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라는 말을 남긴 노 전 대통령은 자살이라는 마지막 승부수를 통해 영원히 사는 승자로 남고 싶어 했다. 그는 자살을 통해 ‘내 비리는 죽음으로써 갚는데 당신들 비리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무언의 메시지를 여권 핵심부와 이명박 대통령에게 던진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은 검찰의 십자포화에 끝내 쓰러졌지만,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된 여권 핵심 실세의 의혹을 ‘뭉개고’ 있는 검찰과 현 정권에 죽으면서 수류탄을 던진 꼴이 됐다. 10년 이상 이어져 온 두 사람의 숙명적인 대결사를 따라가 봤다.
두 번째 두 사람이 마주친 것은 그로부터 6년이 흐른 뒤였다. 지난 2002년 6월에 이 대통령은 서울시장에, 노 전 대통령은 12월 대통령 선거에 각각 당선된 뒤 또 다시 여야의 ‘간판 주자’로서 대립했다. 당시 두 사람은 신행정수도 건설 저지와 추진을 명분으로 사사건건 충돌했다. 이 시장은 서울특별시장으로서 관례로 돼 있던 청와대 국무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할 만큼 견제를 받았다.
두 사람의 자존심 싸움이 극에 달했던 시기는 이 대통령이 한나라당의 대선 주자로 확정된 뒤부터였다. 진보-보수를 대표하는 두 사람의 정책은 글자 하나도 일치하는 게 없을 정도로 달랐다. 하지만 이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의 공통점도 하나 있었다. 바로 상대방의 ‘정치적 실체’를 절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이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에 대해 “통치와 경영 시스템을 전혀 모르는 아마추어일 뿐”(2005년 10월 기자간담회에서)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노 전 대통령 또한 이 대통령에 대해 “기본적 정치철학이 결여돼 있는 장사꾼일 뿐”(친노 의원들이 주로 말하는 평가)이라는 시각을 지니고 있었다. 서로 “내가 하면 그렇게 서투르게 하지 않겠다” “내가 하면 철학도 없이 되는 대로 하지는 않겠다”라며 으르렁거렸다.
두 사람의 은근한 기 싸움을 전하는 일화 한 토막.
노 전 대통령은 지난 2007년 6월 원광대 명예박사 수여식에 참석한 자리에서 “오늘 학위수여장 보니까 ‘명박’(명예박사)이라 써 놨던데, 제가 ‘노명박’이 되는가 싶어 갖고…. 이명박 씨가 ‘노명박’만큼만 잘하면 괜찮다”라며 당시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를 자극했다. 이에 대해 이 후보는 언론 인터뷰에서 “노 대통령이 할 일은 안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에 전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받아쳤다.
이렇듯 두 사람의 라이벌 의식은 깊었고, 그 긴장관계는 이명박 정권 들어서도 계속됐다. 두 사람은 청와대 기록물 반입 논란을 거치면서 시종일관 기 싸움을 벌였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이 ‘봉하마을 연설’을 통해 이 대통령의 미숙한 ‘통치’에 대해 날카로운 공격을 퍼붓자 청와대는 노 전 대통령의 정치 재개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박연차 게이트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정치권에선 보고 있다. 검찰의 기획수사 논란도 바로 여기에서 발화하고 있다.
사실 이 대통령으로서는 1996년 종로 선거에 이어 2007년 대선에서도 당선돼 노 전 대통령과의 대결에서 2전2승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번 박연차 게이트라는 마지막 전쟁도 노 전 대통령의 ‘숨’을 거의 끊어 놓았다는 점에서 이 대통령의 일방적인 승리로 귀결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반격은 상상은 초월하는 수로 나타났다. 그는 ‘자살’이라는 마지막 승부수를 던졌다. 궁지에 몰린 그의 가족들을 살리는 동시에 그에게로 겨눠졌던 박연차 게이트의 칼날을 ‘이명박 세력’으로 되돌려 마지막 전쟁의 승자가 되길 원했던 것이다.
당장 검찰은 박연차 게이트에서 노 전 대통령과 관련된 모든 수사를 중단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노 전 대통령이 자신의 죽음으로써 노렸던 비수는 이명박 대통령과 그의 핵심 측근들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묻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된 여권 실세에 대한 특검 이야기가 오르내리고 있다. 검찰 또한 여권 핵심들을 모조리 밝혀내지 못할 경우 국민 정서상 엄청난 역풍을 맞게 될 것이다.
▲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봉하마을 분향소를 찾은 친노 인사들. 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
이 글은 2008년 10월 25일 작성되었는데 당시는 대검 중수부가 박연차 게이트에 대한 수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무렵이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은 박연차 게이트가 자신에게 직접 향하는 것을 직감했다. 그래서 그 글을 통해서 ‘정치보복 당할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이 대통령이 자꾸 언급하는 것을 보면 뭔가 꾸미는 것이 있지 않을까’ 의심을 했던 것 같다. 그의 예감은 결국 글 작성 한 달 반 뒤 노건평 씨 구속으로 점점 현실화되었다”라고 말했다.
사실 박연차 게이트와 관련해 검찰이 노 전 대통령과 그 가족들을 이 잡듯이 뒤지는 것을 두고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검찰이 개인사까지 들춰낸 것은 너무 심했다”라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당시 한나라당의 한 핵심 관계자는 “‘박연차-노무현’은 너무나 오래된 동지적 관계다. 서로 돈 있으면 맡겨 놓고 없으면 가져오는 그런 사이다. 자기들끼리는 그것이 감성적으로 불법이라는 개념이 없다. 나도 정치를 오래했지만 그런 돈 거래는 통상적으로 늘 이뤄지고 있는 일이다. 박연차 게이트 수사에서 노 전 대통령에 대한 부분은 여권이 확실히 너무 멀리 나간 것이다. 지금 노 전 대통령을 압박한다고 해서 정치적 실익이 뭐가 있겠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여당 내부에서조차 ‘도를 넘어선’ 것으로 봤던 여권의 무리한 수사는 결국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불렀다. 이를 계기로 정치권에서는 ‘앞으로 정권만 바뀌면 되풀이되는 정치보복 관행도 사라져야 한다’라는 공감대가 점차 확산될 전망이다.
노 전 대통령은 또한 ‘자살’을 통해 이명박 대통령에게 ‘일방주의식 통치 방식’에 대한 경고도 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여권은 지난해 초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소장파가 밀려난 뒤 강경파가 득세하고 있는 상황이다. 핵심 실세들의 입에서 ‘좌파척결’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올 정도라고 한다. 소장파의 한 의원은 이에 대해 “현재 이명박 정권의 주류들은 ‘엄정한 법 집행’을 구실로 각종 시위에 대한 강경 대응을 계속하고 있다(용산 철거민 화재 사건이 대표적). 또한 인터넷 여론을 의도적으로 통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등(미네르바 구속 사건) 전반적으로 이명박 정권이 독재권력화·공안정국화되고 있는 듯하다. 대선 때의 압승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아직까지 ‘철권통치’의 신기루를 주고 있는 것 같다. 사회의 민주주의 분위기가 옛날 공안정국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느낌까지 든다”라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대화와 타협을 거부하고 이처럼 일방주의로 치닫는 이명박 정권에 전반적인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진보진영의 한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은 참여와 토론, 인내를 통한 시민의식의 성숙 등 자신이 소중히 여긴 민주적 가치관이 이명박 정권 들어 무너지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프지 않았을까 한다. 그는 우리 사회에 퍼지고 있는 ‘이명박식 독재’에 대해 죽음으로 항거한 셈이다. 우리 사회도 노 전 대통령의 죽음으로 ‘노무현식 민주주의’에 대해 다시 한 번 되돌아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무현이즘’에 대한 재고찰은 ‘이명박이즘’에 대한 필연적인 반성과 변화, 굴욕을 주문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노 전 대통령은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자신의 최후 승리를 이끌어내려 했던 게 아닐까.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