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맏상주인 내가… 8월 21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모를 위해 입국한 북측 조문단이 박지원 의원(왼쪽)의 안내를 받으며 걸어 나오고 있다. _사진공동취재단 | ||
동교동계는 “상중에 확인되지 않은 유언을 공개한 것은 고인에 대한 예가 아니다”며 발끈했고, 박 의원은 “일일이 대꾸하지 않겠다”며 불쾌한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있다.
표면적으론 ‘공인되지 않은’ DJ 유언을 둘러싼 충돌이지만 양측의 오랜 불신이 DJ 서거를 계기로 곪아터졌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특히 DJ 서거정국에서 박 의원에게 ‘맏상주’ 자리를 내줘 속이 상했던 동교동계가 박 의원의 발언을 문제 삼아 대반격에 나섰다는 것이다.
실제 양측 간 불화설은 DJ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와병 중일 때도 흘러나왔다. 동교동계가 박 의원의 독단적인 일처리를 마뜩찮게 여겼다는 것이다. 심지어 동교동계 좌장인 권노갑 전 의원과 박 의원이 언쟁을 벌였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미국 하와이대학에서 방문교수로 활동하다 DJ 병세가 악화되면서 급거 귀국했던 권 전 의원이 최근 학교에 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한 것도 박 의원을 견제하기 위함이라는 관측도 있다.
박 의원은 ‘비동교동’ 출신임에도 DJ의 ‘최측근 중 최측근’ 자리에 오른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바로 이 점이 동교동계와의 오랜 구원을 낳았다는 시각도 있다. 동교동계 가신그룹들이 1960∼1970년대부터 DJ를 따르면 생사를 넘나들었던 데 반해 박 의원은 1980년대 초에야 미국에 망명 중이던 DJ를 처음 만났다. 당시 그는 가발사업으로 크게 성공해 아메리칸 드림을 일군 재미 사업가였다. 동교동계 입장에서 보면 박 의원은 DJ와의 인연도 짧고, 고생도 거의 안 한 사람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박 의원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있다. 박 의원과 가까운 민주당의 또 다른 관계자는 “동교동계 가신 중 상당수가 국민의 정부 이후 정치적 홀로서기를 하거나 정계은퇴를 하면서 DJ를 떠났던 반면 박 의원은 끝까지 DJ 곁을 지켰다”며 “이제 와서 동교동계가 DJ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했다.
그럼에도 동교동계의 움직임은 심상찮다. 박 의원에 대한 파상공세를 본격화한 것이다. 박 의원의 DJ 유언 언급이 도화선이 됐다. 이는 동교동계 입장에선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 됐다. 포문은 ‘동교동계 막내’ 장성민 전 의원이 열었다. 장 의원은 지난 1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 “애도 기간에 (유언으로) 정치적 이슈를 만들어 사회적 파장을 낳는 것 자체가 DJ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며 “동교동계 민주화 선배들도 우려하고 있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이에 대해 동교동계 원로그룹 중 한 명인 이훈평 전 의원은 “원래 상중일 때 이런저런 구설이 제일 많지 않느냐”면서도 “(장 전 의원의 지적이) 그렇게 틀린 얘기는 아니라고 본다”며 박 의원에 대한 불편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이들은 박 의원이 DJ 유언을 민주당 최고위원회의라는 공개석상에서 공표함으로써 대내외에 ‘유언 집행자’임을 과시한 것도 불쾌하지만, ‘정세균’이라는 특정인을 거론한 데 더 큰 불만을 갖고 있다. 현재 ‘포스트 DJ’ 자리를 놓고 야권 내 잠재적 대선주자들의 주도권 다툼이 시작된 상황에서 구구한 억측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박 의원의 ‘사심’이 개입된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장 전 의원이 라디오에서 “DJ는 정당정치는 민주정치이지 개인을 중심으로 하는 사당정치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분”이라며 “DJ의 유지를 이어가는 일에 사심이 개입돼선 안 된다”고 경고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박 의원의 정책위의장 임명을 둘러싼 민주당 내 논란과도 결부된다. ‘박지원 카드’는 그야말로 ‘깜짝 인사’였다. 심지어 정 대표가 이강래 원내대표와도 사전협의 없이 임명을 강행했다는 후문이다. 지난 3일 민주당 의원워크숍에서 비주류 진영이 “당이 사당화되고 있다”는 비판을 가한 것도 박 의원 인사가 발단이었다.
정치컨설팅사 포스커뮤니케이션의 이경헌 대표는 “지난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돼 혈혈단신 입당했던 박 의원으로서는 주류인 정 대표와 손을 잡아 당에 소프트랜딩하고 싶었을 것이다. 주류인 정 대표와 손잡는 게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라며 “정 대표 역시 ‘DJ 적통’임을 인정받기 위해선 박 의원을 잡아둘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유언 공개는 사실상 두 사람 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데 따른 결과라는 것이다.
DJ 유훈 공개를 둘러싼 논란에 대해 박 의원은 심드렁한 반응이다. ‘민주당 중심의 야권 통합’은 DJ의 평소 지론이고, 정 대표 이름을 언급한 것도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할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지난 2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 “통합의 주체는 민주당이 돼야 하고, 현재 민주당 대표는 정세균 대표이기 때문에 그 중심이 돼야 한다는 의미”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야권 내 잠재적 대선주자들도 신경이 쓰이긴 마찬가지다. 복당 문제를 놓고 정 대표와 불편한 처지인 정동영 의원은 지난 2일 야후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DJ가 (무소속인) 정동영을 중심으로 단결하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며 박 의원 편을 들었지만, 이는 오히려 유언이 담고 있는 정치적 의미를 최소화하기 위한 발언이란 지적이다.
정가에서는 서로 등 돌린 듯한 동교동계와 박 의원의 미래 모습을 ‘민주당 대표 정세균과 무소속 정동영’이란 함수관계에 투영해보려는 시선도 있다. 정치적 영향력이 유지되기를 바라지만 민주당 내에 입지가 좁은 동교동계가, 역시 민주당 입당 문제로 정 대표와 갈등을 빚고 있는 정 의원과 손을 잡을 가능
성이 있다는 시각이다.
‘포스트 DJ’ 주자가 되기 위해 전북뿐 아니라 전남을 아울러야 하는 정 의원으로서도 동교동계의 도움이 필요한 입장이다. 이 경우 박 의원은 정 대표의 우군으로, 동교동계는 정 의원의 지원군으로 서로 충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권 안팎에선 박 의원과 동교동계가 DJ 서거 이후 완전히 제 갈 길을 갈 것이라고 보는 것은 다소 성급한 관측이라는 주장도 있다. 민주당 구민주계 출신의 한 의원은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동교동 가신들과 아직 현역으로 뛰고 있는 박 의원 간 입장차에서 빚어진 오해일 뿐”이라며 “‘DJ의 영원한 비서’를 자임하는 그들 스스로 단결과 통합을 외친 DJ 유훈을 거스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양원보 세계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