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 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검에서 10시간여의 조사를 받고 귀가하는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 ||
사정 정국이 장기화되면서 수세에 몰렸던 민주당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구명 로비 의혹이 사건의 본질이라며 이른바 ‘천신일 게이트’를 이 대통령의 대선자금과 연계해 대대적인 반격 채비를 갖추고 있다. 검찰 수사가 미흡할 경우 ‘특검’을 강력히 추진한다는 각오다. 박연차 전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 사건이 ‘노무현·천신일 게이트’를 넘어 자칫 ‘대선자금 X파일’ 수사로 확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사정당국 주변에서는 천 회장의 돈이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및 대선자금으로 유입된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만큼 검찰이 2007년 대선자금은 물론 노 전 대통령의 대선잔금과 당선 축하금 등 전·현 정권의 ‘대선자금 X파일’을 비밀리에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란 얘기도 들린다. 노 전 대통령의 사법처리와 맞물려 또 다른 핵뇌관으로 부상하고 있는 ‘대선자금 X파일’ 속으로 들어가 봤다.
''박연차 사건’에서 촉발된 ‘노무현·천신일 게이트’가 절정으로 치달으면서 최종 결단을 앞둔 검찰이 고민하고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가장 큰 난제는 노 전 대통령의 사법처리 수위를 결정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천 회장에 대한 수사를 어느 선에서 마무할지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 혹은 불구속 기소 결정은 이번 사건의 클라이맥스나 다름없다. 검찰이 장고를 거듭하면서 노 전 대통령 사법처리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배경에는 사안의 중대성에 따른 신중론이 자리하고 있지만 정치·사회적 후폭풍과 맞물린 검찰의 말 못할 속사정도 함께 투영돼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물론 보강수사 과정에서 박 전 회장이 노 전 대통령의 딸 노정연 씨에게 40만 달러를 송금한 사실이 새롭게 드러나는가 하면 100만 달러 용처와 관련해서도 노 전 대통령 측의 해명이 뒤바뀌는 등 새로운 변수의 등장도 사법처리 지연의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치권 일각에선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의 사법처리를 미루고 있는 진짜 속사정은 따로 있을 것이란 의혹을 감추지 않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을 구속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나 물증을 찾지 못한 검찰이 노 전 대통령 주변의 또 다른 비리 파일을 은밀히 수사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5월 14일 기자와 만난 대검의 한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 가족들과 측근들을 상대로 한 저인망식 수사에도 불구하고 노 전 대통령을 구속하지 못한다면 검찰의 자존심은 큰 상처를 받게 될뿐더러 ‘표적·기획 수사’라는 역풍에 직면할 수 있다”며 “처음부터 노 전 대통령을 겨냥한 사정이었던 만큼 중수부 수사팀을 중심으로 노 전 대통령을 옭아맬 수 있는 또 다른 비리 파일을 은밀히 수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또 다른 비리 파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관계자는 “참여정부 시절부터 의혹이 끊이질 않았던 노 전 대통령의 대선잔금과 당선 축하금 등 ‘대선 X파일’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당선 축하금 등 대선자금과 관련한 각종 의혹이 불거진 바 있고, 일부는 사실로 드러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2002년 12월 SK그룹으로부터 당선축하금 명목으로 11억 원을 수수한 사실이 드러났고, 여택수 전 청와대 행정관이 2003년 8월 롯데 측으로부터 수수한 3억 원도 당선축하금 성격이 짙었다. 또 노 전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이광재 민주당 의원이 받은 삼성 채권 6억 원 등 대선을 전후해 측근 인사들이 대기업으로부터 받은 후원금은 밝혀진 것만 수십억 원에 달했다. 2003년 검찰의 대선자금 수사에서도 친노 인사들은 삼성그룹에서만 30억 원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던져주기도 했다.
검찰은 2004년과 2005년 두 차례에 걸쳐 노 전 대통령의 당선축하금과 대선 잔금 등에 대해 내사를 벌였지만 모두 ‘내사종결’ 처리했다. 2008년 4월 막을 내린 삼성비자금 특검팀도 삼성의 당선축하금 의혹을 조사했으나 무혐의로 종결한 바 있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노 전 대통령 재임시절에 불거진 대선자금 X파일 사건을 당시 검찰이 손을 대는 데엔 분명 한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 주변에서는 박연차 사건이 ‘노무현 게이트’로 확전된 만큼 이참에 노 전 대통령의 대선자금 의혹도 철저히 파헤쳐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대검 중수부 일각에서는 박연차 사건과 ‘노무현 게이트’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이미 노 전 대통령의 ‘대선자금 X파일’에 대한 수사도 은밀히 진행해 왔다는 소리도 들린다.
대검 중수부는 참여정부 시절 진행된 대선자금 내사 자료와 삼성 특검팀이 건넨 대선자금 관련 수사 자료 등 노 전 대통령의 ‘대선자금 X파일’과 관련한 광범위한 자료 수집과 추적 작업을 병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또 다른 파문을 예고하고 있다.
검찰 주변에서는 2007년 대선 때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의 대선자금에 대해서도 내사가 진행 중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이와 관련해 최근 기자와 만난 검찰의 한 관계자는 “대검 중수부가 정 전 장관과 가까운 A 기업을 내사하는 과정에서 수십억 대의 비자금을 발견하고 이 돈이 정 전 장관의 대선자금으로 유입됐는지 여부를 은밀히 추적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전했다.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의 ‘대선자금 X파일’을 다시 뒤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민주당 관계자들은 그 배경에 강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을 구속할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지 못한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을 확실하게 제압할 카드로 활용하기 위해 대선자금 X파일을 뒤지고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의 대선자금 수사는 곧바로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자금 수사로 확전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검찰이 대놓고 대선자금 X파일을 건드리지는 않을 것이란 관측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로 검찰은 천 회장을 겨냥하면서도 정치권에서 의혹이 제기된 대선자금 부분은 수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살아 있는 권력’과의 전면전은 피하겠다는 복심이 깔려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검찰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야권은 물론 법조계와 시민단체의 비판이 고조되고 있어 검찰 수사 결과에 따라 상당한 후폭풍을 예고하고 있다. 범죄 혐의가 있고 각종 의혹이 제기된 사안에 대해 실체적 진실을 밝혀야 할 의무가 있는 검찰이 자의적으로 수사 범위를 설정하는 것 자체가 지극히 정치적 논리라는 비판이 증폭되고 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검찰이 처음부터 작심하고 대선자금 수사를 진행한 것은 아니었다. SK해운의 비자금 수사 과정에서 정치자금이 드러나자 수사를 확대했고, 급기야 대선자금까지 손을 댄 것이다. 당시 검찰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대선자금을 비롯해 2002년 대선주자였던 이회창 후보와 현직 대통령의 대선자금까지 전방위적인 수사를 전개했다. 검찰 수사 결과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각각 823억 원과 114억 원의 불법 대선자금을 모금한 사실이 드러났고, 검찰은 당시 여권 실세들을 ‘줄구속’시키는 성과를 일궈낸 바 있다.
따라서 법조계 관계자들은 천 회장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대선자금과 관련한 의혹들이 불거질 경우 참여정부 때처럼 성역 없는 수사를 진행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천 회장은 대선이 치러진 2007년에 자사 주식을 비정상적으로 매각해 300억 원대의 비자금을 조성한 의혹을 받고 있고, 이 과정에서 이 대통령의 일부 측근들이 관여한 의혹까지 불거지고 있는 실정이다. 천 회장이 대납한 이 대통령의 특별당비 30억 원을 둘러싼 명쾌한 해명도 나오지 않고 있는 상태다. 민주당은 “이 대통령의 특별당비 30억 원은 엄격히 말하면 대선자금”이라며 이 대통령의 대선자금 수사를 압박하는 동시에 여의치 않을 경우 특검 도입을 강력히 추진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의 사법처리와 현직 대통령의 친구인 천 회장 소환을 앞두고 있는 검찰이 형평성 논란을 잠재우고 ‘성역 없는 수사’에 걸맞은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을지 국민들의 시선이 서초동 검찰 청사로 쏠리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