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풍인파가 썰물처럼 사라져버린 11월의 운악산에서 스스로를 성찰해보는 여행을 함은 어떨까. | ||
그러나 진정한 여행은 자기 자신에게도 돌아가는 여행이 아니던가. 그 무엇도 유혹하지 않고 들뜬 축제 인파의 소요도 들리지 않는 11월의 여행길이란, 나 또는 우리, 그동안 제대로 돌아보지 못했던 차분한 일인칭 목적격의 성찰에 딱히 들어맞는 여행이 아닐 수 없다.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인 운악산 현등사 계곡. 깊고 높은 산이 이리도 한적하여 꼭 가을을 위한 산인 것만 같다. 신라 때 절이라 하여 이름높은 명찰이건만 전혀 위세하지 않는 크기, 사치하지 않은 모습으로 자리한 현등사 또한 가을 풍경을 거스르지 않는다. 수도권에서도 높다 하는 산은 거의가 경기도 가평과 포천의 경계에 모여 있다. 백두대간에서 강원도 북부지역을 거쳐 내려오는 한북정맥의 굵은 산줄기가 서쪽 평지를 만나기 전 몇 차례 힘찬 용틀임을 지은 위치이기 때문이다.
화악산(1,468m) 명지산(1,267m) 등 수도권에서 1, 2위를 다투는 1천m급 명산들 사이에 국망봉 강씨봉 광덕산 등 내로라하는 산들 사이에서 웬만한 봉우리는 이름도 내밀지 못한다.
하건만, 이들 사이에 자리한 운악산은 높이가 돋보이는 것도 아니로되 명산으로 꼽히는 데 조금도 주저되지 않는다.
높이는 935.5m. 평범하다면 평범한 산이지만 위용은 당당하고 가파르게 솟았으면서도 넉넉한 품을 갖고 있다. 산을 즐기는 사람들이 운악산을 사랑하는 이유일 것이다.
일찌기 경기도에 5악이라 하여 다섯 개의 명산이 꼽혔는데, 운악산 또한 개성 송악, 가평 화악, 파주 감악, 서울 관악산과 함께 경기오악 중 하나였다. 5악의 악(岳)은 높은 암벽을 포함한 산세를 일컫는 말이니 각각의 이름 첫자에 이 산의 특징이 함축돼 있을 것이다. 구름을 뜻하는 운악. 가평군 하면과 포천군 내촌면에 걸쳐 넓게 펼친 산자락의 끝이 아침 안개에 쌓이면 산은 말 그대로 구름속의 선계처럼 보였으리라.
차지한 지역이 넓은 만큼 운악산을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다. 포천쪽에서는 운주사나 대원사(길원목장)쪽이 각기 기점이 되며 가평 현리쪽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등산로들이 무수히 운악산 정상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가장 잘 알려진 산행길은 역시 현등사 계곡 쪽이다. 가평 현리를 지나 조종천 줄기를 따라가는 2차선 362번 도로 옆으로 현등사 팻말이 나타나고, 여기부터 산행이 시작된다.
봄에는 자목련 산목련과 진달래가 이어서 피고 여름이면 짙게 우거진 원시림 사이 계곡이 시원한 운악산은 가을 단풍철을 지나고 있다.
“단풍 좋은 곳은 많지만 이곳처럼 색깔이 좋은 곳은 찾아보기 힘들지.”
산행나온 사람들이 들으란 듯이 칭찬을 하며 스쳐간다. 가을잎은 단풍이면 빨갛고 참나무 떡갈나무라면 그저 갈색이면 될 터인데, 이곳 나무들은 단풍조차 빨갛고 노랗고 파랗거나 연두색이기도 하여 온갖 빛을 다 발한다. 오르는 길을 빼고는 가파른 경사나 절벽들이 곁을 하여 아마도 그늘과 양지쪽 사이에 온도차가 크기 때문인 듯하다.
물론 그 형형색색의 가을 잎들도 단풍 절정기를 한참 지난 이제쯤은 예외없이 뚝뚝 떨어져 쌓이고 있다. 사람 손이 함부로 닿지 않을 수 없는 골짜기와 사면마다 낙옆이 두텁게 쌓이고 나면 산은 비로소 편안하고 아늑한 자세로 겨울을 맞이하는 것이리라.
▲ 운악산 현등사는 결코 호화롭거나 사치하지 않아 친근 감을 준다. 오른쪽은 문화재급 4층탑. | ||
절반을 넘게 올라가서 계곡 사이를 끊어낸 큰 너럭바위를 만나게 되는데, 물은 이 바위를 타고 넘어 흐른다. 높이는 대수롭지 않지만, 일종의 폭포인 셈이다. 사람들은 이 폭포를 무우폭포라 부르고 너럭바위를 민영환 바위라고 부른다. 바위 위에 구한말 순국지사 충정공 민영환 대감의 이름 석자가 한자어로 또렷이 암각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감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것을 한탄하면서 자주 이곳을 찾았는데, 이 너럭바위에 하늘을 보고 누워 아린 가슴을 달래곤 했다고 한다. 1905년 11월 대감이 더이상 나라에 힘이 되지 못함을 슬퍼하며 자진한 뒤에 그와 함께 이곳을 찾던 나세환 등 지인들이 그가 눕던 자리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그의 통한이 잊혀지지 않게 했던 것이다.
고려가 원나라에 짓밟힐 적에 고종 황제가 피신하여 몸을 숨긴 채 도읍을 보고 울었다는 국망봉이 바로 이웃에 있고, 태봉과 고려의 시황제 궁예가 운이 다하여 숨어들었던 곳도 바로 지척이다. 운악산은 민족사의 운명을 지척에서 바라보고 혹은 함께 해온 역사의 산이기도 한 것이다.
길을 재촉하여 몇 백m를 더 오르면 현등사가 나온다. 신라 법흥왕 때 인도 승려 마라하미를 위해 지어진 뒤 도선국사에 의해 중창되었다가 다시 폐허가 된 것을 고려 희종 때 보조국사 지눌이 재건하였다는 아주 오랜 절이다.
그 이름과 전통으로 짐작컨대 필경 너른 마당과 번듯한 자가용이 즐비한 주차장부터 상상했다면, 정작 한적한 암자 크기에 불과한 현등사의 소박함은 놀랍기만 할 것이다.
이 절은 조선조 때도 몇 차례 중수를 했지만 구한말에 완전히 불탔던 것을 20년 전 극락전 보광전을 새로 지으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절마당을 떠받친 삼단의 돌 축대만이 천년세월의 흔적을 그나마 간직하고 있다.
증개축을 거듭했다곤 하지만 현등사는 결코 호화롭거나 사치하지 않아 친근감을 준다. 우선 ‘위세’같은 것을 느낄 수 없이 자그마한 전각들인 데다 호화단청으로 사치하지 않아 더 믿음이 간다. 이름 높을수록 사치한 요즘 사찰들의 금치장에 식상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감동’을 느낄 만도 하지 않을까.
절마당의 석탑은 조선 초기에 조성된 문화재급의 4층탑인데, 백제 타입으로 단순하고 투박한 인상을 지녔으면서도 각 층의 지붕처마는 날렵하게 사선을 그으며 위로 솟구쳐 보다 후대의 양식임을 뚜렷이 알아볼 수 있다. 사실 4층이란 숫자는 우리 전통속의 탑으로서는 생소하다. 본래 5층이던 것이 기단부 위의 한 층이 사라져 4층이 됐다고 한다.
현등사에서 시작하는 산길은 이제 정상부로 향한다. 하지만 막바지 경사가 또 기다리고 있다.
정상에 오르면 인근의 고산준령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오후에 오른 길이라면 멀리 낙조의 풍경도 장엄할 것이다. 운악산 산길은 여러 갈래로 펼쳐져서 명산의 다양한 속내를 아낌없이 보여줄 것이지만, 짧은 하루해는 속절없이 기울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