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봉마을 들머리에 흐르는 엄천강은 래프팅과 물놀이 그리고 낚시를 하기 좋다(위). 지리산 자락 해발 600m 지대에 자리한 오지 산청군 오봉마을 전경. | ||
예상외로 오봉마을 찾아가는 길은 그다지 험하지 않다. 산 아래 방곡리에서부터 오봉마을까지 이어지는 길에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다. 그렇지만 대형차량이 지나가기에는 무리인 조붓한 길. 그래서 버스는 방곡리가 종점이다. 방곡리에서 오봉마을까지는 3㎞ 정도 떨어져 있다.
무성한 숲을 뚫고 나 있는 길 왼쪽으로 계곡이 나란히 달린다. 지리산에서부터 내려오는 이 계곡은 사철 마르는 일이 없이 철철 흐른다. 조금만 걸어도 땀범벅이 되는 요즘, 계곡은 정말 고마운 존재다. 길을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손바닥만 한 계단식 논들이 보인다. 이색적이다. 쌀이 귀해 조그만 땅덩어리도 놀릴 수 없는 산촌사람들의 지혜가 엿보인다.
10분쯤 걷자 갈림길이다. 왼쪽으로는 가현마을, 오른쪽은 오봉마을이다. 가현마을도 10여 호가 사는 작은 부락이지만 오봉마을처럼 깊은 곳에 자리해 있진 않다.
오봉마을로 길머리를 틀어 다시 10여 분쯤 걷자 작은 절이 나타난다. 화엄사 말사인 화림사다. 큰스님을 비롯해 세 명의 스님이 수도하고 있다. 절은 아주 작다. 대적광전과 석조좌불이 전부. 절 마당을 기웃거리니 한 스님이 나와 안부를 물으며 차를 권한다. 올해 수확한 지리산 야생차의 향기가 그윽하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길을 다시 나서려니까 공양까지 마저 하고 가란다. 세상의 때를 다 뺀 것처럼 절밥은 담백했다.
화림사에서부터 다시 10분. 계곡 위에 설치된 작은 돌다리를 건너면 드디어 오봉마을이다. 겨우 12가구 15명 내외가 기거하는 전형적인 벽지 마을. 솔봉, 성봉, 필봉, 매봉, 한봉 등 다섯 개의 봉우리가 마을 앞에 펼쳐져 있다고 해서 오봉마을이다.
나그네의 발소리는 어딘지 낯선 법. 마을 중턱에 있는 한 함석집에서 머리를 뒤로 묶은 한 주민이 울타리 너머로 빠끔히 내다본다. 경계의 눈빛이 아니라 반가움의 눈빛이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자 그는 갈증 해소에 좋다며 칡 다린 물을 한 잔 권한다.
서울에 살다가 재작년 12월에 오봉마을로 들어왔다는 박 씨 부부. 부인의 병 때문에 이 깊은 산골까지 오게 됐단다. 대장암 말기로 ‘오늘 내일’ 하던 부인은 이곳에서 기적처럼 건강을 되찾았다. 사람이 포기한 병을 자연이 고친 것. 숲과 계곡이 뿜어내는 음이온과 청정한 공기, 그리고 지리산에서 나는 몸에 좋은 약초가 병을 서서히 치유했다.
▲ 지리산을 앞마당 삼아 사는 오봉마을 사람들. | ||
그런 즐거운 마음이야말로 건강회복에 가장 큰 약이 되었으리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사과며 복숭아 등 이것저것 먹을 것을 내놓는다. 오봉마을을 찾는 사람들을 위한 ‘비상식량’이 박 씨 집에는 항상 갖춰져 있다.
“어딜 가나 음식점이나 가게가 하나쯤은 있게 마련인데 우리 마을에는 그런 게 없거든요. 마을에 찾아온 손님들을 굶길 순 없잖아요.”
2년도 안 돼 오봉마을 사람들의 인심을 닮아버렸다며 박 씨 부부는 웃는다.
도시에서 살다 와서 혹시 무료하지나 않을까. 하지만 그럴 이유가 전혀 없다. 텃밭을 일구고, 약초를 따고, 산과 계곡을 누비며 산책도 하고…. 심심할 겨를이 없다. 가끔 동네 사람들끼리 모여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화투치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봉마을에는 박 씨네처럼 타지에서 살다 정착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토박이는 전 이장인 민대호 씨(47)와 이이순 할머니(82)뿐이다. 그러나 이 할머니마저 지난해 병 구완차 부산으로 내려가 현재는 민 씨가 유일하다. 그러나 이들 모두 마을로 들어오는 순간 진작부터 그랬던 것처럼 한 가족이 됐단다. 기쁨은 배로 불리고 슬픔은 쪼갠다. 이곳을 찾는 이방인도 마찬가지로 한 가족이다. 머물고 있는 시간만큼은 고향처럼 푸근하다.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건 ‘올해는 꽃이 좋아 꿀이 잘 모인다’든지 ‘뉘 집 염소가 몇 마리 새끼를 낳았는지’가 화제다. 마을 사람들은 약초를 캐거나, 벌을 치고, 염소를 기르며 살아간다. 토박이 민 씨는 최고의 약초꾼. 산을 속속들이 알기 때문에 귀한 약초들을 많이 캔다.
교편생활을 접고 15년 전 마을주민이 된 최종식 씨(47)는 토종벌과 염소를 기른다. 지리산 야생화의 향기가 그대로 녹아 있는 꿀이 비싸게 팔린다. 염소는 무려 100마리가 넘는다. 아침에 화림사 근처 ‘염소막’에 넣어두었다가 저녁에 데리고 온다.
▲ 무더위를 날려주는 오봉계곡. 마을 옆으로 계곡물이 철철 흐른다. | ||
마을 주변은 유원지나 다름없다. 여름휴가 성수기에는 마을 아래 계곡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 텐트를 치며 야영을 하거나 오봉마을에서 민박을 한다. 평소에 누렸던 고요한 평화를 깨는 소리가 종종 들리지만 시끄러운 정도는 아니라고 개의치 않는다.
주민들이 최고로 꼽는 계곡은 따로 있다. 박 씨네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이 계곡은 3단 폭포가 장관이다. 3단째 폭포 아래는 희한한 무늬의 너럭바위가 있다. 이곳에서 몸을 담그고 폭포를 맞으면 뼛속까지 시원해진다. 하지만 이곳은 동네사람들이 쉬쉬하는 곳. 하룻밤 묵어가며 정을 돈독히 쌓아야만 굳게 닫힌 입을 열 수 있을 것이다.
여름철 오봉마을의 아침은 구름이 환상적이다. 집이 구름에 다 잠긴다. 마치 구름 위에 사는 듯한 느낌이다. 신선들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에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곳저곳 볼거리를 찾아 돌아다니는 여행도 좋지만 ‘사람몸살’을 피할 수 있는 곳에서 나만의 생각을 정리하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는 오지야말로 최고의 피서지. 산수 좋고 정 깊은 오봉마을에서 올 여름 휴가를 보내는 것은 어떨까.
여행 안내
★길잡이: ▶자가용: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 생초IC→화계리 방향 좌회전→경호중학교→방곡리 추모공원→화림사→오봉마을.
▶대중교통: 오봉마을까지 들어가는 버스는 없다. 방곡리에서 내려 1시간가량 걸어야 한다. 산청버스터미널(055-973-5191).
★잠자리: 오봉민박(055-973-5865), 민대호(055-973-4658)
★먹거리: 오봉마을에는 음식점도 생필품을 파는 가게도 없다. 모든 것을 준비해서 가야 한다. 음식점은 가까운 금서면이나 산청읍으로 나가야 한다. 전구형왕릉 근처에 ‘효성숯불갈비’(055-973-0025)가 맛있다. 산청은 흑돼지로 유명한 곳. 흑돼지의 순수 갈비살만을 사용해 고기 맛이 일품이다.
★문의: 오봉리 이장 강신국(055-973-5865)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