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깝고도 먼 사이 지난 11일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박희태 대표(앞쪽)와 원희룡 쇄신특위 위원장이 회의를 경청하고 있다. | ||
그런데 소장파들은 “박 대표의 노회한 협상 기술에 원 위원장이 ‘낚이면서’ 모든 정풍운동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더 나아가 소장파 일각에서는 박 대표와 원 위원장 간의 만남 뒤에 ‘보이지 않는 손’이 개입돼 결국 쇄신 움직임이 권력에 의해 초기에 ‘진압’됐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물론 쇄신특위가 6월 말까지 단일안을 도출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추동력을 급격하게 상실해가고 있는 쇄신특위에 대한 당 안팎의 기대가 점차 사라져가는 분위기다. 비주류 소장파 중심의 한나라당 쇄신작업이 ‘진압’ 위기에 몰린 내막을 들여다봤다.
“암환자를 눕혀 놓고 종기수술 하려 칼 들고 달려드는 꼴이다.”
한나라당의 쇄신특위 출범을 지켜보던 소장파의 한 관계자가 한 말이다. 쇄신특위가 시작 단계부터 문제의 핵심에서 빗겨가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현재 일반국민들은 한나라당의 쇄신특위가 어떤 활동을 하는지, 그곳에서 논의되고 있는 중요한 쟁점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또한 대부분 관심도 없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 정권 출범 뒤부터 지금까지 국민과 함께 호흡하며 어깨를 걸고 같이 가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소 끌고 가듯 자신의 길만을 고집하는 행보를 거듭하자 그에게서 민심이 급속도로 떠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점에서 한나라당이 현재 추진 중인 쇄신활동의 핵심은 국민을 소 끌듯 끌고 가는 이 대통령의 일방주의식 국정 운영 스타일에 대한 전반적인 스크린과 이를 토대로 한 당·정·청의 쇄신을 청와대에 주문하는 것이어야 했다. 하지만 쇄신특위는 이명박 정권이 앓고 있는 중병에 대해 분명하게 메스를 들이대는 것이 아니라 조기전당대회 개최, 박희태 대표 사퇴 요구나 박근혜 전 대표 추대론 같은 통증의 완화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그 부작용은 결국 정풍운동의 소멸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사실 이번 쇄신활동은 소장파가 명분을 쥐고 가는 게임이기 때문에 투쟁 강도에 따라 그들이 권력의 전면에 나설 수도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그래서 정태근 의원 등은 연판장 돌리기, 국회 앞 천막 농성 등의 강공책을 구사하며 박희태 대표를 압박했다. 그런데 지난 6월 8일 박희태 대표와 원희룡 위원장 간의 ‘회동’이 있은 뒤 쇄신특위는 갑자기 ‘회군’을 발표했다. 쇄신특위가 박희태 대표의 조건부 사퇴와 ‘박근혜 전 대표 역할론’을 전제로 한 ‘화합형 조기 전당대회’ 카드를 수용한 것이다. 이에 개혁성향 초선모임 ‘민본21’, 친이 소장파의 ‘7인 기자회견 모임’ 등도 ‘6월까지’란 시한을 걸었지만, 일제히 투쟁 잠정 중단을 선언했다.
이를 두고 정치권 일각에서는 ‘쇄신활동이 초기에 박 대표에게 진압당했다’라는 평가가 잇따랐다. 소장파는 “주먹 한번 뻗어보지도 못했는데 기권 타월을 던진 꼴이 됐다”라며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소장파 내부에선 이번 ‘6·8 회군’의 원인을 정확하게 규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먼저 원희룡 위원장 책임론이 나오고 있다. 원 위원장이 박 대표와의 만남에서 그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않은 채 너무 확대해석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노회한’ 박 대표에게 ‘순진한’ 원 위원장이 보기 좋게 ‘낚인’ 것이라는 평가까지 한다. 박 대표는 지난 8일 원 위원장에게 화합 전대를 포함한 정치일정을 담은 쇄신안을 마련해 최고위에 넘기면 전폭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원 위원장은 이를 두고 박 대표가 조건부 사퇴를 수용한 것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여기에 양측의 온도차가 있다. 박 대표는 ‘박근혜 전 대표가 화합 전대에 출마하면 사퇴하겠다’라는 뜻을 전달했다. 하지만 현재로선 박근혜 전 대표가 전대에 나설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박 대표가 퇴진할 수 없다고 버티는 것도 이런 전제조건이 충족돼야 물러날 수 있다고 분명히 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런데 원 위원장은 여기에서 ‘실수’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거의 불가능한 ‘화합형 대표(박근혜 전 대표) 추대론’을 관철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 박희태 대표의 사퇴 카드를 받아들인 것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원 위원장이 화합형 대표 추대론을 받아들인 것은 실수라고 보기엔 너무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박 전 대표가 이번 쇄신정국에서 절대 나서지 않을 것이 명백한데 박희태 대표 퇴진이라는 결과물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정작 불가능한 것을 먼저 받아들였다”라고 말했다.
‘6·8 회군’의 또 다른 배경으로 원 위원장이 처음부터 ‘소신 없이’ 박근혜 전 대표나 이재오 전 최고위원 등 당의 대주주들 눈치를 너무 보았다는 주장도 있다. 소장파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원 위에게 이번 쇄신정국은 차기 주자로 뛰어오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이쪽저쪽 눈치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그러다 결국 ‘만만한’ 박희태 대표 퇴진에만 매몰됐다가 ‘회군’ 결정까지 한 것 같다. 그런데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의원직을 걸고 끊임없이 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 기조 쇄신이라는 메시지만 던졌다면 문제는 달라졌을 것이다. 쇄신운동이 실패했다고 하더라도 그에게는 ‘이 대통령에게 용감하게 맞섰던 젊은 정치인’이라는 ‘훈장’과 함께 차기 주자로의 도약 기회가 주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말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원 위원장이 쇄신정국을 통해 차기 주자로의 부상을 꿈꾸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그런데 이런 ‘사심론’은 “원 위원장이 당의 핵심 주류와 ‘소통’하고 있다”라는 의혹으로까지 이어지고 있어 논란이 일고 있다. 쇄신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소장파의 한 핵심 관계자는 “최근의 ‘6·8 회군’을 보면서 소장파 일부에서는 원 위원장이 핵심 실세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컨트롤되고 있지 않느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또한 이 관계자는 “원 위원장이 애초 쇄신특위에 뽑힐 때부터 생각해 보라. 당 주류인 원로그룹의 전폭적인 지원 없이 그가 위원장직에 오를 수 있었겠느냐. 여권 주류와 철저하게 척이 진 정두언 의원이 그 자리에 앉았다고 생각해보라. 쇄신활동은 분명 지금과는 다르게 전개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권 모 실세가 원 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중립적으로 잘해보라’는 말을 왜 했겠느냐. 젊은 이미지에다가 위의 말을 잘 듣는 원 위원장이 그에게는 쇄신특위를 맡을 적임자로 보였을 것이다. 지난 8일 박희태 대표와의 회동을 전후해서도 원 위원장이 모 실세와 사전 논의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원 위원장이 박 대표의 제안을 덜컥 수용했겠느냐. 이런 의혹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앞으로 원 위원장은 사심 없이 쇄신특위 활동을 해서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해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원 위원장은 일각에서 제기하는 ‘사심론’을 의식해서인지 최근 쇄신운동의 초점을 청와대의 국정쇄신 주문으로 전선을 단일화하고 있다. 조기전당대회 개최나 지도부 퇴진은 계파 간 갈등만 조장할 뿐 실익이 없다는 판단 아래 쇄신특위의 모든 역량을 이명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 기조 변화를 주문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사실 ‘6·8 회군’의 책임이 전적으로 원희룡 위원장에게 있다는 지적에 대해 그로서는 억울한 측면이 있다. 먼저 지난 2005년에는 당 혁신위원장이었던 홍준표 의원이 비주류였지만 박근혜 대표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과감하게 단일안을 밀어붙일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친이-친박의 대결 구도가 거의 없었고, 정권 교체라는 한 가지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이해관계가 작용할 공간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전혀 다르다. 당이 친이와 친박의 프레임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원 위원장의 정치력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쇄신특위 내에서 원 위원장을 ‘사심 없이’ 지원해줄 세력도 없다. 대부분의 특위위원들이 친이·친박 그룹의 대표자로 나와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정치적 입지가 약한 원 위원장이 기댈 언덕은 거의 없다. 일부 의원들은 “원 위원장이 풀려고 하는 매듭은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가 머리를 맞대고 풀지 않는 이상 힘들다. 청와대는 원 위원장의 특위 활동에 대해 무시하는 경향이 지배적인 것으로 안다. 친박 그룹도 그가 자신의 정치적 이득 때문에 박 전 대표를 이전투구 판에 끌어들이려 한다며 비판적인 자세다. 이렇듯 원 위원장은 친이와 친박의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진 꼴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한편 한나라당 일각에서는 이번 쇄신활동은 처음부터 단일안을 도출해내기 힘들었다는 점에서 원 위원장에게 그 덤터기가 씌워지고 있다는 해석도 있다. 이는 쇄신특위를 이끌고 있는 소장파들의 알력에서 비롯된다. 이번 쇄신운동은 김성식 의원이 이끄는 민본21, 정두언 의원이 이끄는 7인 성명파, 친 이재오 일부 그룹 등 다양한 계파가 주도권 경쟁을 벌여 단일대오를 형성할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6·8 회군’도 원 위원장의 책임이라기보다 단일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쇄신특위의 태생적인 한계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의미 있는 결론을 내릴 자신이 없었던 쇄신특위의 다양한 계파가 원 위원장의 실수 뒤에 숨어 그 책임을 회피하려는 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또한 청와대의 강경한 자세도 ‘소장파의 회군’을 부추기는 계기가 됐다는 지적이다. 소장파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지난 2005년 당시 혁신위의 결정은 박근혜 전 대표에게 매우 불리한 것이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결국 그 후유증이 경선 패배로 이어졌다는 평가도 있다. 전례대로라면 이 대통령 역시 당 소장파들의 충정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 대통령에겐 전혀 그럴 의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좌절을 많이 느낀다. 차라리 이 정권의 끝을 기다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동안 정풍운동을 해봤지만 이번만큼은 큰 벽에 주먹만 치는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쇄신정국에서 무책임한 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사실 청와대 정무라인은 쇄신정국에 대해 철저하게 방관자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당에서 어떻게든 단일안을 가지고 오면 그때 가서 검토해보겠다. 우리가 이러쿵저러쿵 관여하면 분명히 역풍을 맞는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당이 친이-친박의 강건한 프레임에 묶여 있는 이상 단일한 쇄신안을 만들기 힘들 것’이라고 정세판단을 하고 있는 청와대가 쇄신특위에 단일안을 들고 오라는 것 자체가 논리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청와대는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는 소장파의 쇄신활동도 결국 자체 소멸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점에서 ‘6·8 회군’은 청와대의 예상이 맞아떨어지는 첫 번째 징후로 해석된다.
한나라당 소장파의 ‘6·8 회군’은 거대 여당이 현재 처해 있는 위기 상황을 그대로 노정한다. 자기 변화의 최전선에 있는 젊은 소장파마저 계파 갈등과 무소신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냈다는 점에서 ‘누가 누구를 쇄신해’라고 꾸짖는 원로그룹 앞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자꾸만 오그라들고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