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연차 전 회장 | ||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3부(재판장 홍승면)는 9월 16일 286억 원을 포탈하고 정·관계 인사들에게 불법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 징역 3년 6월에 벌금 300억 원을 선고했다. 또한 휴켐스 매각 청탁 등의 대가로 박 전 회장과 세종캐피탈 쪽에서 103억 원을 받은 혐의로 추가기소된 정대근 전 농협중앙회장에게는 징역 10년에 추징금 78억 7000만 원이 선고됐다.
이밖에도 박 전 회장에게 불법 정치자금 5000만 원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최철국 민주당 의원은 벌금 700만 원에 추징금 5000만 원, 사건 청탁 명목으로 1만 달러를 받은 혐의로 기소된 김종로 부산고검 검사에게는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과 추징금 1245만 원이 각각 선고됐다. 이로써 ‘박연차 게이트’ 법정 공방 1라운드가 마무리됐다.
하지만 법조계 안팎에서는 이번 법원 선고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특히 검찰의 구형량이 턱없이 낮다는 점과 박연차 사건을 진두지휘 했던 이인규 전 중수부장이 최근 박 전 회장을 변호해 온 로펌에 들어갔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
박연차 게이트’ 수사 과정에서 여의도 정치권과 법조계 주변에 떠돌았던 검찰과 박 전 회장 간의 ‘빅딜설’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는 형국이다. 박연차 게이트에 대한 법조계 안팎의 논란을 쫓아가봤다.
검찰이 기소한 박연차 전 회장의 혐의는 크게 네 가지다.
먼저 박 전 회장은 홍콩에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회사 이익금을 빼돌리는 등의 수법으로 세금 290억 원을 탈루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한 정상문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이나 박정규 전 민정수석 등 참여정부 시절 정·관계 인사를 비롯해 현 여권 인사들에게까지 뇌물 혹은 불법자금을 전달한 혐의도 받고 있다.
이외에도 국세청의 태광실업 세무조사 무마를 위해 현 정부 실세인 천신일 세중나모그룹 회장과 이명박 정부 초대 청와대 홍보비서관을 지낸 추부길 씨 등에게 로비를 벌인 혐의, 농협 자회사인 휴켐스를 인수하면서 정대근 당시 농협회장에게 20억 원의 뇌물을 준 혐의 등이 그것이다.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박 전 회장의 뇌물 액수만 50억 원이 넘고 탈세액도 300억 원에 가깝다. 현행법 상 탈세액이 20억 원을 넘어서면 무기징역이나 5년 이상의 유기징역을 선고해야 한다. 게다가 박 전 회장은 뇌물 공여와 알선수재 등의 혐의도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최대 22년 6월까지 실형 선고가 가능했다.
박 전 회장이 와병 중이고 자백을 했다는 점 등 그에 대한 여러 감경사유가 있겠지만 최소 징역 5년 이상은 선고돼야 정상이라는 게 법조계 관계자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법원은 박 전 회장에게 징역 3년 6월에 추징금 300억 원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형량을 선고했다. 탈세액만 따져도 법정 형량에 훨씬 못 미친다.
이날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이 이미 세무조사로 760억 원의 세금을 납부했고 포탈액 이상의 벌금이 선고돼 결국 1000억 원이 넘는 돈을 납부하게 됐다”며 “또 매년 3억 달러 이상의 외화벌이로 국가경제에 기여한 점, 장학금 및 복지사업에 거액을 기부해 온 점, 직원 등 4만여 명이 탄원서를 제출한 점, 고령에다 건강이 악화됐고 사실관계를 자백하는가 하면 재판에 성실히 임한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재판부는 또 다른 한편으로 “뇌물 공여자는 수수자보다 관대하게 처벌해온 게 관행이지만, 적극적으로 뇌물을 공여하고 공여액 이상의 이득을 얻었을 경우 엄격한 판결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박 전 회장이 재판부가 판단한 ‘일반적인 뇌물 공여자’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특히 박 전 회장은 단순 뇌물 공여자가 아니라 자기 사업의 이득을 위해 무차별적으로 돈을 살포했기 때문에 적극적 뇌물 공여자로 봐야 하며 이는 뇌물수수에 버금가는 범죄를 저질렀다고 봐야한다는 게 법조계 안팎의 평가다.
▲ 이인규 전 중수부장 | ||
박 전 회장에 대한 법원이 내린 형량은 함께 기소된 다른 인사들의 형량과 비교해 보면 훨씬 가볍다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농협의 자회사인 휴켐스 매각과정에서 박 전 회장에게 20억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정대근 전 농협 회장은 징역 10년이 선고됐다.
또한 박 전 회장으로부터 상품권 1억, 정대근 전 농협 회장으로부터 3억 원을 받고 대통령 특수활동비 12억 원을 빼돌린 혐의로 기소된 정상문 전 비서관에게는 징역 6년이 선고됐다. 박 전 회장으로부터 단순히 상품권 1억 원 어치를 받은 박정규 전 민정수석에게도 박 전 회장과 같은 징역 3년 6월이 떨어졌다.
하지만 재판부의 이 같은 선고는 애초 검찰 구형량 자체가 워낙 낮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지적이 많다. 검찰은 재판부에 박 전 회장을 기소하면서 징역 4년에 추징금 300억 원을 구형한 바 있다. 통상적으로 법원의 양형이 검찰의 구형량을 넘지 않는다는 점에 비춰볼 때 박 전 회장에 대한 1심 재판부의 양형은 그의 감경사유를 고려했을 경우 최대치였다는 것이다.
검찰 역시 박 전 회장의 구형 자체가 낮은 것은 박 전 회장이 관련 내용을 자백했기 때문에 감형 규정을 적용했다고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검찰은 수사 당시 브리핑에서 ‘증거를 들이대면 박 전 회장이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며 자신감을 여러 차례 내비친 바 있다. 어떤 말이 진실인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게다가 과거에 저질렀던 범죄로 다시 기소되면 중형을 선고하는 관례에 미뤄 볼 때 검찰은 이미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처벌을 받은 전례가 있는 박 전 회장의 전과도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를 놓고 법조계 안팎에서는 검찰과 박 전 회장 간에 사실상의 ‘플리바게닝’ (유죄협상제도 :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고 타인의 범죄혐의를 진술하는 대신 형량을 감형받는 제도)이 적용됐을 것이란 얘기가 설득력 있게 나돌고 있다.
결국, 박 전 회장이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한 참여정부 관련 인사에 대한 수사에 협조한 대가로 가벼운 형을 선고받은 게 아니냐는 의혹이 증폭되고 있어 검찰의 표적·보복 수사 논란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플리바게닝’ 제도는 법적으로 아직 도입되지 않은 상태다.
‘박연차 게이트’ 초기부터 불거진 표적수사 논란과 ‘검찰-박연차 빅딜설’은 이번 정기국회에서도 가장 큰 이슈로 떠오를 전망이다. 민주당 측은 국세청이 실시한 태광실업 세무조사부터 박 전 회장에 대한 검찰조사, 천신일 세중나모여행사 회장의 세무조사 무마 로비 의혹 등을 이번 국회에서 집중적으로 파헤친다는 전략이다. 민주당 정보위 측에서는 현재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보위 관계자는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 및 서거 정국을 거치면서 잠시 수그러들었던 참여정부에 대한 표적 수사와 관련한 진실을 이번 국감에서 반드시 밝혀낼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회장은 1심 선고가 내려진 지 하루 만인 9월 17일 선고 결과에 불복하고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박 전 회장 측은 “포탈 세금(286억 원)을 포함해 국세청이 부과한 세액 약 900억 원을 모두 납부했고 수사에도 적극 협조했는데 실형이 선고된 것은 형량이 지나치게 무겁다”며 “허리디스크 수술을 앞두고 있는 등 건강 상태도 악화돼 수감 생활이 불가능하다”고 항소 이유를 밝혔다.
박 전 회장에 대한 수사를 총 지휘했던 이인규 전 중수부장이 최근 박 전 회장을 변호해 온 로펌에 합류했다는 점도 ‘빅딜설’을 부추기고 있다.
법무법인 ‘바른’은 9월 11일 박 전 회장의 1심 선고가 이뤄진 뒤에 이 전 부장을 영입하기로 했다고 밝히면서 항소심 변론은 맡지 않을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이 전 부장은 ‘박연차 게이트’를 수사하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지난 7월 7일 사직서를 내고 검찰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수사 내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가 과연 박 전 회장과 관련된 내용을 로펌 내에서 마냥 함구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법조계 인사들은 그리 많지 않다. ‘바른’은 ‘박연차 게이트’ 수사 당시 대검 차장을 지낸 문성우 변호사를 대표 변호사로 영입하기도 했다.
이제 관심은 함께 기소된 나머지 정치인들에게 모아지고 있다. 박 전 회장에게 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이광재 민주당 의원은 9월 23일, 김정권 한나라당 의원은 9월 25일 각각 1심 선고공판이 예정돼 있다. 서갑원 민주당 의원과 박진 한나라당 의원은 21일과 24일에 각각 결심공판이 잡혀 있다. 가장 관심이 모아지는 인물은 박 전 회장의 구명운동을 벌인 것으로 알려진 천신일 세중나모여행사 회장(66)인데 천 회장과 관련된 내용은 여전히 심리가 진행 중이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