체로부터 5000억 원가량을 받아 사용하고, 1700억 원가량이 남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검찰 수사에서는 당초 주장과는 달리 기업체로부터 3400억∼3500억 원을 받았고, 87년 대선을 위해 마련한 자금 중 사용하고 남은 돈과 ‘당선 축하금’ 1100억 원을 합해 이 돈을 조성했다고 진술했다. 전 전 대통령과는 달리 직선제로 당선된 만큼 대선 과정에서 막대한 선거자금을 거둬들였고 ‘당선 축하금’도 1000억 원이 넘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검찰은 당시 노태우 전 대통령의 진술을 바탕으로 비자금의 사용처를 대부분 찾아냈지만 900여억 원의 행방은 끝내 밝혀내지 못했고, 국민적 관심사였던 92년 대선자금 지원 여부에 대해서도 노 전 대통령의 진술 거부로 진위를 가리지 못했다. 대법원은 97년 4월 노 전 대통령에게 징역 17년에 추징금 2628억 96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노 전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을 건넨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등 재벌총수 8명을 포함한 기업인 35명도 뇌물 공여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됐으나 항소심에서 대부분 집행유예와 무죄를 선고 받았다.
재임기간에 금융실명제를 실시하면서 불법정치자금을 뿌리 뽑겠다고 호언장담했던 YS도 정치 비자금 문제로 곤욕을 치른 바 있다. 한나라당의 전신인 민자당과 신한국당이 각각 95년 6·27 지방선거와 96년 15대 총선에서 국가안전기획부(현 국정원) 예산 257억 원과 940억 원을 선거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이른바 ‘안풍’ 사건 주역으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검찰이 2001년 1월 안기부 예산 1197억 원을 불법 전용한 혐의로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과 강삼재 전 한나라당 의원을 기소하면서 ‘안풍’ 사건은 정치권 뇌관으로 급부상했다. 2004년 7월 항소심 재판부는 “(문제의 자금이) 안기부 예산이 아니고 사실상 YS의 정치자금”이라고 판결했고, 2005년 10월 대법원도 사실상 ‘YS 정치자금’으로 결론 내린 바 있다.
YS가 노태우 전 대통령으로부터 수백억 원대의 대선자금을 지원받았다는 소문도 끊이질 않고 있다. 92년 대선 과정에서 노 전 대통령이 야당 후보였던 DJ에게 20억 원을 지원했다는 사실에 미뤄 여권 후보인 YS에게는 최소 10배 이상의 선거지원금이 전달됐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사정당국 관계자들은 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당시 검찰이 밝혀내지 못한 900여 억 원의 사용처가 YS 대선지원금과 연관돼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않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선 노 전 대통령이 YS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건넸다는 증언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보관하고 있을 것이란 주장이 설득력 있게 나돌기도 했다.
최순영 전 회장이 <월간조선> 인터뷰를 통해 “92년 대선 때 YS에게 100억 원을 전달했다”고 주장한 배경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최 전 회장은 “DJ에게 정치자금을 건네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보복’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발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 전 회장은 인터뷰에서 “YS 측근이 ‘노태우 대통령이 김영삼 후보에게 선거자금으로 주기로 한 1700억 원을 받으면 갚겠다’며 100억 원을 요구해 할 수 없이 건넸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서울시내 모 호텔에서 YS에게 직접 100억 원을 수표로 전달했다”며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DJ는 대선자금이나 정치 비자금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단골로 등장한다. 이른바 ‘DJ 비자금’ 의혹은 97년 대선정국 이후 지금까지 10년 넘게 여의도 정치권과 미국 교포사회 주변에서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대표적인 정치 비자금 미스터리 중 하나로 남아 있다.
‘DJ-김우중-조풍언 삼각 커넥션 의혹’ ‘DJ 비자금 13조 원설’ ‘대북송금 리베이트설’ ‘DJ 비자금 미국 내 친북단체 유입설’ ‘3000만 달러 스위스 계좌 은닉설’ 등 ‘DJ 비자금’ 의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확산돼 왔다. 급기야 2007년 1월 한 유력 월간지는 ‘DJ 정권 비자금 3000억 원 조성’이란 제목으로 ‘DJ 비자금’ 의혹을 공개적으로 제기하기도 했다. “2001년 국내 금융기관을 통해 비자금 3000억 원을 조성했다”는 DJ 정권 당시 정부기관 고위관계자의 증언을 토대로 비자금 조성 방법을 추적한 것이다. DJ 측은 월간지 기사에 대해 즉각적인 대응을 자제하다가 8개월이 지난 후에 반박문을 게재하는 동시에 민·형사상의 법적 조치 입장을 밝혔지만 문제가 법정으로 비화되지는 않았다.
지난해 국정감사 때는 주성영 한나라당 의원이 DJ 내외의 비자금 의혹을 제기해 검찰 고소로 비화되기도 했다. 국회 법사위 소속인 주 의원은 지난해 10월 20일 대검 국감장에서 “김만복 전 국정원장이 비자금 조성에 개입하고, 이희호 여사 쪽으로 자금이 흘러나간 정황이 있다”며 ‘DJ 비자금’ 의혹에 불을 지폈다. 비자금 규모는 모두 6조 원이고, DJ 비자금 문제는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과 달리 전부 해외 계좌와 연결돼 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주 의원은 2006년 2월 중소기업은행이 발행한 100억 원짜리 CD 사본과 은행의 ‘발행사실 확인서’를 근거로 제시했다. DJ 측은 10월 24일 주 의원을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고, 검찰은 주 의원을 상대로 CD의 실체 등 관련 의혹을 수사했으나 지난 2월 “DJ와 관련성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에 정치 비자금 문제가 수면 위로 부상했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자신과 관계된 2002년 대선자금 수사를 진행시켰고, 이 과정에서 ‘당선 축하금’ 등 정치 비자금 논란도 끊이질 않았다. 그는 2003년 불법 대선자금 수사 과정에서 “한나라당이 쓴 것의 10분의 1 이상을 썼다면 대통령직을 내놓겠다”고 호언장담한 바 있다. 하지만 검찰 수사 결과 2002년 대선 과정에서 한나라당과 노무현 캠프는 각각 823억 원과 120억 원의 선거자금을 거둬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홍준표 원내대표는 2004년 2월 5일 국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축하금’이 존재한다”고 폭로하면서 그 액수는 1300억 원이라고 주장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홍 대표가 CD 발행은행으로 지목한 하나은행이 즉각 “100억짜리 CD 13장을 발행한 것은 사실이나 홍 의원이 입수한 CD는 위·변조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히면서 ‘당선 축하금’ 논란은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검찰은 2004년과 2005년 두 차례에 걸쳐 ‘당선 축하금’과 노 전 대통령 비자금 의혹 사건에 대해 내사를 벌였지만 모두 내사종결 처리했다. 또 2008년 4월 막을 내린 삼성비자금 특검팀도 삼성의 당선 축하금 의혹을 조사했으나 무혐의로 종결한 바 있다.
하지만 사정당국 주변에서는 노 전 대통령 재임시절에 불거진 현직 대통령 비자금 사건을 검찰이 규명하는 것은 현실적 한계가 있었을 것이란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한나라당 일각에선 노 전 대통령 측이 참여정부 시절 대기업 등으로부터 ‘당선 축하금’ 명목으로 거둬들인 자금이 1000억 원에 달한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연말 노 전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인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정화삼 씨를 구속시킨 서슬 퍼런 검찰의 칼날은 또 다른 후원자인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과 대선 때 자금을 담당했던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을 겨냥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정치 비자금과 연계돼 있을 개연성이 높은 ‘후원자 3인방’과 핵심 측근에 대한 사정 드라이브가 궁극적으로 참여정부 비자금 수사를 본격화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 아니냐는 의혹도 증폭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