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일정을 마치고 지난 11일 입국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공항귀빈실에서 마중나온 의원 및 지지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
‘박근혜에 의한 박근혜를 위한 박근혜의 정치’가 2009년 입하의 한국 정국 자화상이다. 박근혜 전 대표는 지난 2004년 총선 때 차떼기 정국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121석(열린우리당 162석)의 ‘기적’을 건져낸 뒤 차츰 정치적 위상을 높여왔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2인자의 설움을 맛봐야 할 시점인 이명박 정권의 2년차에 접어들면서 오히려 대통령을 능가하는 ‘박근혜 파워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표의 진정한 파워는 무엇이고, 한계는 어디까지일지 추적해봤다.
여의도는 남자들 세상이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손이 어스러질 만큼 꽉 잡고 악수하면서 바로 ‘형님, 동생’ 모드로 들어가는, 그런 마초들이 우글거리는 곳이 바로 여의도 정치판이다. 그런 ‘정글’에서 여성 정치인들은 그저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는 액세서리 정도에 불과했다. 선거 때마다 여성 당선자들의 숫자를 굳이 따로 내세우는 것 자체가 남자 중심 구역에 들어온, 이방인들에 대한 차별의 첫 시작이다.
여자들이 수컷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그들과 똑같이 ‘마초화’되는 것뿐이었다. 남장여성으로 의정 활동을 했던 김옥선 전 의원(7, 9, 12대 의원)이 대표적이다. 그 뒤로도 정치에 입문하는 여성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여성성을 최대한 감추고 남자들과 똑같이 경쟁하기 위해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들을 옭아매는 족쇄였다. 인맥 금맥에 휘둘리지 않고 꼼꼼하게 일처리를 하는 여성 특유의 ‘엄정함’도 없고, 그렇다고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며 철저하게 계파의 성을 쌓아 정치적 안전판을 만들어 나가는 남성 특유의 정치력도 없는, 그런 어정쩡한 정치인이 바로 한국 여성 정치인들이었다.
이런 특징 없는 여성 정치인들에 대한 비화는 많다. 여의도의 한 중진 여성 의원은 초선 여성 의원들이 국회에 들어오면 군기를 잡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초선 여성들에게 자신의 옛날 경험을 늘어놓으면서 “이것들아, 남자들 틈에서 살아남으려면 예쁜 척하지 말고 술자리에서도 잘 어울리고 비위도 잘 맞춰줘야 한다”라는 따끔한 충고를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이렇듯 왜곡된 한국 정치 지형에서 여성 정치인은 철저하게 ‘변방’이었다. 그런데 ‘여자’에게는 최악의 생존 조건을 가지고 있는 여의도 정치바닥에서, 최근 나오는 ‘박근혜 만인지상론’은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과연 박근혜의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박근혜의 힘을 분석하기에 앞서 현재 권력의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표 또한 남성 중심의 궤도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또한 여기에 ‘박근혜 파워’의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여성’은 박근혜 힘의 원천인 동시에 한계로도 작용하는 양날의 칼이다.
한나라당 내 대부분의 남성 의원들은 박 전 대표의 정치적 파워를 인정하고 있었으면서도 그가 ‘여자’라는 것에는 쉽게 주파수를 맞추지 못한다. 한 친이 의원은 지난 4·29 재보선 때 친박 후보로 나온 정수성 후보를 비난하면서 “육군 대장이나 했다는 사람이 여자(박근혜 전 대표를 지칭) 치마폭에 둘러싸여 금배지 달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박 전 대표의 정치적 위상보다는 ‘남자가 쩨쩨하게 여자 치마폭에 놀아난다’는 원색적 비난으로 남성의 우월적 지위를 은연중 드러낸 것이다.
한때 대선주자였던 여권의 중견 정치인 B 씨도 한 사석에서 총각 기자를 두고 “결혼을 안 한 사람은 예로부터 한국에서는 인간으로 취급하지도 않았다. 어른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이례적으로 결혼을 안 한 사람에 대해 적대감 비슷한 감정을 내보인 적이 있었다. 당시 기자들은 ‘박근혜 전 대표가 여자인 것도 못마땅한데 결혼까지 하지 않은 것을 꼬집기 위해서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나라당에는 이런 남성 우월 분위기가 상식처럼 퍼져 있다. 영향력 있는 중견 의원들이 ‘예쁜’ 여기자들만 따로 모아 식사를 하는 ‘여기자 모임’ 정치 문화는 지구상에서 ‘여의도’가 유일할 것이다.
한나라당의 또 다른 재선 의원은 “박근혜 전 대표의 정치적 힘은 인정하지만 그가 여자라는 것에는 왠지 불안하고 신뢰가 가지 않는다. ‘한국 정치에서 여자의 시대가 올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앞선다. 200년 민주주의 역사의 미국도 아직 여성 대통령을 배출해내지 못했다. 인종보다 더 큰 편견이 남녀의 성차별일 수도 있다. 박 전 대표가 여성이라는 점은 결정적일 때 국민들의 선택을 주저하게 만드는 치명적 요소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박근혜의 힘’은 바로 이런 남성 위주의 정치판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표는 원칙과 상식을 무기로 계파 중심주의의 ‘마초 분위기’를 정면으로 깨부수려고 한다. 남자들이 불편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명박 대통령이 그와 화학적 결합을 하지 못하는 것도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가로놓인 한국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박 전 대표는 스스로 여성임을 부인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남성 중심의 패러다임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한 정치학자는 이에 대해 “지금 박근혜 전 대표는 남성 중심의 낡은 정치 시스템과 패러다임 경쟁을 하고 있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원칙과 상식’은 ‘형님, 아우’의 마초적 관행을 과감하게 없애고 말 그대로 원칙대로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해석한다. 일부에서는 그것을 ‘바보의 정치’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바보의 정치’가 곧 박근혜의 첫 번째 힘으로 볼 수 있다.
지난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때 참모들이 ‘공·사조직을 총동원해 표를 더 흡수하면 반드시 이긴다’라고 주장했지만 그는 끝까지 무리한 ‘줄 세우기’를 하지 않았다. 당시 경선에서 활약했던 한 캠프 관계자는 “경선에서 지고난 뒤 박 전 대표의 그런 ‘바보 결정’에 대해 원망도 많이 했다. 하지만 지금은 패배하더라도 옳은 길을 가는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결국 이기는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있다. 언젠가는 국민들이 그것을 인정하고 손을 들어줄 것이다. 이것이 박 전 대표의 힘이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의 원칙은 의원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한나라당에 무수하게 얽혀 있는 계파의 이면에는 갖가지 인연이 고리가 채워져 있다. 학연 지연 등으로 1차 연대를 맺은 ‘남자’들이 각종 모임, 술자리 등에서 ‘형님 동생’의 2차 형제 관계로 업그레이드되면서 자연스레 계파가 형성되고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여의도의 그런 관행을 따르지 않고 있다.
지금은 친이 진영에 속한 한 의원은 이에 대해 “남자 식대로 얘기하면 박 전 대표와 좀 친하게 지내기 위해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먹고, 때로는 집에 불쑥 찾아가 개인적 친분도 쌓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게 일체 없었다. 지금도 박 전 대표와 개인적 친분을 쌓은 사람은 여의도에 단 한 명도 없다. 나는 그런 방식이 답답하고 싫어서 박 전 대표와 가까워질 수 없었다. 박 전 대표 또한 구설수에 오를 수 있는 일체의 개인적 행보를 자제해 그를 떠나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게 박 전 대표의 정치 스타일이었다. 지금은 그런 스타일에 맞거나, 애써 맞추고 있는 의원들이 핵심 멤버로서 그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박 전 대표와 참모들 간에 형성된 ‘이성적’ 관계는 부패가 틈입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끊임없이 2인자의 부상을 누르고 탄압했다. ‘비운의 2인자’ 김종필 전 총리가 대표적인 케이스였다. 철저하게 절대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권력 시스템은 참모들이 ‘큰’ 비리에 개입할 틈을 주지 않는 효과가 있었다.
한나라당의 한 중립 성향 의원은 이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은 대한민국 남성 인맥의 결정판이다.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하는 구조의 정점에 그가 있었다. 그것이 ‘고소영’ ‘강부자’ 인사 파문으로 이어졌고, ‘만사형통’ 논란도 지금까지 끊이지 않고 있는 것 아니겠느냐. 하지만 박 전 대표는 그런 점에서 자유롭다. 30년 전 아버지의 죽음으로 이미 권력의 변방으로 밀려난 뒤 온갖 배신과 변절의 경험을 했다. 그런 그에게 무엇이 남았겠는가”라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적어도 박 전 대표만은 ‘기브 앤 테이크’에 익숙한 한국 정치의 부패 고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신뢰와 공감대가 국민들 사이에 점차 폭넓게 형성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박근혜 파워’의 정수이자 정치적 폭발력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정치 제도(특히 남성 중심적인 낡은 시스템)에 실망한 민심은 박근혜 전 대표의 ‘여성성’에 대한 거부감이 엷어지고 있다. 또한 그 여성성은 낡은 제도를 타파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과 동시에 ‘주류=남성=부패’ 이미지와 상반되는 ‘비주류=여성=클린’ 이미지와 결합하면서 그를 ‘선거의 여왕’으로 확대·재생산시키고 있다. 이는 곧 한나라당 ‘남성’ 의원들의 자연스러운 ‘줄 세우기’를 유발시키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박 전 대표가 지원유세 나갔던 장소에 인파가 굉장했다는 말만 나와도 줄을 서지 않은 의원들은 굉장히 초조해진다. 정치인들에게 표는 전부다. 그런 얘기 듣고 난 뒤 싫든 좋든 박 전 대표에게 눈도장이라도 받을 요량으로 최대한 줄을 댄다. 지금은 친박그룹이 50여 명 정도 되지만 10월 재보선에서 다시 박 전 대표의 ‘표심’이 확인되면 그때는 지금보다 2배 이상 더 파워가 생길 것이다. 내년 지방선거 때까지 가면 중립성향 초선들의 참여로 지지 의원이 100명도 훌쩍 넘을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박 전 대표 본연의 강점이랄 수 있는 원칙 중시, 낡은 정치 패러다임에 대한 도전의식은 이명박 대통령의 ‘실정’에 대한 반사이익이라고 깎아내린다. 박 전 대표가 실질적인 힘을 가지게 되고 동시에 그 책임도 함께 지는 상황이 오게 되면 그에 대한 현재의 ‘평가’도 거품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또한 선거 여왕의 영향력도 ‘본선’(대선 후보 경선이나 대통령 선거 등의 큰 선거)이 아닌 ‘예선’(주로 총선이나 재·보궐 선거)에서 주로 입증된 것이라 ‘큰 게임에 강한 점을 보여줘야 하는’ 숙제가 남아 있다. 여기에 박 전 대표는 지금까지 야당의 수장으로 ‘대안 없는 공격’에 집중했고, 집권여당에서는 제2인자로서 핍박받는 이미지로 자신의 ‘파워’를 확인한 것일 뿐, ‘진정한 박근혜 브랜드가 없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지금 박근혜 전 대표는 2인자로서 너무 높이 올라가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올라갈 것이다.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을 만큼 높게 오른 표적은 그만큼 맞추기도 쉽다. 여의도의 ‘마초’들은 바로 그것을 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