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적암 경내에 쌓인 눈을 치우는 스님(위)과 겨울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중간).고드름이 매달린 내장산 계곡. | ||
전북 정읍시와 순창군 경계에 자리한 내장산은 해발 722m.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지만, ‘호남의 내금강’이라 불릴 만큼 뛰어난 명산이다. 내장산의 원래 이름은 영은산. 그러나 수많은 계곡이 구불구불한 양의 내장(九折羊腸)과 비슷하다 하여 내장으로 불리다가 지금의 내장산(內藏山)이 됐다.
내장산 겨울산행은 내장사가 기점이다. 백제 무왕 636년 창건된 이 절은 50여 동의 건물이 들어설 정도로 대단한 사세를 자랑했으나 정유재란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크게 기울고 현재는 요사채까지 합해 10여 동이 남아 있다.
동종의 맑은 소리는 어스름도 채 걷히지 않은 내장산의 공기를 가르며 2km 넘게 떨어진 산 아래 집단시설지구 내 민박집 창문까지 뚫고 들어온다. 그 소리에 잠이 깬 등산객들은 서둘러 채비를 갖추고 하나 둘 산으로 올라선다.
20여 분 눈길을 걸어 도착한 내장사 경내에는 마치 단풍이 철을 모르고 다시 피어나기라도 한 듯 여남은 그루의 감나무에 새빨간 홍시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까치밥으로 남겨 놓은 ‘산감’이다.
병풍처럼 펼쳐진 월영봉 서래봉 불출봉 망해봉 연지봉 까지봉 신선봉 연자봉 장군봉을 ‘내장 9봉’이라 한다. 봉우리 수만큼이나 등산길도 다양하다.
그러나 겨울에는 해가 짧기 때문에 내장사에서 출발해 서래봉과 불출봉을 오르는 코스나 또는 연자봉을 거쳐 내장산 주봉 신선봉에 오르는 코스를 택하는 게 보통이다. 두 코스 모두 왕복 4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등산의 묘미는 서래봉 코스가 더 낫다. 짜릿한 암릉을 오르는 재미가 다소 부드러운 신선봉 쪽보다 더하다. 서두르기만 한다면야 완전 일주는 아니더라도 서래봉에서부터 신선봉까지 둘러볼 수도 있기는 하다.
▲ 서래봉 정상을 향하는 등산객들(위). 눈으로 하얗게 변한 내장사 경내는 세상의 소리가 다 묻힐 듯 고요하다. | ||
불출봉 등성 원적암 바로 앞에 수령 5백 년 가까운 아름드리 비자나무 3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겨울임에도 비자나무 숲에는 특유의 향내가 가득하다. 비자나무는 주목과 비슷한 모양이지만 잎이 더 날카롭다. 9∼10월경 열리는 열매는 말려두고 약재로 사용한다.
원적암은 스님 한 명이 홀로 꾸려나가는 아주 작은 암자다. 크기는 채 1백 평이 안돼 보인다. 규모가 워낙 작다 보니 달리 힘든 것은 없다지만 눈을 치우는 일은 보통 힘든 게 아닌 모양이다. 연신 땀을 훔치며 눈을 치우는 스님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돼 있다.
원적암을 나서 백련사로 방향을 튼다. 백련사까지는 30분이면 족하다. 이곳은 내장산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앞으로는 신선봉과 연자봉이 호위하고 뒤로는 서래봉이 버티고 있다. 이 절 또한 백제 말인 660년에 창건된 절이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풍경소리와 스님의 독경소리만이 나지막하게 퍼질 뿐. 평화로운 산사에 잠시 머무는 것만으로 근심도 잡념도 모두 사라지고 마음은 벌써 득도한 듯 거울처럼 맑아진다.
본격적인 산행은 백련사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서래봉까지는 1시간. 급경사와 암릉까지 난코스가 이어진다. 눈이 쌓여 미끄러운 길은 서래봉으로 향하는 걸음을 더욱 더디게 만든다. 그렇다고 초조해하거나 길을 재촉할 게 무어냐. 가다 지치면 쉬어 가면 그만이다. 부는 바람에 땀도 식히고 앞만 보고 오르느라 놓쳤던 주변의 설경에도 취해보자.
서래봉에 오르면 하얗게 눈에 묻힌 정읍 시내가 내장산의 온전한 모습과 함께 한눈에 들어온다. 서래봉은 논 바닥을 고르는 데 쓰는 써레와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높이 622m인 서래봉은 주봉인 신선봉(763m)에 비해 100m 이상 낮다. 그러나 등산의 재미도 재미거니와 겨울철 서래봉 주변에 눈이 더 많아서 인기가 있다. 특히 서래봉에서 불출봉까지는 바람과 햇빛이 닿지 않는 곳이 많아 한번 내린 눈이 쉽게 녹지 않고 쌓이기도 많이 쌓이는 편이다. 그래서 이곳의 눈꽃은 다른 봉우리의 나무들이 앙상한 뼈마디를 드러낸 후에도 고스란히 남아 환상적인 광경을 연출한다.
▲ 내장사 스님들의 요사채 뒤로 산감나무에 산감이 빨간 단풍처럼 주렁주렁 달려있다. | ||
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1시간 30분쯤 길을 강행한다면 높이 610m의 불출봉에 오를 수 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왼쪽은 원적암으로 내려가는 길이고 앞은 망해봉(650m) 가는 길이다. 시간이 넉넉하다면 망해봉을 오르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망해봉에서는 바로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없으니 이쯤에서 시계를 보고 결정하자.
망해봉까지 갔다면 어쩔 수 없이 연지봉(670m)을 거쳐 까치봉(717m)까지 이동해야 한다. 서래봉에서 망해봉 코스가 쇠사다리 등을 이용하며 올라야 하는 가파른 길인 반면 연지봉과 까치봉은 부드러운 능선으로 눈 쌓인 겨울에도 1시간이면 충분히 주파 가능하다. 까치봉에서 10분쯤 걸으면 오른쪽에 백암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있고 30여 분쯤 더 가면 내장산의 정상인 신선봉에 닿는다.
겨울산행에서 하산길은 매우 위험하다. 가파른 곳에서 눈에 미끌어져 넘어질 경우 큰 부상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아이젠과 스틱이 필수다.
한편 신선봉 정상에서 하산할 때는 대기리 방향으로 향하여 백양사도 둘러볼 수 있다. 거대한 바위에 둘러싸여 양옆으로 흐르는 계곡이 사철 마르지 않는 백양사는 눈이 내리면 그 운치를 더한다. 내장산은 내장사 백련사 백양사 등 눈 덮인 호젓한 사찰 기행으로도 추천할 만하다.
여행 Tip
내장산 케이블카가 연자봉 중턱까지 운행한다. 내장산 케이블카의 위치는 내장산 일주문 2백m 전방 우화정에 자리하고 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행. 연자봉 케이블카 종착점 바로 아래 내장산 전망대가 있다. 케이블카 요금은 왕복 2천5백원, 편도 1천7백원.
▲내장산국립공원: 063-538-7875
▲교통편: 호남선 열차 혹은 고속버스 이용 정읍 도착한 뒤 71번 시내버스 이용, 내장산 터미널. 자가용은 호남고속도로 정읍IC에서 우회전. 내장산 팻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