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국내 유일의 금만평야. 아래는 메뚜기 잡기 행사. | ||
가을을 기쁘게 맞을 수 있는 건 여름내 땀과 눈물을 뿌린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지난 여름을 한결같이 들판을 지켜온 농부들은 이제 송알송알 맺힌 벼 이삭이 누런 빛으로 영글어가는 것을 여유롭게 지켜보고 있다. 이제부터 한달이 채 안되어 들판은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 것이고 농부들은 가을걷이를 시작하며 신명나는 잔치도 한판 벌이게 될 것이다.
여름 더위가 걷히기 무섭게 서늘한 바람이 불고 있다. 가을 바람을 헤치고 김제 들판으로 달려갔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너른 곡창지대다.
가을이 시원하단 걸 한눈에 느끼고 싶다면 김제 땅으로 달려가길 권하고 싶다. 우리나라에선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 동시에 야트막한 야산에 올라가 보면 탁트인 수평선도 볼수 있는 곳. 지평선과 수평선을 한데 볼 수 있는 김제땅에선 아무리 답답한 마음이라도 한꺼번에 탁 트이는 시원함을 맛볼 수 있다.
이제는 우리 나라를 ‘농업국가’라 부르기도 어렵게 되었지만, 농사가 산업의 전부이던 시절 부자의 기준은 의레 몇 마지기 농지에서 몇 섬의 쌀을 거두는가에 있었다. 천석꾼 만석꾼은 요즘말로 하면 갑부, 재벌과도 맞먹는 말이니 전국을 통털어 만석꾼이라 불리는 사람의 수는 손가락을 꼽아 능히 헤아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 시절, 쌀이 부의 기준이던 때를 기준으로 한다면 전북 김제 땅에는 부자가 꽤나 많았을 것도 같다. 빙빙 둘러 사방 몇십리가 모두 평야가 아닌가.
옥구 익산과 맞닿은 북쪽으로는 만경강이 흐르고 부안 신태인과 이어지는 남부에는 동진강이 흐르며 물을 보태준다. 하여 만경-김제의 지명을 따 ‘금만평야’라 부르고 있다. 교과서에서 배운 한반도의 곡창 ‘호남평야’가 바로 이곳이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넓은 농지인 금만평야는 지평선을 볼수 있는 국내 유일의 평지이기도 하다.
과연 이곳 유물전시관에 가면 50가마의 알곡을 한꺼번에 담아두었다는 거대한 곡갑이 있다. 많은 양의 곡식은 보통 가마 단위로 담아 곳간이나 창고에 쌓아두게 마련인데, 50가마나 되는 분량의 알곡을 한꺼번에 담는 뒤주가 있었다는 건 그만큼 엄청난 양의 곡식이 생산되었다는 뜻이리라.
|
||
| ▲ 김제 모악산에 위치한 금산사. 사진 속 3층 건축물이 미륵전이다. | ||
국내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임을 기념하여 김제에선 10월마다 ‘지평선 축제’가 열리며, 요즘 이곳에서 나는 쌀은 ‘지평선 쌀’이란 상표가 붙는다.
김제 옥구 만경 이런 이름들은 문학을 통해서도 낯설지 않은 지명들이다.
‘빙빙둘러 농지’라는 천혜의 입지조건은 그것만큼 다양한 수난의 역사와도 연결되어 있다.
일제시대로 돌아가면 이 땅에서 벌어진 농지와 식량수탈의 태반은 바로 금만평야를 무대로 이루어졌다. 호남선 경부선 같은 철로가 놓일 때, 일제가 굳이 호남선에서부터 항만 군산까지 지선을 놓았던 것도 바로 너른 호남 평야의 곡물을 싣고 나가기 위한 수작이었다.
동양척식회사라든가 교본 웅본 아부 다목 같은 일제의 농지회사들이 김제에 사무실을 두고 금만평야 곳곳의 농지를 차지했으며, 가을이면 추수한 것을 거둬들이고 일년내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빼돌리는 역할을 했다.
절실했던 기쁨이나 절박했던 아픔은 문학이 되고 음악이 되어 역사에 아로새겨지게 마련이다.
한국 문학의 걸작으로 꼽히는 조정래 선생의 장편 <아리랑>은 이곳, 김제에서 펼쳐진 수탈과 압제의 역사를 담고 있다. 금만평야를 대표하는 유적지 벽골제 안에 ‘아리랑 문학비’가 서있고 그 가까운 곳에 ‘조정래 아리랑문학관’이 서 있다.
그보다 훨씬 전의 이야기도 벽골제에 얽힌 전설이 되어 전해오고 있다. 신라 원성왕때 벽골제를 수리하기 위해 경주에서 원덕랑이 파견되었는데, 벽골제에 사는 청룡이 농사를 방해하기 위해 심술궂게 폭우를 퍼부으므로 주민들은 처녀를 바치는 제사를 지내 청룡을 달래야 한다고 믿게 된다. 이때 멀리 경주에서 원덕랑의 약혼녀가 찾아오자 사람들은 그녀를 제물로 바치려 하는데, 이곳 태수 단야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라고 나서 자기 스스로 용의 제물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전설속의 심술궂은 용이란 또다른 수탈 권력의 비유가 아니겠는가.
벽골제는 이 땅에서 오래전부터 제대로 된 벼농사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유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본래 물을 가둬놓고 기르는 관개농업은 원시적 형태가 멀리 신석기 시대로부터 이미 시작됐다고 한다.
벽골제는 둘레길이가 무려 1백40㎞나 되는 거대한 저수지였다고 전해지는데, 이 정도의 크기라면 오늘날의 다목적 댐 못지 않게 너른 규모였을 것이다.
벽골제를 축조한 기술은 백제의 토목기술로 알려져 있으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것으로만 쳐도 축조연대는 서기 330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직 백제가 웅진이나 사비로 수도를 옮겨오기도 전의 일이었으니 벽골제는 백제의 유적이라기 보다는 원삼국시대 마한의 유물이라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 규모가 큰 만큼 제방을 쌓는 기술도 대단히 발달된 것이었다. 후에 백제가 멀리 왜나라까지 제방 토목기술을 전수했다고 하는데, 그 기술의 원전은 벽골제에서 유래했다.
벽골제는 이후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수차례 보수되다가 고려말 인종 임금에 이르러 폐지되고 만다. <고려사>에 임금이 벽골제를 보수한 뒤 한 무당의 말을 듣고 제방을 헐어버렸다 하니, 그것이 너른 농지의 확보로 이어져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인지 아까운 문화유산 하나를 사라지게 만든 나쁜 결과를 가져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
||
| ▲ 바다가 보이는 망해사(위)와 거대한 곡갑.(왼쪽아래) | ||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도 등장하는 유서깊은 고찰이다. 후백제의 견훤이 아들에게 사로잡혀 유폐되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고려 문종 때에는 건물의 수가 무려 86개 동 43개 암자에 이르는 대가람이었고 조선조에 대적광전이 세워졌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집합처가 되어 국난극복의 요람이 되었으나 왜구들이 다시 침략한 정유재란때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며 대부분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한다.
이후 재건된 금산사는 규모로 치면 화려했던 기록속의 전성기때에 미칠 바가 못되지만, 한국 불교 미륵신앙의 중심지로 다시 발돋움하고 있다. 경내에 아직 수많은 보물들이 남아 있다.
김제 서쪽 끝에 금산사의 말사로서 작은 절이 있는데, 서해바다에 가장 인접했다는 망해사(望海寺)다(진봉면 심포리). 바다에 접한 벼랑 위에 있어 바로 앞으로 바다가 내려다 보이고 멀리 수평선으로 낙조의 모습을 보기가 좋다.
김제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서김제IC, 호남고속도로 김제IC, 호남선 열차 김제역(KTX포함) 이용.
금산사는 호남고속도로 금산사IC 이용해 김제와 반대방향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된다. 모악산 도립공원내에 있다. 김제 시내에서 남쪽으로 벽골제와 아리랑문학관이, 만경을 거쳐 서쪽 바다가에 망해사가 있다.
숙소와 식당들은 모악산(금산사) 주변과 시내에 모여있고 전주가 가깝다. 망해사 바로 아래 심포항에는 많은 고깃배가 떠있고 해가 진 뒤에도 불을 밝힌 포구의 횟집들이 늘어서 있다.
지평선 축제 안내
김제 금만평야를 배경으로 가을의 황금 들판과 지평선을 함께 즐기는 지평선 축제는 매년 10월에 열린다. 올해는 10월7일부터 10일까지 4일간 예정돼 있다. 전통 농업을 실감할 수 있는 체험 프로그램들과 소달구지 타기, 전통놀이와 허수아비 만들기, 음악축제 등 오락 프로그램, 문학과 사찰 유적지 등을 탐방하고 참여하는 프로그램 등 내용이 실속있다. 관광공사 지정 2004우수문화관광축제 중 하나다.
축제는 10월에 열리지만 9월부터 누렇게 물들어가는 평야의 풍요로움을 느낄만한 가을 여행지로 적격이다.
축제 기간중 금산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며 농경문화도 체험할 수 있는 문화체험 프로그램이 축제기획단과 금산사 공동으로 계획되어 있다. 1박2일, 2박3일 두차례로 나누어 진행하는데 외국인도 참가할수 있다. 1박 프록그램이 성인 3만원 청소년 2만원. 이미 예약이 시작돼 9월15일 마감된다. 063-540-3324(축제기획단). 금산사는 이 기간 외에도 산사체험 프로그램을 연중 진행하고 있다. 063-246-3679(금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