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홀한 달빛 아래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돌며 소원을 비는 여행객들. 탑돌이의 방향은 오른쪽이다. | ||
보름달이 뜨는 밤, 유적지에서의 탑돌이나 국악공연은 매번 똑같다고 느꼈던 경주를 새로운 문화영역으로 확장시켜준다. 때로는 감은사지의 장중한 탑이 혹은 황룡사의 광활한 터가 깨어나 말을 걸어올지도 모른다. 경주를 새롭게 보는 이 특별한 체험여행이 올해로 9년째를 맞았다. 지나치듯 만나는 경주에서 ‘머무는 경주’로 자리매김한 달빛역사기행. 이제는 경주의 밤이 특별해진다.
매월 보름날 전후의 토요일 오후, 달빛역사기행 신청자들이 신라문화원에 도착한다. 신청자들 중에는 이미 달빛역사기행을 다녀간 회원도 상당수에 이른다. 체험 내용도 차별화되지만 달빛역사기행의 일정이 매월 달라지기 때문이다. 전국 어디서든 아침에 출발하기만 하면 참가할 수 있다는 것도 달빛역사기행만의 장점이라 하겠다.
달빛역사기행은 낮에는 전문 가이드를 동반한 채 유적지를 답사하고 야간에는 달빛 아래 펼쳐지는 국악공연과 탑돌이 등 백등의 빛을 따라 신라의 낭만을 찾아가는 것을 주된 내용으로 한다. 오후 4시부터 밤 9시30분까지 그리 긴 시간도 아니다.
너무 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아주 전문적인 내용으로 지루함을 주는 일도 없다. 책에서만 보던 민속행사인 탑돌이나 강강수월래 등은 낯설지만 유쾌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 경험하는 만큼 오래 기억되는 것이 없고 보면 성별이나 연령대를 떠나서 한번쯤 추천할 만한 역사기행이다.
이 날의 답사 코스는 ‘장항리터-문무대왕릉-감은사터(공연)’까지. 권역으로 따지면 ‘감포권’에 해당된다. 장항리터를 제외하고는 대개 한 번쯤 들어본 이름이다.
처음 만나는 유적지 장항리사지는 통일신라시대의 절터다. 경주시 양북면 장항리에 있는 폐사지로 석굴암이 있는 토함산 동쪽 자락에 위치해 있다. 토함산 동쪽의 대종천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위태로운 언덕배기에 보일 듯 말 듯 장항리 5층 석탑의 모습이 드러난다. 흙길을 따라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비가 오는 날은 답사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곳이다.
장항리사지는 이곳에 존재했던 사찰의 이름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동리의 이름인 장항리를 따서 ‘장항리의 절터’란 뜻으로 부르는 명칭. 이곳 절터에는 오층 석탑인 서탑과 파괴된 동탑, 그리고 석조불 대좌가 남아 있다.
보통은 감은사지 5층 석탑에 대해 자랑하는 이들이 많은데, 신라문화원의 양형씨는 “장항리사지는 이상하게 마음에 와 닿는 곳이에요. 미완성의 어떤 것이 마치 나한테 말을 건네는 것 같은 기분이랄까요”라며 장항리사지에 대한 특별함을 털어놓았다.
장항리사지는 절터 치고는 좁고 불안정한 위치에 있고 지금까지도 이곳에 대한 자료들이 밝혀지지 않아 많은 궁금증을 유발하는 곳이다. 또 국보로 지정된 장항리 5층 석탑이 인근 감은사지 석탑에 비해 너무 초라한 대접을 받아왔기에 이곳에 대한 전문가들의 애틋함이 더 커졌을지도 모른다.
▲ 장항리5층석탑. | ||
이곳의 서탑과 동탑은 크기에서나 훼손의 정도에서 묘한 대조를 이루며 답사객들을 맞이한다. 계곡 하나를 건너 언덕 위에 올랐을 뿐이지만 건너편 토함산의 산자락을 마주한 채 멀리 들어온 느낌이다.
“동탑 기단의 색깔이 이상한데요? 그것만 보수한 건가요?”
“기단이 유난히 하얗고 깨끗하죠. 그건 돌의 재질이 다른 것과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고 1920년대 도굴을 당한 뒤 계곡에 붕괴되어 흩어져 있던 것을 수습하여 모아두었는데 당시 기단만이 잘 보존돼서일 수도 있어요.”
끝까지 제 모습을 찾지 못한 동탑을 보면 안타까움이 밀려오지만 한편 몸돌에 새겨진 심술 맞은 인왕상 부조들로 금세 활기를 찾는다.
뒤쪽 언덕 위에 서서 서탑 상륜부를 올려다보면 또 하나의 재밌는 형상이 나타난다. 탑신부의 모서리쪽 지붕돌이 훼손되어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나비가 날아오르는 장면을 연출한다. 누군가가 일부러 조각한 것 같은 절묘한 그 모습에 모두 짧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쌍탑의 높이나 불상의 크기 등을 통해 장항리사지를 짐작해보지만 이 미완의 유적들은 여운 속에서 아련한 그리움만 남긴다.
장항리터에서 곧장 바다로 나아가면 양북면 봉길리 해변에 있는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과 만난다. 수중릉은 전대의 왕에게서 볼 수 없는 아주 희귀한 예로,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은 동해구에서 자신의 장사를 지내도록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대왕암으로도 불리는 이 수중릉은 아직 수중발굴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으나 동서남북 사방으로 수로를 마련한 점에서 문무왕의 수중릉일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31대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의 뜻을 받들기 위해 세운 절이 바로 지금의 감은사다.
감은사지 동서(東西) 삼층석탑(국보 112호)에서의 탑돌이와 국악공연은 달빛역사기행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탑돌이는 원래 부처 사후에 생겨난 경배 의식으로, 부처의 유일한 형상인 ‘사리’를 넣은 탑을 보며 부처님의 법을 되새기는 불교적 행사였다. 민속적 기원에 자주 등장해 익숙할 법도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탑돌이의 방향을 모른다.
“이렇게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소원을 비는 거야!”
“엄만 무슨 소원 빌 거야?”
▲ 불국사 | ||
신라의 아련한 역사 속으로 나도 몰래 빠져드는 고즈넉한 밤, ‘소원을 비는’ 유적지의 밤은 새로운 감흥으로 가득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유려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힘이 넘치고, 감은사지는 사람들과 더불어 다시 태어난 듯했다. 마침내는 국악단의 애간장을 녹이는 해금소리와 연주로 달빛마저도 사람들을 쫓아 춤을 추고 신라의 밤은 깊어만 간다.
여행 안내
★문의: 경주 신라문화원 054-774-1950 www.silla.or.kr
★참가비: 일반 1만3천원(도시락, 공연, 입장료, 백등 포함)
여행 Tip
▶달빛 신라역사기행 (오후 4시~오후 9시30분)
●9월 16일: 황복사지-보문사지-진평왕릉(공연)
●10월 15일: 경주세계문화엑스포-황룡사터-분황사(공연)
▶별빛 신라역사기행 (그믐날 오후 4시~오후 3시 )
9월 3일, 10월 1일: 노서리 고분군-대릉원-첨성대·계림·월성-안압지(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