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지원 비밀 열쇠 쥐었을까 20일 김대중 전 대통령 입관식이 진행되는 동안 박지원 의원 등 비서진이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있다. | ||
여야 정치권은 조문 정국은 물론 영결식 이후에도 DJ 서거에 따른 후폭풍을 예의주시하면서 정치적 손익계산에 분주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DJ가 60년대 이후 ‘3김 시대’를 이끌면서 호남권과 민주개혁 진영을 대변하는 맹주로 군림해 온 만큼 사후에도 그의 존재감과 막강 영향력이 정국 풍향을 좌우하는 변수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치권은 영결식 전인 8월 21일 일부 공개된 DJ의 마지막 일기 내용을 놓고 정쟁을 본격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유고집 성격을 띤 DJ 자서전이 조만간 출간된 예정이어서 정치권을 바짝 긴장시키고 있다. 범민주계 일각에서는 군사독재 치하에서 DJ가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탄압과 인고의 정치 역정을 보낸 만큼 자서전 내용에 비공개 스토리 등 ‘X파일’이 담겨져 있을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정치권 주변에선 DJ의 유고 중 지금까지 드러난 건 조족지혈에 불과하고 범민주계의 정국 주도권 장악 전략과 맞물려 폭발력 있는 시한폭탄이 잇따라 터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섣부른 관측도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영결식 이후에도 정치권을 폭풍전야의 긴장감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이른바 ‘DJ발 X파일’의 실체를 들여다봤다.
“일기 내용을 처음 접했을 때엔 전율을 느꼈다.”
DJ 측 최경환 비서관이 8월 20일 DJ의 마지막 일기 내용을 접한 뒤 밝힌 소회다.
최 비서관은 이날 “DJ가 입원하시기 한 달 전까지 쓴 일기 중 30일치를 40쪽 분량의 소책자로 만들어 21일 오후 빈소와 전국 분향소 등에 배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DJ가 남기신 마지막 말씀을 국민들이 함께 읽고 같이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예쁘고 작은 책자로 만들기로 했다”며 소책자 제목은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김대중의 마지막 일기’로 정해졌다고 덧붙였다.
21일 공개된 소책자는 지난 1월 1일부터 6월 4일까지 약 100일 동안 DJ가 하루하루 느낀 소회를 다이어리에 메모 형식으로 기록한 것을 정리한 것이다. 일기 원본의 전체 분량은 100쪽 정도에 달하는데 DJ 측은 일기 내용 중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은 빼고 책자를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책자와 인터넷 추모 홈페이지에 올린 일기 내용에는 DJ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소회와 부인 이희호 여사를 향한 애틋한 정과 사랑, 민주주의와 남북관계 등에 대한 생각이 담겨져 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심경과 남북관계와 관련한 현 정부의 인식 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해 조문 정국 이후 정치적 파장을 예고하고 있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기장. 사진공동취재단 | ||
“용산구의 건물 철거 과정에서 단속 경찰의 난폭진압으로 5인이 죽고 10여 인이 부상 입원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1월 20일자)
“그간 검찰이 너무도 가혹하게 수사를 했다. 결국 노 대통령의 자살은 강요된 거나 마찬가지다.” (5월 23일자)
“고 노 대통령 영결식에 아내와 같이 참석했다. 국민의 현실에 대한 실망, 분노, 슬픔이 노 대통령의 그것과 겹친 것 같다. 앞으로도 정부가 강압일변도로 나갔다가는 큰 변을 면치 못할 것이다.”(5월 29일자)
공개된 DJ 일기 중 현 정부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담긴 주요 내용이다. 사정당국의 한 관계자는 8월 21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범국민적 추모 열기를 감안해 일기 내용 중 폭발력 있는 내용은 대부분 제외됐을 것”이라며 “최경환 비서관이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면 비공개된 내용 중에는 정치권을 뒤흔들 수 있는 시한폭탄도 담겨져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DJ가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민주주의 위기론’을 설파하면서 ‘반 정부’ ‘반 이명박’ 구호를 외쳐왔다는 점에서 일기나 다른 형식으로 현 정부에 대한 비판 및 대응책을 주문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여야 정치권이 조만간 출간 예정인 DJ 자서전 내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도 이러한 관측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DJ는 퇴임 후 2004년 상반기부터 자신의 반세기 정치 역정에 대한 소회와 일화 등을 기록한 자서전을 준비해 왔다. 수년 동안 편집위원 등 전문가 다수가 참여해 DJ의 구술 등을 바탕으로 집필 작업을 해왔고, 자서전은 곧 출간을 앞두고 있다. 자서전에는 군사독재 시절 온갖 고문과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주화에 대한 의지와 열정으로 인내해 온 DJ의 인동초 같은 정치 인생이 생생히 기록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또한 자서전 후반부인 ‘집권 이후’ 기록에 노 전 대통령 서거에 따른 소회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비판적 내용이 담길지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독서광인 DJ는 생전에 10여 권이 넘는 책을 저술한 바 있으나 이번 자서전은 DJ 유고집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그 내용에 따라 정치적 파장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DJ의 유언장 실체를 둘러싼 논란도 가중될 조짐이 일고 있다. DJ가 서거한 18일 오후 세브란스병원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유언이나 유서가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유서는 아직 확인이 안 됐다. 부인(이희호 여사)에게도 특별히 유서를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치권 일각에서는 DJ가 입원 전에 유서를 작성해 박 의원에게 넘겼을 것이란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 유서에는 부인과 자식들에 대한 내용과 함께 재산 문제도 담겨 있을 것이란 소문도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DJ의 유서나 유언에 대한 국민적 궁금증을 희석시키기 위해 DJ 측이 조문 기간에 서둘러 DJ 일기 중 일부를 공개한 게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정치권 관계자들은 조문 정국 때는 범국민적인 추모 열기를 감안해 유서 등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안에 대해서는 정치권이나 언론이 자제하는 분위기였지만 영결식이 마무리된 만큼 유서 실체를 둘러싼 의혹 등 민감한 부분에 대한 논쟁이 불가피할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사정당국 주변에서는 일부 공개된 일기나 자서전 내용은 조족지혈에 불과하고 정치권을 뒤흔들 수 있는 이른바 ‘DJ발 X파일’이 어떤 식으로든 공개될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반세기 동안 한국 정치사를 이끌어 온 산 증인인 DJ가 서거한 만큼 그가 겪었던 정치적 비하인드 스토리나 폭발력 있는 X파일이 정치권이나 지인들을 통해 폭발할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
조문 정국 이후 전열을 가다듬고 있는 여야 정치권이 10월 재보선과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국 주도권 장악 차원에서 ‘DJ발 X파일’을 꺼내들 가능성도 열려 있는 상태다. 민주당 등 범민주계는 DJ가 생전에 우려했던 ‘민주주위 위기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DJ의 숨겨진 파일을 찾아내 민주개혁 세력을 결집시키는 동시에 여권을 궁지로 몰아넣고 정국 주도권을 쥐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다.
반면 한나라당과 여권 일각에서는 민주당 등 야권이 DJ 서거를 정치적으로 활용할 경우 ‘DJ 비자금’ 등 DJ를 둘러싼 각종 의혹들을 확대·재생산해 ‘맞불’ 작전을 펼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엄숙했던 조문 정국을 뒤로한 채 정치권은 벌써부터 DJ 서거에 따른 후폭풍과 손익계산서를 따지면서 정국 주도권 전쟁을 본격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다시 전투 모드로 전환한 여야 정치권에 ‘DJ발 X파일’이 언제 어떤 식으로 투하될지 여의도 정가에 전운이 감돌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