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녀 조준했나 지난 8월 15일 제64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선거구제-행정구역 개편 의지를 피력했다. 왼쪽은 박근혜 전 대표. 청와대사진기자단 | ||
“이명박 대통령이 이번에는 정말 사고를 칠 것 같다.”
여권에서 오랫동안 이 대통령을 알고 지내온 ‘친이 직계’ 관계자들은 현 정권의 개헌 추진을 심상치 않게 보고 있다. 이 대통령은 청와대에 입성하기 훨씬 이전부터 측근들에게 국론 분열과 정치 퇴보의 근원으로 지적돼 온 현 권력 구조의 개편에 대한 조언을 자주 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차기 개각 대상에 오를 정도로 이 대통령과도 교감이 깊은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 대통령 입장으로는 진실로 (선거제도를 개혁을) 하고 싶어 한다. 나아가 개헌까지도 하고 싶어 한다”고 밝혀 이 대통령의 손가락 끝이 개헌으로 향하고 있음을 공식화했다. 수도권 한 친이 직계 의원은 “‘여의도 정치’라는 구식 메커니즘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이 대통령이 권력 구조 개편을 이루어낸 역사적인 대통령으로 남고 싶어 자신의 임기 내에 개헌을 꼭 이루려고 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혹시 또 다른 ‘숨겨진 의도’는 없을까. 사실 차기 대권주자가 없는 ‘불임’ 상태의 친이 세력으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현재의 ‘박근혜 독주 구도’를 깨야만 한다. 이런 절박한 상황은 이 대통령이 개헌에 ‘서둘러’ ‘올인’하는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시각도 적지 않다. 그런 이유로 여권 핵심부가 그 마지노선을 내년 지방선거 이전으로 잡고 있다는 것이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할 경우 여권의 권력 구도는 급격히 ‘박근혜 체제’로 재편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안상수 원내대표가 최근 “개헌 합의는 내년 지방선거 이전까지 해야만 한다”라고 못을 박은 것도 친이세력의 절박한 상황인식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개헌 방식에서 친이세력은 이원집정부제를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안상수 원내대표 등의 친이세력과 김형오 의장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막는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평소 소신을 받들어’ 이원집정부제를 ‘합창’하고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이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 간에 생사가 걸린 전선이 형성되고 있다. 박 전 대표는 이미 여러 차례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 의사를 밝혔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대로만 가면 차기는 떼논 당상’이기 때문에 굳이 무리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현 권력 구조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탄생할 경우 친이세력은 처절한 피의 복수전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 대통령도 퇴임 뒤 안전판을 보장받을 수 없다. 하지만 개헌을 밀어붙여 이원집정부제를 관철시킬 경우 당내 주류인 친이계가 총리만큼은 장악할 수 있어 ‘박근혜 힘빼기’와 함께 퇴임 뒤 안전한 퇴로도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친박 진영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는 이변이 없는 한 대통령이 될 것이기 때문에 (주류 측이)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대신 ‘최대한 힘을 뺀’ 대통령직을 박 전 대표에게 주게 되면 친이세력은 내각을 장악해 계속 권력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삼척동자도 아는 유치한 발상이다. 일단 국민들은 통일을 대비하는 측면에서, 또한 제2공화국 때 장면 총리의 실패 사례에 대한 학습효과 때문에 4년 중임제를 선호하고 있다. 따라서 친이세력이 개헌을 밀어붙이더라도 국민투표에서 뒤집혀질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안국포럼 출신의 한 여권 관계자는 “이 대통령이 개헌을 통해 박 전 대표를 견제한다는 것은 1차원적인 해석이다. 그는 친이세력을 중심으로 한 보수 세력의 장기집권을 꿈꾸고 있다”라고 단언한다. 이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선거구제-행정구역 개편을 역설한 바 있다. 그리고 그 핵심은 바로 중대선거구제로의 개편이었다. 중대선거구제 개편은 개헌으로 가는 마지막 종착역이다. 이 제도가 여야 합의로 실행될 경우 이원집정부제 개헌은 사실상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중대선거구제는 한 선거구에서 여야 의원이 골고루 배출된다는 점에서 한나라당은 영남 일부에서 의석을 잃게 되겠지만, 고령화시대를 맞은 우리 사회 전반의 보수화 성향 심화로 인해 계속해서 다수당으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 자민당의 54년 장기 집권 로드맵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것이다(일본은 8월 30일 총선을 통해 민주당이 50여 년 만에 자민당 장기 집권을 종식시켰다).
그런데 정세균 대표 체제의 민주당으로서도 영남지역에서 선전하며 의석수를 늘릴 수 있기 때문에 중대선거구제에 대한 반감이 옅은 편이다. 반면 대부분 영남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친박세력은 중대선거구제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는 한나라당-민주당이 전격적으로 중대선거구제로 합의해 박근혜 전 대표 세력을 ‘왕따’시키는 정치구도의 급변 상황까지 점쳐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한나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이에 대해 “만약 이원집정부제로의 개헌이 이뤄지게 되면 박 전 대표는 탈당을 해서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것 외에 방법이 없을 것이다. 허수아비 대통령이 되기보다 한나라당 내에 있는 ‘주이야박’(낮엔 친이세력 밤엔 친박세력이라는 말로 잠재적 친 박근혜 그룹을 일컫는 말)과 ‘월박’(친이 진영에서 친박그룹으로 넘어간 세력)을 대거 이끌고 나가 창당을 해 한나라당과 한판 대결을 벌이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해야 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이 대통령은 이원집정부제로 개헌이 될 경우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친이 출신이 총리로 계속 일할 수 있기 때문에 ‘한반도 대운하’ 등 ‘MB 정책’이 영속성을 가지고 추진된다는 점도 고려했을 수 있다. 그리고 개헌을 계속 최대 이슈로 몰아간다면 10월 재·보궐 선거에서 여권 비리 등을 내세우는 야당의 공세에 맞서 정국 주도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란 셈법도 있다. 여기에 개헌의 파괴력이 내년 지방선거 때까지 이어질 경우 이 대통령으로선 그 실현 여부를 떠나 정국 주도권을 계속 쥐고 국정을 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또한 ‘주이야박’과 ‘월박’과 같은 기회주의적인 친이세력을 이원집정부제로의 개헌 가능성으로 계속 묶어둘 수 있어 보다 안정적으로 여당을 관리할 수 있다는 점도 염두에 뒀을 것이다.
이렇듯 개헌은 이 대통령에게 다목적 카드로 활용될 수 있는 숨겨 논 비수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이 박근혜 전 대표의 비협조와 민주당의 외면으로 틀어질 경우 이 대통령은 자신이 벼린 칼에 오히려 베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후유증은 곧바로 조기 레임덕으로 이어져 친이그룹의 운명은 박 전 대표의 손아귀에 놓이게 될 가능성도 있다. 개헌 정국에서 이 대통령은 자신의 통치 기반 전부를 건 위험한 도박판을 벌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