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 | ||
그럼에도 “매는 앉아서 조는 듯하고, 호랑이는 병든 듯 걸어간다”는 좌우명처럼 그는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유연한 대처능력을 보여 왔다. 이런 그의 잠재력은 10월 재·보궐 선거에 도전하는 든든한 배경이 되고 있다. ‘후반기 국회의장’이라는 자신의 마지막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10월 재·보궐 선거에서 꼭 승리해야 하는 박희태 대표의 ‘무한도전’을 따라가 봤다.
박희태 대표는 최근 여권 원로그룹의 핵심 A 씨와 회동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다. 두 사람은 박 대표의 요청으로 서울 모처에서 저녁식사를 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A 씨는 박 대표에게 ‘정권에 대한 야당의 집중적인 공세 표적이 될 것’이라는 등의 논리로 출마 자제를 권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출마를 하더라도 대표직을 내놓고 출마하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도 했다고 한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두 사람의 회동에 대해 “A 씨는 공천에 떨어진 박 대표를 여당 핵심부에 재진입시킨 장본인이다. 그런데 정치 상황이 급변하면서 이번에는 박 대표의 재·보궐 선거 진입을 막는 걸 보니 권력무상이 정말 실감 난다”라고 말했다. 이명박 정권 출범 초기 때만 해도 박근혜-이재오-정두언 그룹이 치열하게 권력 갈등을 빚을 때였기 때문에 온건합리주의자인 박희태 대표의 여권 내 활용도도 높았다. 하지만 ‘당내 권력 구도가 어느 정도 안정된 상태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정권 2기를 맞아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추동해주기 위해선 추진력 있는 당 대표가 필요하다’는 현실론이 대두되면서 박 대표의 ‘위상’도 떨어진 게 사실이다.
여기에 박희태 대표는 박근혜 전 대표에게도 내심 서운한 감정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재보선 필승을 위해 박 전 대표의 유세 지원을 강력하게 원하고 있다. 하지만 박 전 대표 측은 ‘재·보궐 선거 지원 금지’ 원칙을 이번에도 그대로 이어갈 것이라고 한다.
특히 박 대표는 지난 총선 공천 때 탈락했던 친박 성향의 시·도당 위원장 복당을 적극 추진하는 등 자신의 재보선 준비를 위해 착실하게 친박그룹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해왔다. 그가 출사표를 던지려는 경남 양산의 경우 친박계의 유재명 전 해양연구원 책임연구원이 지난 18대 총선 때 친박 무소속 후보로 나와 30%가 넘는 득표율을 보인 곳. 박 대표로선 친박 진영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친박세력의 복당 등을 과감하게 추진했다는 시각은 그래서 나온다. 그런데 박 대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박근혜 전 대표의 차가운 ‘원칙 고수’라는 대답뿐이었다.
여기에다 친이그룹 내에서 박 대표와 사촌뻘 되는 친 이재오계가 계속해서 ‘대표직 사퇴 후 재보선에 도전하라’는 매정한 요구를 하는 것도 그를 점점 고립무원으로 몰고 가고 있다. 특히 이명박 대통령도 박 대표와의 회동 뒤 ‘사진 좋게 나오게 찍어 주라’는 덕담을 하기는 했지만 “당에서 알아서 해라”는 정도의 언질만 준 것이 사실상 그의 출마에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물론 박 대표 측은 “공식 발언을 알 수는 없지만 (이 대통령이) 박 대표의 양산 출마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답변을 한 것은 분명하다”라고 밝히고 있지만 당 주변 해석은 분분하다.
특히 공성진 최고위원은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이 박 대표로부터 재선거 출마 결심을 듣고 당에서 상의해 잘해 달라고 한 것은 가타부타 관여하지 않겠다는 불개입 천명으로 봐야 한다”라고 해석했다. 여당 대표라는 상징적 존재가 재보선에 출마하겠다는 것에 대한 대통령의 대답치고는 너무 형식적이기 때문에 ‘반대’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라는 설명도 하고 있다.
이런 어려운 상황 때문인지 당 일각에서는 “박 대표가 ‘지지도 저조’를 이유로 막판에 공천에서 탈락하는 것으로 상황이 정리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 대신 주중대사 등 낙천 뒤 인센티브를 보장하는 쪽으로 여권 수뇌부가 교통정리를 이미 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여기에 박 대표와 후반기 국회의장직을 다툴 경쟁자들인 안상수 원내대표와 홍사덕 의원도 물밑에서 그의 도전에 태클을 걸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이런 점을 놓고 보면 박희태 대표에게 이번 재보선 도전은 첩첩산중이다. 지금의 형국에선 박 대표가 ‘졸고 있는 매’이거나 ‘병이 든 듯이 걷는 호랑이’처럼 보인다. 특히 늘 조는 듯 앉아 있는 그의 모양새를 두고 붙은 ‘여섯 시 오 분 전’이라는 별명도 요즘 같은 어려운 정치 상황에서는 ‘6시 은퇴 오 분 전’이라는 우스갯소리로 바뀔 판이다.
하지만 박 대표의 정치 열정은 대단하다. 늘 조는 듯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던지는 한마디는 여당 최장수 대변인 출신다운, 정국 흐름을 예리하게 분석하는 매서움이 엿보인다. 특히 당내 친이-친박을 두루 넘나드는 폭넓은 인맥과 두루뭉술한 성향이 결국 그를 양산 재선거 출마로 이끌 것이라는 낙관적 평가도 있다. 지금 박 대표가 궁지로 몰려 있지만 ‘궁즉통’이라는 말처럼 결국 돌파구를 찾을 것이라는 견해도 적지 않다.
이런 ‘유연한’ 성향 때문인지 박 대표가 이재오 전 최고위원의 당 복귀를 대하는 태도가 최근 변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재보선 출마 이야기가 본격화되기 전만 해도 박 대표는 이 전 최고의 복귀에 대해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라며 유보적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최근 친 이재오계에서 그의 대표직 사퇴와 출마를 연계하자 이에 대한 반대급부를 제시한 것이 이 전 최고 복귀와 박 대표의 재보선 출마 ‘빅딜설’로 이어진다. 최근 기류로 볼 때 이 빅딜은 성사 가능성도 엿보인다. 박 대표가 최근 이 전 최고의 복귀에 대해 “내 생각엔 오히려 당 화합과 통합을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긍정적 신호를 보내자 친 이재오계에서도 “여당대표까지 지낸 분에게 공천을 안 주면 국민이 보기에 이상하지 않겠냐”는 분위기로 돌아서고 있다.
지난 8월 14일 박 대표는 양산에 있는 통도사를 방문했다. 그는 당시 부인과 양산에서 처음 만났던 일화를 배경으로 해서 “제가 양산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저희 부부는 부처님의 가호로 양산에서 태어났다”며 지역 연고를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눈물겨운 구애’에도 불구하고 김해에 비해 발전이 상당히 뒤처진 양산의 민심에는 ‘타 지역 출신(박 대표는 경남 남해 출신)은 절대 안 된다’는 여론이 형성되고 있다.
박 대표의 재보선 도전을 보는 시각은 엇갈린다. 노장 정치인의 끊임없는 무한도전에 박수를 보낸다는 긍정론자도 있다. 반면 “5선에 집권 여당 대표까지 지낸 국가 원로가 적당한 시점에서 명예로운 은퇴의 전통을 남겨주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훌륭한 정치인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정중하게 주문하는 사람도 있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