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 캡처.
취임 이후 문 대통령은 초등학교에 가서나, 대학에 가거나, 재난현장의 이재민들을 만나서나 한결같이 자신이 말을 먼저 하기보다 충분히 듣고 난 뒤 그 부분에 대한 답변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청와대를 출입하는 기자들과의 회견을 하는 자리의 주제어도 ‘국민이 묻고, 대통령이 답하다’였다.
이런 연장선으로 문재인 정부는 취임 직후 청와대 홈페이지에 국민청원 게시판을 도입했다. 국민들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거나 궁금한 부분이 있다면 청와대가 게시판을 통해 파악, 직접 답을 내놓고 그 답을 국민들과 공유하겠다는 취지였다.
수십만 명이 몰린 청원도 나타나는 등 성공적이라는 평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하나마나한 답변이 나온다’는 불평도 터져 나온다. 답변이 부적절했다는 논란으로 번지면서 청와대가 곤욕을 치른 사례도 있었다. “청와대가 모든 국정을 독점하는 국가주의의 전형”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다. 포퓰리즘이며 떼법을 부추긴다는 야당의 혹평도 있다. 명암이 교차하는 국민청원, 과연 장수 게시판이 될 수 있을까?
#인기 폭발한 것은 사실
청와대의 국민청원은 수치로만 보면 ‘인기 폭발’이다. 문재인 정부가 취임 100일을 기념해 지난해 8월 19일부터 시작한 국민청원 제도는 각종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국민적 관심을 만들어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난해 청원 제도가 시작된 이후 2월 21일 기준으로 86건의 국민청원 게시글이 올라왔다. 이 가운데 정부, 청와대 관계자가 직접 답해야 하는 청원 구성요건(30일 내 20만 명 이상 동의)을 갖춰 답변이 이뤄진 사례도 8건이나 된다. 청소년 보호법 폐지, 낙태죄 폐지, 주취감형 폐지, 조두순 출소반대, 권역외상센터 지원 강화, 전기용품 및 생활용품 안전관리법(전안법) 폐지, 가상화폐(암호화폐) 규제 반대, 정형식 판사(삼성 이재용 부회장 2심 선고 재판부) 특별감사 등에 대한 청원이 이뤄진 뒤 청와대가 답변을 내놨다.
국민청원에 대한 열기는 블로그,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 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지난해 12월 4일 인공지능(AI) 기반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의 국민청원 관련 빅데이터(2017년 8월 19일부터 같은 해 11월 29일까지 국민청원과 관련된 블로그 3712만 건, 트위터 12억 694만 건, 뉴스 257만 건을 대상으로 진행)를 보면 청와대 국민청원 언급량은 8월 2585건에 불과했지만 9월 2만 7085건에 달해 10배 이상 늘어난 데 이어 10월 5만 8355건, 11월 6만 7593건으로 급증세가 이어졌다.
국민청원에 대한 빅데이터 여론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국민청원 게시글에 언급된 감성어를 살펴볼 경우, 긍정적 감성어를 사용한 비율은 72%에 달했으며 부정적 감성어 비율은 28%에 머물렀다. 긍정적 감성어로는 ‘달성하다’(5726건), ‘마음에 들다’(5500건), ‘감사하다’(4322건) 등 평소에 관심을 둔 이슈가 국민청원 게시글로 올라왔음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때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올 들어서도 청원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뜨겁다.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 추월 경기에서 빚어진 팀워크 논란의 진상을 밝혀달라는 청원의 참여자가 하루 만에 20만 명을 돌파하는 등 청원 게시가 봇물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청원은 청와대가 공식적으로 답해야 할 15번째 국민청원이 됐으며 현재 답변 요건을 충족해 답변이 대기상태인 청원도 ▷나경원 의원 평창올림픽 위원직 파면 ▷미성년자 성폭행 형량 상향 ▷대전 아파트 단지 내 횡단보도 교통사고 ▷초중고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국회의원 급여를 최저시급으로 책정 ▷네이버에 대한 철저한 수사 등 6건이다.
#아류 게시판까지 유행
청와대의 국민청원 게시판이 인기를 끌자 다른 정부부처 또는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벤치마킹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류영진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은 이르면 3월 ‘식품·의약품 국민청원검사제도’를 도입하고 이로 인해 무고한 기업이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최근 기자회견에서 밝혔다. 예를 들어 맘 카페에서 이유식을 검사해달라고 하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범위에서 검사를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류 처장 언급에 따르면 식약처에서도 국민청원검사제가 도입되는 셈이다.
식약처는 이르면 3월부터 홈페이지에 국민청원 창구를 마련하고, 일정 수 이상의 국민이 조사하기를 원하는 식품·의약품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공개하는 제도를 운용할 예정이다. 식약처는 각계 의견을 수렴해 청원이 성사되는 기준과 검사 방법, 공개 방법 등을 정한다는 방침이다.
일반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경상북도 소방본부도 1월 24일 청와대 국민청원제도와 비슷한 소방청원제도를 전국에서 처음으로 도입했다.
경북도 소방본부는 ‘경북소방 소통방’이란 내부 정보시스템에 소방공무원이 업무, 복지 등에 의견을 올리는 방식으로 소방청원제도를 운용한다. 올라온 의견 중 3주간 소방공무원 3656명 가운데 600명 이상 추천하거나 동의한 의견에 답변한다. 소방공무원은 계급제로 상명하복 형태에 익숙해 다양한 의견수렴과 소통 방법이 부족하다는 지적에 따라 이 제도를 도입했다.
#뻔한 답변만 나온다고?
국민청원이 쏟아지고 있지만 청와대가 막상 내놓은 답변은 ‘뻔한 것’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국정농단 게이트에 연루돼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2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한 정형식 서울고법 부장판사에 대한 특별감사를 요구한 국민청원에 대해서는 청와대가 “판사를 파면할 권한은 없다”는 상식적 답을 내놨다. 이 청원은 한 달간 24만 1000여 명이 참여했다.
암호화폐(가상화폐) 규제 반대에 대해서도 “가상통화 거래 과정에서의 불법행위와 불투명성은 막고, 블록체인 기술은 적극 육성해 나간다는 게 정부의 기본 방침이다. 현행법 테두리 내에서 가상통화 거래를 투명화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두고 있다”는 원론적 답이 나왔다. 이 청원에는 한 달간 28만 8000여 명이 몰렸다.
다른 청원에 대한 답도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이와 관련해 청와대 한 관계자는 “국민의 궁금증 해소도 국민청원 운용의 큰 목표 중 하나인 만큼 뚜렷한 해결책이 아니더라도 국민이 물어보고 싶은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한 해답을 주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청와대의 답변이 향후에도 ‘원론’과 ‘상식’ 수준을 넘어서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관심이 큰 현안과 관련한 청와대의 입장이 가져올 영향력을 고려해 답변을 더욱 더 신중하게 할 수밖에 없다는 분석 때문이다.
실제로 청와대는 국민청원 게시판 운용 초기에 답변 때문에 큰 홍역을 치르기도 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지난해 11월 낙태죄 폐지에 대한 청원 답변을 내놓으면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임신중절에 대해 ‘우리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 측은 “조 수석이 교황의 발언을 왜곡해 인용했다”며 강력 반발했다. 천주교 측에 따르면 “교황은 이 인터뷰에서 낙태 문제를 두고 ‘교회의 가르침은 명확하다’며 낙태에 반대하는 가톨릭 교회의 기존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는 것이 천주교 측의 설명이다.
이에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과 천주교 신자인 박수현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같은달 29일 천주교 주교회의를 찾아 청와대가 최근 낙태죄 폐지와 관련해 밝힌 입장에 대한 천주교 측 의견을 들었다.
박 대변인은 만남을 가진 뒤 “청와대의 청원 답변 내용 중 교황님의 말씀은 기사를 압축하는 과정에 실수가 있었음을 말씀드렸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 조국 수석도 유감을 표했다고 천주교 측은 밝혔다. 청와대가 실수를 인정하고 유감을 표명한 것이다.
#비판도 적지 않지만 운용 계속될 듯
‘국민청원 게시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작지 않다. 특히 법원 판결에 대해 반발하며 이를 국민청원 대상으로까지 만들어지자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자유한국당 허성우 수석부대변인은 2월 8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재판장에 대한 파면요구가 쇄도하고 있다. 재판장 개인에 대한 근거 없는 유언비어와 인격 모독적 발언까지 난무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직접민주주의를 위한 소통의 일환으로 개설했다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 초법적인 요구를 하는 ‘떼법의 창구’가 되어버렸다”며 “더 심각한 문제는 나라를 운영해야 하는 집권 여당이 떼법에 동조하면서 원색적인 막말을 서슴지 않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보수진영의 한 전직 국회의원은 “직접 민주주의 실험을 하겠다는 취지는 좋지만 정치는 어디까지나 이상이 아니고 현실이다. 모든 민원이 청와대로 몰리고 청와대가 나라의 모든 일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모든 공직자가 청와대만 보고 있다면 제대로 된 국정 운영이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청와대도 문제가 있음을 솔직히 인정했다.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2월 21일 국회 운영위 업무보고에서 국민청원제도에 대해 “(일부) 답변하기 부적절한 성격의 내용들이 올라온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임 실장은 이날 국민청원제도 정비 필요성을 묻는 자유한국당 윤재옥 의원 질의에 이같이 답하면서 “어쨌든 답변하겠다고 약속한 이상 곤란한 질문이라도 원론적 답변이라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 실장은 “그럼에도 참 곤란한 것은 예를 든 것처럼 한 의원님의 문제나 국회와 관련한 것이 올라오거나 할 때 저희가 답변하기 곤란해서, 일단 20만 명을 넘으면 답변하겠다고 한 것을 어떻게 할지…”라며 어려움을 털어놨다.
임 실장이 언급한 ‘한 의원님’의 문제는 지난달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 올라온 한국당 나경원 의원의 평창동계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직 파면 요구 청원을 뜻하는 것이다. 이 청원에는 20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나 의원은 여자 아이스하키팀 단일팀 구성 등에 반대하는 서한을 IOC(국제올림픽위원회)와 IPC(국제패럴림픽위원회)에 보내 국민청원 대상에 올랐다. 청와대는 한 달 내에 20만 명 이상 청원에 참여할 경우 관련 청와대 수석이나 국무위원이 답변을 한다는 원칙을 세워놓고 있다.
하지만 청와대는 부족한 부분을 고쳐가면서 국민청원 게시판을 5년 내내 이어지는 ‘장수 정책’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해 11월 20일 수석·보좌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청와대 국민소통광장에 국민청원이 많이 접수되는데 수십만 명이 참여한 청원도 있다.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 생각한다”며 국민청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현행 법·제도로는 수용 곤란해 곤혹스러운 경우도 있지만 어떤 의견이든 국민의 의견을 표출할 곳이 필요하다”며 국민청원 순기능을 강조했다.
최경철 매일신문 서울 정경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