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화속의 세계인 듯 온통 눈꽃으로 뒤덮여 있는 덕유산 설경(위). 덕유산 정상에 있는 주목의 앙상한 가지마다 눈꽃이 매달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 ||
눈이 내린 뒤에 녹고 다시 얼어붙을 때는 앙상해진 겨울나무에 때아닌 꽃이 피게 된다. 꽃은 하얗고 또 차갑지만 아름다움은 봄 여름의 여느 꽃에 비해 조금도 뒤질 바가 아니다. 이름하여 설화(雪花). 눈 녹은 물이 가지에 물방울처럼 매달렸다가 그만 얼어붙으며 만들어진 꽃이라 해서 빙화(氷花)라고도 한다.
아무리 세심하게 다듬은 물방울 다이아몬드라 하더라도 중력에 따라 저절로 맺힌 실제 물방울의 자연스런 모양을 능가하진 못하리라. 그 결정체에 햇빛이 반사되면 누구라도 순간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설화가 피는 곳은 주로 고산지대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주목들의 군락이 있는 무주 덕유산 정상. 태백산과 함께 설화의 절경지로 유명한 곳. 마침내 눈이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앙상한 고목나무 가지들이 눈꽃을 피웠다.
무주는 인접한 진안군 장수군과 더불어 ‘무진장’이라 불리기도 한다. 남부 내륙 산지에 모여있어, 새 고속도로가 뚫리기 전까지만 해도, 가장 개발이 안된 오지 중의 하나였다.
그런 지역이 지금은 가장 때타지 않은 휴양지로 탈바꿈했다. 무주가 자랑하는 최고의 자연은 우리나라 12대 명산 중 하나인 덕유산(1,614m)이다. 이렇게 불리고는 있지만 사실은 향적봉을 주산으로, 무풍의 삼봉산(1,254m)에서부터 수령봉(933m), 대봉(1,300m), 덕유평전(1,480m), 중봉(1,594m), 무룡산(1,492m) 삿갓봉(1,410m), 남덕유(1,508m)에 이르기까지 장장 1백 리 길의 대간을 아우르며 영호남을 가르는 대자연이다.
▲ 칠연폭포를 찾아가는 덕유산 산행길. | ||
하늘은 유난히 맑고 햇살조차 따뜻한 날이었다. 대전-진주간 고속도로를 타고 한없이 무주를 향해 달려간다. 스키장(063-322-9000, mujuresort.com)을 찾는 스키어들로 인해 주변은 어수선하다. 리조트는 불경기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아들어 북적댄다. 진입로부터 짜증스러운 교통체증이 이어지고 있다. 스키와 무관하게 정상 관람을 위해 곤돌라를 이용하는 관광객들도 많다. 관광 곤돌라(왕복 1만원)와 스키를 타는 사람과의 이용료(1만2천원)가 다르다.
아슬아슬 산정을 향해 곤돌라가 움직인다. 설천봉까지 6km가 훨씬 넘는 거리로 15분 정도가 소요된다. 부산에서 왔다는 중년 스키어 두 명과 동석을 했다. 산 정상 설경이 어떠냐고 물었더니 전날 눈보라가 휘몰아쳤다고 한다. 다행히 그 눈보라는 그치고 하늘은 청명하기 이를 데 없다.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덕유산 설경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내 가느다란 탄성이 입밖으로 새어나온다. 온통 새하얀 설화다.
정상에는 많은 스키어들이 스키타는 일도 뒤로 하고 사진찍고 설경 감상하느라 여념이 없다. 청량한 겨울 하늘의 푸르름이 하얀 산과 조화를 이뤄 눈부시다. 온 산하가 눈 천국이다.
곤돌라에서 내려 향적봉 정상까지는 지척이다. 걸어서 30~40분 올라가면 된다. 올라가자니 간간히 가족 나들이객들과 겨울 등반을 하고 내려오는 등산객들과도 마주친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향적봉까지 산행을 하는 것이었지만 아이젠을 준비하지 못한 탓에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다. 엉덩이를 다리 삼아 내려오는 수밖에 없다. 비록 스키를 즐기지 못해도 설화감상만으로 충분한 여행이다.
▲ 무주리조트는 스키철을 맞아 사람들로빽빽하다. 굳이 스키가 아니더라도 설경을 즐기려는 관광객들도 많이 온다. | ||
덕유산 서쪽 기슭, 칠연계곡을 찾아보기로 한다. 일곱 개의 폭포와 소가 이어져 있다는 칠연폭포(七淵瀑布)를 찾아가려는 것이다. 계곡은 안성면 통안마을 뒤에 반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명 칠연암동이라 불리는 이 지역은 구천동 계곡에 비해 턱없이 작은 규모이지만 아기자기하다. 매표소(안성면 공정리) 입구부터 칠연폭포까지는 약 1.5km 구간. 왕복 1시간이면 충분하다.
이곳을 찾던 날은 아직 눈내리기 전이었다. 바스락대는 새소리와 다람쥐 소리가 가슴을 쓸어 내리게 할 뿐 산속은 고요하기만 하다. 산길은 사람 두세 명이 나란히 서서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당히 넓다. 돌도 많지 않아 걷기도 어렵지 않다.
산길 옆으로 계곡이 이어진다. 이내 아름다운 문덕소가 나타난다. 더 올라가면 칠연폭포와 향적봉으로 가는 등산로가 나누어진다. 곧추 올라가 고갯길을 넘어서면 다시 평평한 구릉이라 누구나 등산이 가능하다. 멀지 않은 거리에 칠연폭포가 모습을 드러낸다. 겨울 가뭄으로 인해 수량은 턱없이 줄어들었다. 자그마한 폭포 위로 과연 굽이굽이 일곱 개의 폭포와 소가 이어진다.
어떤 못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어 보여 으스스한 기분이고 작은 못은 아기자기한 느낌이다. 이 물줄기는 명제소, 문덕소, 도술담, 용추폭포를 잇달아 지나친 뒤 금강 상류인 구리향천으로 흘러들게 된다.
근처에 항일운동 의병들의 무덤인 칠연의총과 용추폭포도 들러볼 만하다. 칠연의총은 조선 말기(1908년) 의병장 신명선과 1백50여 의병들이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전사하여 묻힌 묘역이다.
높이 32m의 용추폭포는 수심이 깊은 용추(龍楸)라는 웅덩이를 끼고 있다. 이곳엔 전설이 내려져 온다.
옛날 구두쇠로 소문난 부자의 집에 스님 한 분이 시주를 하러 갔더란다. 부자 영감이 매정하게 스님을 매질하여 쫓아내자, 마음씨 착한 며느리가 보고 시아버지 몰래 뒤쫓아가 쌀을 몇 줌 부어주다가 그만 들키고 말았다. 이번에는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매를 맞고 구박을 당하게 되자 스님이 부자에게 벌을 주고자 도술을 부려 홍수를 나게했다. 심술궂은 구두쇠 영감의 집은 떠내려 가고 그 자리에 생긴 큰 웅덩이가 바로 용추못이라 한다. 폭포 위에는 나무 정자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