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리커처=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한국 정치사에 유례가 없는 전직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대형사건’은 대권 주자들의 대선 전략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차기 대권 주자들은 ‘노 전 대통령 서거 여파’를 예의주시하면서 순풍에 편승하거나 역풍을 피해가기 위한 셈법에 바쁜 모습이다. 과연 각 잠룡들에게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여파는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이들의 대권 기상도를 점검해 보았다.
노 전 대통령 서거 후폭풍으로 한나라당 지지율이 하락세를 보인 것처럼 박근혜 전 대표도 대권주자로서 타격이 적지 않은 모습이다. 노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의례적 멘트 외에 최근 별다른 정치적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있는 박 전 대표의 ‘침묵 모드’에는 깊은 고민이 담겨 있다는 분석이다. 대권주자 중 ‘독보적’ 지지율을 기록해오던 그에게도 ‘조문정국’의 여파는 자칫 위기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는 상황. 여파를 예측할 수 없는 안개가 드리워져 쨍쨍하던 햇빛을 가리고 있는 형국이다.
지지율만으로 평가하자면 박 전 대표가 잠룡들 중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으로 분석된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실시된 리얼미터의 두 차례 여론조사에서 박 전 대표의 지지율은 두 번 연속 급격하게 하락했다. 5월 19일 조사에서 41.1%였던 데 반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인 26일 조사에서는 이보다 5.9%p 하락한 35.2%를 기록했고, 6월 3일 조사에서도 5.2%p 더 내려간 30.0%를 기록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시점 이전에 비해 무려 11.1%p나 급락한 것.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한나라당 내에서는 당 개혁 논의가 이어지고 있어 박 전 대표가 앞으로 취하게 될 스탠스가 주목된다. 최근 당내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지도부 사퇴론과 조기 전대 개최 주장에 대해 박 전 대표 측은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조기 전대론’에 부정적 입장을 보이고 있는 박 전 대표로서도 당의 위기 상황에서 계속해서 ‘뒷짐’만 지는 것은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 맨 위사진부터 아래순서로 정몽준, 이재오, 정동영, 손학규 | ||
하지만 노 전 대통령 서거 역풍을 계기로 한나라당 내에서 일고 있는 ‘새 판 짜기’ 기류가 그에게 부정적으로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당 지도부 사퇴가 이뤄져 조기 전당대회가 소집될 경우 리더로서 정체돼 있는 자신을 다시 한 번 시험대 위에 올리고 외연을 넓히는 기회를 만들 수도 있다. 한나라당 주자 중 박 전 대표에 이어 지지율 2위를 기록하고 있으나 박 전 대표의 독주에 ‘아웃사이더’로 머물 수밖에 없었던 정 최고위원에게 ‘조문정국’의 여파가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열어준 셈이다.
정치권에서 한 발 물러나 있는 이재오 전 최고위원은 최근 정국에서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대권주자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당내에서 불고 있는 조기 전대론은 이 전 최고위원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그러나 친박계가 이 전 최고위원에 대해 강한 반발심을 보이고 있는 만큼 그의 정치일선 복귀 행로엔 언제나 산발적 소나기가 내릴 가능성이 크다.
이 전 최고위원의 경우 오는 10월 재보선을 통한 정계복귀가 점쳐져 왔으나 현재로선 이 시나리오의 성사 여부도 불투명하다. 6월 18일 열리는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에 대한 항소심 및 향후 대법원 선고 결과에 따라 이 전 최고위원의 터전인 서울 은평 을 재보선 실시 여부가 결정될 예정. 하지만 재보선이 열린다고 하더라도 노 전 대통령 서거 후폭풍으로 인해 이 전 최고위원의 승리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 지역에는 김근태 전 의원,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등의 출마설도 나돌고 있어 치열한 접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선거에서 두 번 연속 패배할 경우의 부담도 고려해야 하는 상황인 데다, 당내 친이 대 친박 갈등이 향후에도 계속될 가능성도 커 이 전 최고위원의 행보는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4월 재보선을 통해 화려한 복귀에 성공한 ‘무소속’ 정동영 의원의 경우 노 전 대통령 서거로 인해 역풍을 맞아 향후 행로에 ‘흐리고 구름이 낀’ 상태다. 정 의원은 노 전 대통령 지지자들의 반대로 노 전 대통령의 빈소에 조문하러 갔다가 되돌아오기도 했다. 정 의원은 지난 대선 당시 “노무현 정부와 확연히 다른 정부를 만들겠다”며 참여정부와의 차별화를 선언했었다. 열린우리당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선거유세를 했던 정 의원의 ‘변심’에 대해 일부 노사모 회원들은 ‘배신자’라며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난 재보선 승리로 ‘쨍쨍한 햇살’을 받았던 정 의원으로선 노 전 대통령 서거 역풍으로 인해 된서리를 호되게 맞고 있는 셈이다. 리얼미터 조사 결과 정 의원의 지지율 역시 12.3%(5월 19일)→11.8%(5월 26일)→9.7%(6월 3일)로 최근 하락세에 놓여 있다.
4월 재보선 당시 ‘백의종군’하다가 칩거지인 춘천으로 돌아갔던 손학규 전 경기지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다시 잠시 ‘세상 속’으로 돌아왔다. 서거 다음 날인 5월 24일엔 봉하마을 빈소를 찾았고 이어 서울역 분향소에서 장례기간 동안 조문객을 맞기도 했다. 손 전 지사는 친노 인사들에 가려 ‘조문정국’에서 큰 주목을 끌지 못했으나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는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손 전 지사와 노 전 대통령의 관계는 평탄치만은 않았었다. 손 전 지사가 2007년 한나라당을 탈당했을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를 강도 높게 비판했고, 또 2008년 대통합민주신당 대표 시절 정부조직법 개편안에 대한 대통령 거부권 행사문제를 놓고 노 전 대통령과 의견을 달리하며 마찰을 빚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장례기간 중 묵묵히 분향소를 지켰던 손 전 지사의 마음에도 지난 세월이 스쳐갔을 것으로 보인다.
▲ 캐리커처=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노 전 대통령 서거 정국에서 가장 크게 주가가 상승한 이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다. 리얼미터의 6월 3일 조사에서 유 전 장관은 16.1%를 얻어 박근혜 전 대표에 이어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 2위를 차지했다. 유 전 장관은 차기 서울시장 후보 지지도 조사(6월 1일 중앙선데이)에서도 16.5%로 오세훈 현 서울시장(27.8%)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유 전 장관은 노 전 대통령의 장례식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었다. 격하게 통곡하며 슬퍼하는 그의 모습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또다른 노무현’을 보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유 전 장관뿐 아니라 공동 장의위원장을 맞은 한명숙 전 총리 역시 조문정국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국민장 당일 한 전 총리가 토해낸 추도사는 많은 국민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한 전 총리의 이 같은 친 노무현 이미지 때문인지 서울시장 후보 지지도 조사(중앙선데이)에서 7.7%를 기록해 관심을 끌기도 했다. 역시 친노 인사인 강금실 전 장관도 9.2%로 3위에 올라섰다.
하지만 ‘노무현 서거 효과’가 얼마나 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민주당이 서둘러 친노 인사들에게 호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도 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것이 아니라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인물난’에 시달리고 있는 민주당이 친노 인사들에게 계속해서 구애의 손짓을 할 가능성은 크다. 당분간 친노 인사들의 대권 기상도에는 맑은 날이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