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전 대표가 지난 2일 국회가 파행되고 있는 가운데 로텐더홀을 방문해 농성중인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을 격려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
그런데 정치권에선 박 전 대표의 이번 법안전쟁에 대한 ‘역할론’에 대해 이견이 많다. 차기 대권 주자로서 압도적인 1위를 달리고 있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었다는 호평도 있다. 하지만 여야가 3개월 동안 물고 뜯으며 싸울 때는 뒷짐 지고 있다가 타결이 임박해서야 한마디 거들어 빚어낸 ‘소 뒷발차기’였다는 악평도 있다. 평가야 어떻든 간에 박 전 대표에게 이번 입법전쟁 행보는 대권 전략의 수정을 의미하는 중대한 변화라는 지적도 많다. 입법전쟁 과정에 투영된 박 전 대표의 뉴 대권 플랜을 따라가 봤다.
박근혜 전 대표가 최근 미디어법 정국에서 보여준 행보는 지금껏 걸어온 그의 ‘원칙주의’와는 조금 다르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사실 그는 모든 사안에 대해 좀처럼 기존 입장을 바꾸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2차 입법전쟁에 대해서도 그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박 전 대표는 지난 1월 초 2차 입법전쟁을 대비하는 여권 주류를 향해 “국가발전을 위하고 또 국민을 위한다고 하면서 내놓은 이 법안들이 지금 국민에게 오히려 실망과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며 전격 제동을 걸었다.
박 전 대표의 속도조절론은 여야의 충돌이 임박했던 지난 2월 26일까지도 계속됐다. 그는 이날 “미디어 관련 법안을 포함해 쟁점법안에 대한 입장은 이미 밝혔다”라고 말해 기존의 속도조절론을 되풀이했다.
친박계가 박 전 대표의 뜻에 의해 법안 처리과정에서 뒷짐을 지게 된다면 여당의 동력이 하나로 모아지기 어려워져 2차 입법전쟁 자체가 패배로 돌아갈 판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박 전 대표는 그로부터 나흘 뒤인 지난 3월 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 앞 로텐더홀 한나라당 농성장을 방문해 “한나라당이 많이 양보를 했는데 (법안처리) 시기를 못 박는 정도는 야당이 받아줘야 한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의 포문이 그동안 일관되게 향했던 여당을 향해서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야당에게로 돌려졌던 것이다. 김형오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시효’를 20여 분 남긴 상황에서 터져나온 박 전 대표의 한마디에 여야 협상은 다시 롤러코스터를 탔다. 그리고 결국 민주당은 ‘미디어법 6월 표결처리’를 넌지시 내비친 박 전 대표의 압박에 밀려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렇다면 2월 26일까지 기존 입장을 고수하던 박 전 대표가 왜 갑자기 야당을 압박하며 자신의 주장을 바꾼 것일까. 과연 2월 26일부터 3월 2일까지 닷새 사이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 박 전 대표의 심경에 변화가 온 것일까. 이와 관련해 최근 한 인터넷 매체가 ‘이상득-박근혜의 2월 28일 회동설’을 보도하면서 앞서의 미스터리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인터넷 언론 <데일리안>은 지난 2월 28일 저녁 서울 성북동에서 두 사람이 회동을 가졌으며, 그 자리에서 이상득 의원이 박 전 대표에게 쟁점법안 처리와 관련한 협조를 부탁했다고 보도했다. 이 보도가 나간 후 박 전 대표의 측근인 이정현 의원은 즉각 보도자료를 내고 “보도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적극 대응에 나섰다. 또한 박 전 대표는 자신과 관련한 언론 보도에 대해 처음으로 명예훼손 혐의 고발을 포함한 법적 조치를 취할 방침임을 밝혔다.
박 전 대표 측이 자신의 미디어법 정국에 대한 입장이 바뀐 미묘한 시점에서 터져나온 ‘이상득-박근혜 회동설’에 대해 공격적인 대응을 하는 것은 그만큼 이 문제가 민감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회동설에 대해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상득 의원은 이번 입법전쟁을 사실상 진두지휘했다. 그런데 박 전 대표가 2월 26일까지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는 것을 접한 이 의원 진영에 비상이 걸린 것으로 안다. 박 전 대표의 묵시적 동의 없이는 직권상정 자체가 부담이기 때문에 여당 주류로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꼴 아니겠는가. 이런 배경 탓에 이 의원이 이틀 뒤에 박 전 대표를 만났다는 보도는 어쩌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박 전 대표 측이 회동 자체를 강하게 부인하고 있지만 양대 계파의 ‘수장’이 입법전쟁을 앞두고 충분히 만나 의견을 조율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 측으로서는 ‘겉으로는 여당 주류를 향해 쓴 소리를 하지만 물밑으로는 정치적 흥정을 하는 이중 플레이를 한다’라는 비난이 아팠을 것이다. 그래서 회동설 보도에 발끈해 법적 대응하는 것 아니겠느냐. 양측의 회동이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여야의 충돌을 앞둔 2월 28일은 두 사람이 만나기에 필요충분조건이 충족된 시점이었음은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또한 이 시기에 이상득 의원이 이명박 정권의 명운이 걸린 쟁점법안 처리를 앞두고 친박 의원들과도 자주 만나 협조를 요청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양측의 회동설은 팩트는 아니지만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는 게 당 안팎의 시각이다. 특히 박 전 대표가 이 시점에서 기존 입장을 번복, 여당 지도부에 힘을 실어준 것이 양측의 회동설에 무게를 더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박 전 대표는 왜 자신의 주장을 번복한 것일까. 여기에는 현실적 이유와 함께 박 전 대표가 대권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는 게 여권 내부의 시각이다. 먼저 현실적 배경으로는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이 20여 분 앞으로 임박한 상황에서 야당의 손을 들어줘 또 다시 ‘여당 내 야당’ 역할을 할 경우 여권 전체의 지지 기반을 잃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는 것이다. 또한 직권상정이 기정사실화된 마당에 끝까지 반대를 외쳤다가 자칫 이명박 정권의 개혁에 대해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다는 비판에도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이번 입법전쟁을 통해 박 전 대표가 기존의 방관자적 태도를 유지하며 ‘마이웨이’를 외치는 쪽에서, 사안마다 분리 대응해 주류에 협조할 것은 협조하는 쪽으로 대권 전략을 수정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많이 나온다. 친이세력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친박그룹은 최근 들어 자신들의 집권을 가정해 이 경우 친이세력까지 아우르는 ‘이명박 정권 2기’로 포지셔닝할 것인지, 아니면 ‘박근혜 단독 정권’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 고심을 많이 하는 것으로 안다. 사실 촛불정국 등에서 박 전 대표가 보여준 행보는 모두 ‘박근혜 단독 정권’을 만들기 위한 대권 전략이었다. 하지만 당내 권력 구도상 주류에 끝까지 비타협적으로 가면서 박근혜 단독 정권을 만드는 데에는 한계가 분명히 있다. 그래서 박 전 대표가 이번 입법전쟁에서 여당 지도부, 특히 이상득 의원의 손을 확실하게 들어준 부분을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박 전 대표의 이 같은 행보는 자신들의 집권을 ‘박근혜 단독 정권’이 아닌 ‘이명박 정권 2기’로 받아들이려 하는 시발점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왜 박 전 대표 측은 친이세력까지 아우르는 ‘이명박 정권 2기’ 쪽으로 자신들의 대권 전략을 변경한 것일까. 먼저 현실적으로 박 전 대표가 자신의 대권 도전이 친이세력의 암묵적 동의 없이는 어렵다는 것을 인식했다는 해석이 있다. 민주당이 차기 대권 주자 부재로 인해 죽을 쑤고 있는 상황에서 박 전 대표가 굳이 딴 살림을 차리기보다는 한나라당의 깃발 아래 안전하게 대권 고지로 가는 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친이세력의 도움을 바라지는 않지만 최소한 자신의 대권가도에 고춧가루를 뿌리지는 않는 정치적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가 사실상 대권 굳히기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철저하게 야당의 포지션을 유지했던 것은 이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통한 확실한 대권 주자 이미지를 심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만큼 위험성이 많은 ‘벼랑 끝 대권 전략’이었다. 그런데 앞으로의 전략은 이 대통령이 비록 실패하더라도 민주당의 대약진 없이는 자신의 집권에 크게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 때문에 사안마다 협조할 것은 협조하는 쪽으로 정리한 것이다. 앞으로도 박 전 대표는 여야의 갈등이 있을 때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 대통령과 보조를 맞추며 같이 갈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가 여당 주류에 대해 ‘조건적 협조’를 하는 쪽으로 대권 전략을 수정한 것은 친이세력도 포용할 준비가 돼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친박 진영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사실 이명박 정권 1년 동안 박 전 대표는 친이세력에 미운털이 많이 박혔다.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박 전 대표는 사안마다 이 대통령의 의중과는 반대로 말하며 척을 졌다. 하지만 이번 입법전쟁이라는 큰 분수령에서 그가 주류의 손을 확실하게 들어줬기 때문에 그동안 친이세력으로부터 쌓인 적개심은 한결 줄어들었다고 본다. 이를 통해 골수 친이세력의 포용은 어렵다고 하더라도 중립 성향의 친이세력을 포용하는 효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도 박 전 대표가 주류에 협조하는 쪽으로 광폭행보를 할 경우 친이세력에 대해서도 ‘무혈입성’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가 이번 입법전쟁에서 여당의 손을 확실하게 들어준 것은 그의 대권 전략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동안 여당 내 야당 역할을 자임하며 험로를 걸었던 것이 ‘박근혜 단독 정권’ 수립이라는 위험하지만 선명한 대권 전략이었다면, ‘이명박 정권 2기’ 수립은 친이세력을 아우르는 비교적 안전한 전략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대목이다. 하지만 지지도가 높지 않은 이명박 정권과 보조를 맞추며 가려는 박 전 대표에게 국민들이 등을 돌린다면 그로서도 또 다른 대권전략을 모색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