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고민하는 사람들을 위한 식도락 여행이 새로운 트렌드로 등장했다. 각지에 숨어있는 별미집을 일일이 찾아내는 것도 그렇고, 또 소문난 별미집이라면 일단 가격도 만만치 않은 경우가 많아 그동안 별미기행은 극히 제한된 사람들만이 즐겨온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일부 테마여행 전문회사들이 곳곳에 숨어있는 맛집들을 여행 코스에 넣어 ‘멋과 멋’이란 컨셉트의 상품들을 소개하면서 식도락여행 대중화시대가 열렸다.
기차 여행과 관광명소, 지역 별미와 이벤트까지 겸비한 섬진강 봄나들이 테마여행을 체험했다.
아침 7시50분. 전라선 무궁화호 열차는 밤새 설렘에 잠 못 이룬 사람들을 싣고 서울역을 떠난다.
목적지는 섬진강. 인근에 모여있는 춘향전의 고장 남원 광한루와 지리산, 하동 화개장터와 광양 매화마을을 거쳐 보성 녹차밭까지 돌아볼 참이다.
이 많은 ‘관광명소’를 거치면서 각 지역에서 손꼽히는 별미까지 맛보게 된다니, 1박2일 일정으로 너무 욕심을 낸 것이 아닐까 은근히 걱정도 된다. 하지만 단체여행은 시간적 손실을 줄여준다. 비용면에서도 그렇다.
창밖으로 눈녹은 들녘 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따끈한 백설기를 나눠준다. 이른 아침 집을 나서느라 식사를 거른 사람들이 많은 듯 모두들 반색하며 즐거워 한다.
“먼저 드세요” “아니 먼저 드시죠” 떡과 음료를 나누면서 통성명이 없을 수 없다. 마주 앉은 좌석끼리 금세 일행이 된다. 이런 기회가 아니라면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했을 사람들끼리 친구가 되는 생소한 경험. 이 또한 단체여행에서만 누릴 수 있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가는 시간이 꽤 걸리지만 하지만 맛기행 투어는 지루할 틈이 없다. 여행 DJ가 있기 때문이다. DJ는 기차가 이동하는 동안 참가자들을 위하여 분위기 있는 음악도 들려주고 여행지 소개도 하면서 기존의 관광 가이드와는 다른 방식으로 분위기를 돋운다.
▲ 눈부신 섬진강 물줄기는 예로부터 아름답기로 소문났다. 섬진강으로 향하는 전용 열차, 보성차밭(위부터) | ||
“시내에서도 많이 보셨죠. 남원 추어탕이 있는 곳입니다. 남원에서도 가장 유명한 원조집으로 모시겠습니다.”
가이드의 소개말에 위장이 자극을 받았나 보다. 열차 안에서 사귄 사람들과 너무 많은 대화를 나눈 탓인지도 모르겠다.
전용열차와 연계된 관광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들를 곳이 많아 버스로 이동하게 된다. 버스로 5분. 남원에서도 가장 유명하다는 새집추어탕. 옛 시장터를 중심으로 추어탕집들이 하나둘 생겨난 이곳에서 20여 년을 해온 집이라 한다.
구수한 냄새가 가득하다. 예약시간에 맞춰 차려놓은 작은 잔칫상. 상추쌈에 올리는 추어숙회며 튀김, 그 맛이 낯설지 않은 게 ‘미꾸리’라 불리는 그것이 뼛속까지 사르르 스며드는 것 같다. 마지막을 장식하는 추어탕은 무시래기를 넣고 펄펄 끓여내 보기에도 먹음직스럽다.
“서울에서 먹어본 남원추어탕보다 훨씬 낫네. 텁텁하지 않고 뒷맛도 개운하구만.” 식도락에 일가견이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한마디씩 칭찬을 한다.
남원 광한루를 돌아 지리산으로 올라간다. 19번 국도를 타면 밤재터널을 지나 좀더 빠르게 하동쪽으로 갈수 있지만 굳이 정령치 쪽으로 지리산 정상 코스를 넘는다. 모처럼의 여행길에 맑은 바람이라도 맡아보라는 배려인 것 같다.
노고단 산책로가 시작되는 성삼재 휴게소에서 발 아래로 꾸물꾸물 기어가는 섬진강과 너른 평야들을 내려다 본다. 여기부터가 바로 ‘남도’라고 하는 곳인가.
산을 내려서며 합류한 19번 국도는 왼편으로 지리산 자락이요, 오른쪽으로 섬진강 줄기와 나란히 달려간다.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풍경을 마음 속 깊이 묻어두고 싶다.
국도변에는 곧 벚꽃이 만발할 것이다. 4월이면 발디딜 틈 없이 인파가 몰려든다는 쌍계 벚꽃터널. 아직은 헐벗은 나무가 봄을 한껏 들이마시며 기지개를 켠다. 차가 꺾어들어가는 초입에 그 유명한 화개장터를 알리는 비석이 서있다. 하지만 지금은 5일장도 아침 잠깐 반짝하면 끝날 만큼 명맥을 잃어 굳이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단다.
쌍계사 앞 산비탈을 야생차밭이 덮고 있다. 쌍계사를 지나 칠불사로 오르기 전 왼편으로는 아름다운 다원들이 이어진다. 그 중 ‘관향다원’이라는, 꼭꼭 숨어 찾기조차 힘든 찻집을 들렀다. 본래는 주로 지인들끼리 모여 차를 마시는 곳이라는데, 마당에서 올려다 보이는 지리산은 아찔한 현기증까지 느끼게 한다. 담백한 차 향기가 마음을 정갈하게 다져주는 것 같다.
화개마을에서 유명하다는 지리산대통밥과 재첩은 아직 시간이 일러 뒤로 미루고 강 건너 매화마을을 향해 출발한다. 하동쪽으로 몇 km만 더 내려가 있는 박경리 <토지>의 무대 평사리 최참판댁도 다음 기회로 미뤘다.
노랫말에도 있듯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은 지리산에서 남해까지 흐른다. 3월 매화 4월 벚꽃, 그리고 산수유와 개나리 순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봄꽃이 만발하는 섬진강은 국내 어느 강보다도 아름다운 강이다.
구례서부터 남쪽으로 섬진강을 따라가는 길은 유명한 광양땅 매화마을로 이어진다. 길가의 가로수도 매실나무. 벌써 하얗게 피어난 매화꽃이 바람에 한둘 잎을 떨어뜨린다. 매화마을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곳이 청매실농원이다.
야트막한 산길을 따라 빽빽이 피어난 매화 사이로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도열해 있다. 매실로 즙을 내고 장을 담그기 위해 마련한 전통 항아리의 수가 무려 2천여 개. 이처럼 대량 생산을 하면서도 흔한 플라스틱 용기를 쓰지 않고 전통 옹기를 고집하는 ‘매실명인’ 홍쌍리씨의 명성이 과연 헛된 이름이 아니다.
이곳에서는 매실이 흔하기도 하겠지만, 특별히 매실을 먹여가며 3년간 사육하는 한우가 바로 ‘일품매우’다.
만찬으로 택한 ‘매우(梅牛)’의 부드러운 육회와 안창살, 생갈비, 제비추리에 하루의 마지막 시간이 푸짐해진다. 전어내장으로 담근 돈배젓갈, 매실장아찌와 함께 나오는 돌솥밥. 한때 건강효능이 뛰어나다고 소문나 품귀를 겪기도 했던 매실이 음식에 사용되는 된장과 고추장에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반찬 하나하나가 깊고 독특한 맛을 낸다.
마침 2일과 7일이 여행일정에 포함되어 있다면 순천 재래시장을 구경할 수 있다. 이른 아침부터 시끌벅적 번화한 시장에는 여느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재래식’ 물건들이 흔하게도 널려있다.
전국 전국 최대의 5일장이라는 순천 재래시장과 인접한 전국 최대 규모의 대대리 갈대밭을 거쳐 보성으로 향한다. 오로지 노란 갈대만으로 빼곡히 채워진 35만 평 갈대밭의 한쪽을 잠시 걸어보는 여유는 놓치지 말 것.
키 큰 삼나무 숲이 가로수를 이룬 보성다원은 관광지로 개방돼 있어 드라마나 영화의 배경지로 자주 이용되고 있다. 산비탈에 조성된 단정한 차밭은 4월 곡우무렵이면 찻잎을 따기 시작하면서 한층 많은 관광객들로도 북적이게 된다.
율포 해변에서 해수녹차 사우나로 피로를 씻은 뒤 장흥군 수문포로 넘어간다. 섬 옆에 섬, 섬 뒤에 섬, 겹겹이 떠있는 섬 때문인지 바다는 커다란 호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점심으로 먹는 바지락회와 탕. 신맛과 매운맛이 조화롭게 입안 가득 퍼지는 바지락회는 무침도 좋고 밥과 함께 비벼먹는 것도 다시 또 오고 싶을 만큼 맛이 좋다. 여기에 키조개 회나 구이까지 곁들이면 그야말로 명품급 별미 여행.
드이어 마지막 코스인 선암사를 거쳐 남원역으로 돌아온다. 기차는 시간 맞춰 떠나고 시간 맞춰 돌아와야 하는 게 단점이자 장점이다. 예정된 시각에 어김없이 돌아와야 하고 여행에서 얻은 에너지를 안고 다시 분주한 일상 속으로 복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