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특히 책 내용 중 그간 껄끄러운 관계로 알려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대한 평가, 지난해 총선 낙선 이후 ‘타의 반으로’ 떠나게 된 미국행에 대한 단상 등은 그의 정치일선 복귀 문제가 여권의 뜨거운 현안의 떠오른 지금, 정가의 미묘한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 전 최고가 회고록을 내던 즈음 박근혜 전 대표의 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은 SBS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이 전 최고의 당 복귀에 대해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내려 향후 친박 그룹과의 관계 변화도 예상되고 있다. 과연 ‘집(한나라당)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이 전 최고가 자신의 자서전 제목처럼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책의 몇몇 주요 내용을 요약해봤다.
◇ 지키지 못한 아내와의 약속
이재오 전 최고위원은 다섯 번이나 감옥을 갔다 오면서도 좌절하거나 굽히지 않았던 것은 ‘아내의 사랑과 배려 때문’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전 최고의 아내는 바느질을 해서 번 돈으로 가족들을 부양했고 남편이 감옥에 가면 석방운동까지 하러 다녔다고 한다. 자서전에서 이 전 최고는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이 “아내에게 큰 힘이 돼 줬다”는 일화도 공개했다.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 시절에 옥중의 자신을 위해 가장 먼저 탄원서를 써준 사람이 바로 고 김 추기경이었다는 것.
국회의원이 된 후에도 이 전 최고의 아내는 중앙정치무대 활동에 바쁜 남편을 대신해 지역구를 챙기며 내조를 했다고 한다. 이 전 최고에 따르면 3선 의원을 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세비를 준 적이 없는데 이는 “부정한 돈을 받지 말고 양심을 지켜 달라”는 아내의 주문 때문이었다고. 이 전 최고는 아내에게 “4선 의원이 되면 세비를 갖다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낙선으로 그것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도 토로했다.
▲ 이재오-회고록 <함박웃음> 출간 | ||
이 전 최고는 ‘억울함’과 ‘분노’를 자신의 젊음을 지배했던 정서로 꼽고 있다. 이는 감옥에서의 오랜 폐쇄적인 생활과 투옥 때마다 가해졌던 고문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자서전에서 1979년 벌어진 ‘오원춘 납치 사건’을 그 예로 들고 있다. 평범한 농민이었던 오원춘 씨를 경찰이 불법 연행한 것에 대해 가톨릭교회가 들고 일어나자 유신정권이 탄압에 나섰고, 이 전 최고는 이에 분개해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적 인권탄압 사례와 관련한 시국연설을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는 서대문구치소에 투옥됐고 당시 악명 높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을 받았다.
당시를 이 전 최고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살아 있는 지옥’이라 떠올리고 있다. 모진 고문 끝에 그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했고 결국 15년형을 구형받았다고 한다. 훗날 자신을 고문했던 형사와 구형을 내린 검사였던 박철언 전 의원을 만났지만 이 전 최고는 “우리 모두 시대가 낳은 희생양”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용서하기로 했다고 한다.
◇ 야당 안에서의 또 다른 야당생활
이 전 최고는 “정치인의 선택은 확고한 자기 정체성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자신이 여러 차례 곤혹스러운 정치적 선택의 기로에서 판단의 잣대로 삼았던 것도 ‘자신을 버리고 다수인 서민을 위한 결정을 내린다’는 정치적 신념이었다고 한다. 그가 당시 야당이었던 신한국당 내에서 개혁을 내세우며 ‘악역’을 자처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고. 부정한 권력에 투쟁하기 위해서는 선명한 야당을 만들어야 하고 이것이야말로 유권자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라는 게 이 전 최고의 신념이었다. 그는 당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초선 의원으로서는 처음으로 원내총무 경선에 출마해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2위를 차지했는데 이 결과에서 큰 희망을 발견했다고 한다. 오랜 여당 생활로 투쟁이 어색하기만 하던 동료 의원들에게 자신의 재야 경험을 전파한 것도 기억에 남는 일이라고 그는 털어놓고 있다.
▲ 이재오 전 최고위원이 지난 29일 강남 교보센터에서 저서 <함박웃음> 출판을 기념하는 팬사인회를 가졌다. 작은 사진은 2002년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 후보와 함께한 모습(위)과 2006년 박근혜 당시 대표에게 생일 꽃다발을 건네는 모습. | ||
지난 2006년 정치입문 10여 년 만에 한나라당 원내대표로 선출된 이 전 최고는 ‘당내 소통’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고 한다. 주요 당직자 회의를 개방형 방식으로 바꾸고 원내대표에게 주어진 일부 권한을 당 대표에게 위임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또한 원내대표로서 당의 화합과 결속을 중요시했다고 한다. 특히 주변의 우려가 끊이지 않았던 박근혜 전 대표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 애를 썼다고. 이 전 최고는 박 전 대표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의 공과가 박근혜 전 대표에 대한 평가에 반영되어서는 안 된다. 박 전 대표의 정치적 역량의 핵심에는 원칙주의와 책임감이 있다고 생각한다”며 긍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유신시절 민주화운동 경력으로 인해 어색할 수도 있는 사이지만 정치적 편견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과 박근혜 전 대표와의 관계를 설정했다는 것이다.
◇ 정계은퇴의 기로에서
“참으로 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이 전 최고는 지난 2007년 8월 20일 당내 대선후보 경선을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당초 개표 때 이명박 후보가 박근혜 후보에게 3000표가량 뒤지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정계은퇴 성명서’까지 준비하며 눈물을 쏟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명박 후보가 막판 역전에 성공하자 또 다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이 전 최고는 자서전에서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올인’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다. 이 전 최고는 1996년 7월 대정부 질문에서 당시 이명박 의원이 경부운하 건설을 제안하는 모습을 보고 국가 경영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미래를 위한 과감한 도전의식에 깊이 매료됐다고 한다. “확실한 대통령 감이다”라고 생각했다는 것. 이 전 의원은 자서전을 통해 이러한 자신의 신념이 “그간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며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드러내기도 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