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3일 소말리아 해역 파병부대인 청해부대 환송식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 청와대사진기자단 | ||
검찰은 앞으로 이번 사건과 연루된 정치인들을 한 명씩 포토라인에 서게 할 예정이기 때문에 박연차 리스트의 실체도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낼 전망이다. 그런데 정치권에선 검찰의 박연차 리스트 수사는 이명박 대통령의 여권 신(新) 재편 구상과 맞물려 더욱 급박하게 돌아갈 것으로 예상한다. 여권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여권은 △4월 박연차 리스트를 중심으로 한 정치권 사정 △5월 고위급을 중심으로 한 공무원 정밀사정 △6월 청와대·여권 체제개편으로 이어지는 이명박 정권 제2기 신 재편 계획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박연차 리스트 수사를 통해 노리는 여권 재편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지 따라가 봤다.
“이명박 정권의 정치권 사정은 노무현 정권의 그것과 놀랍게도 비슷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집권한 뒤 7~8개월 만인 지난 2003년 9월경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시작해 이듬해인 2004년 3월경에 그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이것은 당시 17대 총선에도 영향을 주었고, 한나라당은 차떼기 당으로 몰려 큰 정치적 곤욕을 치렀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해 6월경부터 촛불정국으로 내몰리면서 휘청거렸다. 하지만 그 사건이 어느 정도 수습된 지난해 9월경부터 이명박 정권은 ‘박연차 리스트’에 대한 본격적인 내사에 들어갔고, 이제 사건의 실체도 올해 3~4월에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권과 노무현 정권의 사정정국 조성의 시기와 방법이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여권 관계자 A 씨의 말이다. 이번 ‘박연차 리스트’를 접하는 여의도 정치권의 반응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라는 분위기다. 역대 정권이 힘을 쓸 수 있는 권력 초기에 ‘통과의례’로 대대적인 사정정국을 조성했기 때문에 현 정권에서도 그것을 피해갈 수 없다는 표현이다. 지난해 9월경 국세청이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의 주변 회사에 대한 세무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맨 먼저 이 리스트를 입수해 ‘내사’를 벌이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물을 먹은’ 검찰과 수사 이니셔티브를 두고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국세청의 자료와 검찰의 내사 자료를 바탕으로 대검 중수부가 직접 수사를 하는, 7개월간의 ‘산고’ 끝에 드디어 그 실체가 하나씩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노무현 정권 당시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2003년 9월경부터 시작해 2004년 3월까지 이어진 것을 감안하면 절묘하게 그 시기가 겹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박연차 리스트’는 집권 초반의 정치적 상황에서 나온 ‘기획수사’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이명박 정권은 집권 초반부터 노무현 정권에 대한 사정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지난해 초 인수위원회에서 활동했던 한 위원은 “이명박 정권의 일각에서는 사실 집권 초반부터 노무현 정권의 비리를 잡기 위해 여러 가지 기획을 했던 게 사실이다. 당시 국정원장을 비롯한 검찰총장 국세청장 등으로부터 전 정권의 비리와 관련된 정보를 입수하려고 노력했다. 이는 주로 소장파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여권 주류와의 권력 갈등이 벌어지면서 집권 초반의 사정정국 조성은 물 건너갔다. 특히 6월 촛불정국으로 이어지면서 노무현 정권 비리에 대한 사정은 더욱 늦춰졌고, 어느 정도 사태가 수습된 9월경부터 본격적인 ‘내사’가 시작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특히 노무현 정권과 집권 이념 자체가 다른 이명박 정권으로서는 더욱 비리에 대한 사정의 필요성을 크게 느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런 이명박 정권의 ‘반 노무현’ 기류가 박연차 리스트 수사로 이어지면서 이제 그 실체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박연차 리스트 수사 드라이브는 집권 2년차로 접어든 현 정권이 정치권과 공무원 사회의 부패 움직임에 대해 던지는 경고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최근 양건 국민권익위원장은 “어느 정권이든 집권 2년차가 되면 부패가 슬슬 드러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지난 21일 검찰이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청탁과 함께 수억 원을 받은 혐의로 ‘대운하 전도사’로 불리던 추부길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을 체포한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이제 이명박 정권은 출범한 지 2년째로 접어들고 있다. 권력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고, 어떤 부서가 어떤 권한이 있고, 가장 중요한 예산은 어떤 사람이 최종적으로 결정하는지 등에 대한 정보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권력층과 공무원들 간의 새로운 친분관계 형성은 유착관계로 발전하고 그들만의 인맥도 형성되면서 권력 네트워크가 한층 공고화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노무현 정권에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을 지낸 이강철 씨의 경우 집권 2년차인 2004년부터 사업가들로부터 거액을 수수하기 시작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 씨가 처음 돈을 챙기기 시작한 것도 집권 1년과 2년 사이에서였다. 이런 점에서 ‘박연차 리스트’ 수사는 검찰의 기획수사 단계를 넘어 전 정권 비리 청산과 함께 집권 2기 부패 움직임에 대한 현 정권의 엄중한 경고 메시지도 함께 들어 있는 복합적인 카드인 셈이다.
청와대와 접촉하는 여권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현재 여권 핵심부는 ‘4월 정치인 사정-5월 고위공무원 정밀사정-6월 청와대 체제 개편’으로 이어지는 이명박 정권 2기의 신 여권 재편 계획을 수립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먼저 4월은 박연차 리스트에 대한 줄줄이 사탕식의 수사 결과 발표가 이어질 것이다. 현재 정치권에는 여야를 막론하고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거액을 수수한 정치인들의 이름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 허태열 한나라당 최고위원의 이름이 흘러나오면서 이번 수사가 ‘친박세력’을 죽이기 위한 표적사정이라는 음모론적인 해석도 나왔다(허 최고위원은 19일 보도자료를 통해 “박 회장과 10년 가까이 만난 적이 없다”면서 “후원금 계좌로 박연차라는 이름의 돈을 받은 일도 없다”고 반박한 바 있다).
한편에서는 박연차 리스트 수사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노 전 대통령이 박 회장으로부터 50억 원을 받은 정황이 검찰에 포착됐고 박 회장의 베트남 현지사업에 도움을 줬다는 얘기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검찰도 이 부분에 대해 수사한다는 보도까지 나왔는데 노 전 대통령 측과 검찰은 일단 모두 부인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 측의 김경수 비서관은 “50억 원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무근이다. 일체의 이권이나 특혜를 준 게 없다”라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검찰 주변에서 흘러나온 ‘노 전 대통령 50억 수수설’은 그 자체만으로 전직 대통령을 압박하고 있다. 특히 이 문제는 향후 수사 추이에 따라 ‘노무현-이명박’ 전·현직 대통령 간의 싸움으로도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실제로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의 50억 수수설은 그 자체로 예사롭지 않다. 그렇게 계속 밀어붙일 경우 노 전 대통령 측의 대대적인 반격이 있을 수 있다. 이 문제는 자칫 전·현직 대통령 간의 돌이킬 수 없는 전면전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검찰이 일단 이 부분에 대해서 발을 한 발 빼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심각한 정치적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 때문이다.
5월의 고위공무원 정밀사정은 총리실 직제개편과도 관련이 있다. 그동안 국무총리실의 공직감찰 및 민정담당 조직은 사무차장 산하에 있었다. 정권 초기 청와대 민정라인 강화에 따라 총리실 민정팀은 거의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하지만 지난 3월 초, 공무원 비리에 대한 첩보 수집 노하우가 탁월한 총리실 민정라인이 다시 부활했다. 민정 보고라인이 사무차장에서 총리실장(장관급) 직속으로 지위가 격상됐기 때문. 공직감찰활동을 하는 공직윤리지원관 및 정무실 소관의 정보관리비서관 업무를 기존 사무차장 소관에서 권태신 국무총리실장 직속업무로 조정해 외부에서 수집되는 정보는 총리실장에게 ‘직보’가 되도록 했다.
향후 총리실은 두 조직의 업무를 유기적으로 결합해 감찰 및 정보수집 기능을 더욱 강화해나갈 예정이다. 애초에 총리실 정무라인이 박영준 국무차장 직속으로 들어갈 예정이었지만 정권 실세에게 너무 권력이 쏠린다는 비판 때문에 일단 박 차장 산하로 가는 것은 무산됐다. 하지만 체제개편은 그렇게 됐어도 박 차장이 총리실 민정라인 운영에도 깊이 관여할 것이란 게 관가의 관측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지위가 격상된 총리실 민정라인은 준비기간을 거쳐 오는 5월경 본격적인 사정작업에 들어가는 것으로 안다. 사실 총리실 민정라인은 공무원 비리 첩보에 관한 한 청와대보다 낫다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 초기 노무현 정권 때 실세 총리였던 이해찬 전 총리의 색깔을 뺀다는 취지 하나로 민정라인을 거의 죽여 버렸다. 그런데 이번에 제대로 복구가 됐기 때문에 향후 고위공무원에 대한 대대적인 정밀사정이 있을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신 여권 재편의 종착역은 오는 6월에 청와대 수석과 일부 장관의 교체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사실 정가에선 올해 초부터 ‘6월 여권 전면 개편설’이 수시로 흘러나왔다. 올 초 일부 장관 교체가 있었을 때 청와대 수석 교체설도 나왔는데 이때 청와대 측은 “이 대통령이 ‘1기 수석을 교체한 지 6개월밖에 안 됐는데 벌써 교체하는 것은 어렵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현 수석의 임기 1년을 채우는 6월을 전후해 청와대를 비롯한 대규모 여권 재편이 있을 것이란 관측이 나온 것이다.
현재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이 대통령이 일부 수석의 보고 때 서류를 보고도 본 체 만 체 하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이 대통령은 일을 잘하는 수석의 경우 현안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으며 ‘못살게’ 구는데 보고 때 조용하게 듣고만 있으면 필히 그 수석의 업무 능력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대통령은 일부 장관의 경우에도 업무 능력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다. 한 장관의 경우 업무보고 때 파워프린트 보고를 그대로 줄줄 읽어 내려가 이 대통령의 얼굴이 굳어졌다는 일화도 있다. 다른 장관의 경우 부연 설명을 하며 해박한 업무 장악력을 보여주는데 그 장관의 경우 아랫사람이 써준 것을 그대로 읽는 수준이라 이 대통령도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다는 게 한 참석자의 전언이다. 이런 일부, 이 대통령의 눈에 찍힌 장관도 6월 여권 재편 때 교체될 것이라는 게 한나라당 일각의 시각이다.
청와대 사정을 잘 아는 또 다른 여권 관계자는 이에 대해 “3월 중 4대 사정기관 수장 가운데 공석으로 남아 있는 국세청장도 임명될 예정이다. 그후 재·보궐선거를 치른 뒤 일부 비경제 부처와 청와대 일부 수석의 개각이 준비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이는 이명박 대통령 집권 2년차의 개혁드라이브를 걸기 위한 포석으로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박연차 리스트’ 수사를 집권 2년차를 맞는 정치적 포석의 중심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언제나 따로 놀아 늘 마뜩치 않았던 정치권을 개혁한다는 명분과, 여권의 비리 척결과 내부 단속을 강화하고, 집권 2년차 개혁 드라이브를 걸기 위한 시동장치로 ‘박연차 리스트’를 꺼내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일방적인 때려잡기 식으로 박연차 리스트를 활용한다면 여야를 막론하고 ‘여의도의 반발’에 부딪혀 자칫 국정이 표류하는 위험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안전운행이 필요한 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