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석사. 밟기만 해도 노란 물이 들 것 같은 은행잎이 지천이다. | ||
영주 단산면 좌석리로 진입해도 되지만 단양 영춘면 의풍리 길을 택했다. 저녁 무렵 소백연봉을 적시는 부석사의 일몰이 욕심이 나서기도 하고, 김삿갓 계곡의 단풍 그늘에 앉아 한나절 쉬어갈 참에서다. 고개를 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두어 시간. 하지만 대부분 1~2시간을 더 잡는다. 쉬어 가는 만큼 얻는 게 많아서다.
중앙고속도로 북단양IC에서 빠져 도담삼봉을 거치면 단양이다. 단양에서부터 김삿갓 계곡까지는 줄곧 남한강을 끼고 달리는 드라이브 길. 길따라 굽이굽이 이어지는 물길이 제법 살갑다. 물길 굽은 것은 강물이 쉬어가라는 자연의 배려라 했던가. 사람도 좀 강물 따라 쉬어 갔으면 좋겠다. 남한강 래프팅 출발지이기도 한 대야교에서 영월 방향 88번 지방도로와 헤어져 차는 봉화로 향한다.
펜션들이 터를 잡은 와석유원지를 지나 옥동초등학교 주석분교 앞에서 우회전하면 고치령 여행의 들머리인 김삿갓 계곡이다. 골어구 든골 싸리골 곡골 너둔이…. 이름도 예쁜 마을들이 줄지어 늘어선 길을 따라 가다 보니 뜬금없이 미술관이 나타난다.
오지와 미술관, 조화가 묘하지만 어쨌든 미술관으로 들어선다. 한국풍경 전문화가 임상빈씨의 50평 규모 개인 전시관인 묵산미술관(033-374-7249). 펜션과 찻집을 부대시설로 거느린 무료 관람 시설. 소나무 그늘이 운치있는 계곡 가에 자리잡고 있다.
미술관에서 즐기는 차 한잔에도 짙은 솔향이 배어있다. 미술관을 나와 얼마 안가 조선민화박물관(375-6100)까지 모습을 드러낸다. 오지에 이 무슨 문화시설들의 호황이란 말인가. 들뜬 기분 반, 야릇한 기분 반으로 가파른 진입로를 오른다. 이름 그대로 조선민화 2백여 점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역사책, 혹은 미술책에서만 보던 그림들을 만날 수 있어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좋아한다.
민화박물관에서부터 삿갓묘가 있는 노루목까지는 그저 계곡만 끼고 달리는 드라이브 길이다. 10분여에 불과한 길이지만, 잡목으로 어우러진 형형색색의 단풍이 반갑고 곱다.
드디어 계곡의 끝머리라 할 수 있는 노루목. 방랑 시인 난고 김병연의 생가터와 묘소가 있는 곳이다. 삿갓묘보다 묘소로 오르는 진입로의 공원이 볼 만하다. 삿갓묘를 나와 단양으로 향하면 의풍리에서 길이 갈라진다. 당연히 의풍교 앞에서 우회전, 고치령 길로 접어든다.
길은 곧 소백산국립공원 이정표가 있는 의풍교 앞에서부터 비포장이다. 먼지 풀풀 날리는 길. 길이 좁아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정도다. 이제야 오프로드 맛이 제대로 난다.
의풍리의 마지막 동네인 고치골을 지나 차는 드디어 경상북도 영주 땅. 아직은 푸른 기가 도는 이깔나무 저편으로 ‘선비의 고장 영주’라는 큼지막한 표석이 보인다. 여기서부터는 고치령 아랫마을 마락리 초입 셋밭이다.
누군가 일부러 심어 놓은 듯 두 땅은 이깔나무로 금 그어져 있다. 짐 실은 말들이 좁고 험한 고갯길에서 종종 벼랑으로 굴러떨어져 마락리라 불렸다는데, 의풍리 쪽보다 외려 길도 넓고 평평해 다니기 좋다. 십수년 전 폐교돼 청소년수련장으로 변한 옥대초등학교 마락분교를 지나 차는 또 가을 내린 숲길을 달린다.
▲ 고치령 노란 이깔나무 숲. 그림 속을 달리듯이 길이 꽤 운치있다(위),영주 선비촌. 고택 열두 채가 복원돼 있어 조선시대의 생활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 ||
이깔나무가 철옹성을 친 듯 주위가 노란 파스텔톤의 가을 속이라면 믿을까. 바퀴 지나는 자리마다 노란 물이 흥건하다. 길은 오를수록 가팔라지고, 지그재그로 구불거린다. 그렇게 10분이면 해발 760m 고치령 정상에 이른다.
광장처럼 널찍한 고치령은 단종의 애환이 서린 백두대간의 주능선 중 하나. 백두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태백산까지 흘러내린 백두대간이 고치령이 있는 이 소백산에서 꺾어지고, 대간은 고치령을 거쳐 국망봉과 소백산 비로봉을 지나 죽령을 넘어 대야산, 속리산으로 뻗어간다. 하지만 단종과 금성대군을 모셨다는 산신각과 백두대간 종주자 몇몇의 모습만 보일 뿐 고치령은 적막하다.
“우리 젊었을 때만 해도 영주 부석장이 엄청 컸더래요. 그래서 영월이나 영춘 대신 고치령을 넘어다녔지요. 새벽에 나가믄 한밤중에 돌아오는 하룻길이었는데도 사람들이 엄청 많았더래요. 아직도 우리들은 이 길을 넘어다닌다니까요.” 마락리 주민인 듯한 노인의 사투리가 구수한 온기로 다가온다.
이제, 정상을 밟았으니 서녘으로 길을 낸 해를 따라 하산할 일만 남았다. 의풍에서 고치령까지와는 달리 하산길은 제법 화려한 단풍 숲. 길은 여전히 비포장이고, 종종 콘크리트가 깔려 있지만 반대편에 비해 두 배는 더 넓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소녀가 처음 한 화장처럼 정리되지 않은 단풍이랄까. 고치령을 은밀히 넘나들며 단종 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잃은 금성대군처럼 안쓰러움이 남는다. 차는 속력을 내 어느새 연화 1, 2, 3교를 지나고, 연화폭포 안내푯말을 거쳐 비포장길이 끝나는 종착지 세거리쯤. 좌석초등학교와 함께 고치령 여정은 끝이 난다.
늦은 오후, 정확하게는 4시30분경 부석사에 도착했다. 은행나무 숲길엔 벌써 해 그림자가 길다. 가을 부석사라, 그 낭만은 사실 얘기할 것도 없을 만큼 유명하다.
노란 은행잎이 지천으로 깔려 걸을 때마다 발끝으로 노란 물이 스미는 이 길은 왠지 특별하다. 돌아볼 때마다 늘 뒤를 지키는 소백연봉이 있어 그러하고, 늦가을 오후의 절집을 기대어 바라볼 수 있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이 있어서다.
허나 적막은 옛말이다. 토요일임에도 시끌벅적하다. ‘평일에 올 걸’ 후회막급이다. 사람에 치어 걷다보니 천왕문을 지나 안양루에 오른 것도 몰랐다. 정신을 차려보니 해는 어느새 소백연봉에 걸려 아슬아슬하고, 사람들의 함성은 지리산에라도 오른 듯 커져 있었다.
▲ 김삿갓 공원, 조선민화박물관, 고치령 성황당(위부터). | ||
허나 어찌하랴. 겹겹이 포개어진 소백연봉 위로 붉은 빛이 돌기 시작하더니 이내 쑥 가라앉아 버린다. 기대처럼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부석사에 내린 늦가을 오후의 햇살을 쬔 것만으로도 행복한 기분이 든다. 그건 아마도 부석사가 수십 명의 관광객들로 제 아무리 시끄러워도 소백연봉의 아름다움을 지워내지 못했음이리라. 고치령에서의 고즈넉함이 알게 모르게 한몫 했음이리라. 고치령이 벌써 그립다.
소백산 가는 길에
중앙고속도로 풍기IC로 진입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부석사의 일몰 풍광에 욕심이 난다면 단양 의풍리로 진입한다. 중앙고속도로 단양IC에서 빠진 다음, 가곡 방향 59번 국도-온달산성 입구에서 595번 지방도로-김삿갓계곡 가는 길. 고치령 길은 김삿갓 계곡 상류에 있는 의풍리 의풍교가 출발점이다. 거리는 총 22.5km.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 세거리(좌석분교터)로 빠져나와 우회전해 931번 지방도로를 타면 해질녘쯤 부석사에 닿게 된다. 영주에서 진입할 때는 부석사 가기 전 931번 지방도로, 단산면 옥대리 세거리에서 좌석리 표지판을 보고 좌회전하면 된다.
화장실만큼은 수세식
부석사 일몰을 감상한 후엔, 영주 선비촌에서의 하룻밤이 제격이다. 지난 9월22일 개촌한 선비촌은 1만7천여 평에 세워진 매머드급 민속촌. 영주의 고택 12채가 원형대로 재현돼 조선시대 양반과 상민의 생활상을 두루 체험할 수 있다. 조선시대 저잣거리에서부터 고래등 같은 기와집, 초가 정자 물레방아 곳집까지 무려 76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재현된 전통가옥 12채에서 고가체험, 즉 숙박도 가능하다. 낮에는 관람, 밤에는 숙박체험이 되는 셈이다. 하룻밤 숙박료는 초가 2만~4만원, 중류가옥 2만5천~4만원, 고택 3만~5만원. 모든 것이 조선식이지만 화장실만은 수세식이며, 홈페이지를 통한 인터넷 실시간 예약이 가능하고, 주말 예약은 한 달 전쯤 해야 가능하다. 054-638-7114, www.sunbitown.com
푸짐한 가을 넉넉한 인심
고치령엔 번듯한 식당 하나 없다. 별미를 맛보려면 선비촌 가까이에 있는 순흥묵집(054-632-2023)으로 가자. 조밥과 함께 양념한 묵을 썰어 내놓는데, 제법 이름이 났다. 중앙고속도로 풍기IC로 가는 931번 지방도로변 풍기인삼갈비집(054-635-2382)도 인삼갈비탕으로 유명하다. 한 그릇을 다 비우지 못할 만큼 양이 푸짐하다. 선비촌 내에 선비촌묵밥집, 인삼주막, 종갓집 등 저잣거리 밥집들도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