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어스름을 떨치고 가야금 재목에 인두 지지는 작업을 하고 있는 가야금 제작 명장. | ||
고령은 대가야의 도읍이었던 곳이다. 대가야를 고구려, 백제, 신라에 비해 작고 미개한 나라쯤으로 여기는 시선이 많다. 그것은 명백한 오해다. 대가야는 거창, 합천, 함양, 산청 등 영남지방과 남원, 장수, 진안, 구례, 순천 등 호남지방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면서 철기산업과 문화를 크게 꽃피웠던 고대국가 중 하나다.
대가야의 영토에 속했던 지방 중에서 고령은 그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특히 이곳에는 200개가 넘는 고분군이 만들어져 있다.
고령의 고분군은 지산리에 자리하고 있다. 고령읍 뒤편 주산의 남동쪽 능선을 따라 대가야 왕들의 무덤이 늘어서 있다. 둘레가 60m 넘는 대형 무덤에서부터 둘레 20m 정도의 소형 무덤까지 다양하다. 능선 아래쪽에 있는 것들이 대체로 먼저 만들어졌고 위로 올라갈수록 규모가 크다. 무덤의 규모는 나라의 힘과 비례할 터. 대가야의 거대한 무덤들은 그러나 주산을 넘지 못하고 8부 능선쯤에서 끊겨 버렸다. 이때가 서기 562년. 500여 년 동안 이어온 대가야는 신라에게 멸망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가장 강성했던 시기에 만들어진 44호 고분은 대가야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지산리고분군에서 규모가 큰 것에 속하는 이 고분은 무덤의 밑지름이 무려 27m에 달한다. 둘레로 따지자면 거의 90m에 이르는 크기다.
고분군 아래 자리한 왕릉전시관은 44호분의 봉분을 본떠 둥근 모양을 하고 있다. 내부에는 고분 발굴 당시의 돌방 구조를 원형 그대로 재현했다. 무덤의 주인이 묻힌 으뜸돌방과 그에 딸린 돌방 2개 등이 있다. 이 고분에서는 순장의 풍습을 확인할 수 있다. 딸린 돌방 주위에 32개나 되는 순장자의 작은 무덤이 발견된 것. 이 무덤은 40명 이상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묻힌 왕릉인 것이다.
전시관 내부 벽면에는 왕릉에서 발견된 각종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토기를 비롯해 당시의 생활사를 알 수 있는 다양한 물건들이다. 왕릉전시관 아래 자리한 대가야박물관에도 토기와 왕관 등이 전시돼 있다. 토기에 물결무늬를 넣고 뚜껑에는 젖꼭지모양의 손잡이를 한 것이 다른 나라와 구별된다.
여느 해보다 따뜻한 겨울. 지산리고분은 트레킹하기에 참 좋은 곳이다. 숲을 걷는다거나 산을 오르는 것과는 또 다른 기분의 걷기다. 거리도 적당해서 몸에 무리가 없다.
왕릉전시관을 둘러본 후 걸음을 옮긴다. 오른쪽은 주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 왼쪽은 고아리벽화고분이 있는 곳이다. 주산 정상까지는 왕복 2.6㎞. 넉넉잡아 1시간 30분 거리다. 고아리벽화고분을 목적지로 삼는다면 왕복 4.8㎞, 3시간이면 충분하다.
▲ 지산리 고분군 전경. | ||
주산 정상까지 다녀오는 것으로 트레킹을 마치기는 참 아쉽다. 내친 걸음, 고야동벽화고분까지 다녀오도록 하자. 고분은 고야동 쪽이 더 많다. 평지를 걷듯 설렁설렁 고분과 고분 사이를 걸으며 대가야의 역사를 그려보자. 1시간 30분 정도 걸어서 당도한 고야동고분. 그러나 벽화는 볼 수 없다. 고분의 문이 굳건히 잠겨 있기 때문이다. 3월 말에서 4월 초 쯤 열리는 대가야축제 때 한시적으로 고분의 문이 개방된다니 그때를 기약할 밖에 도리가 없다.
대가야는 무덤의 주인인 왕들의 나라이기도 했지만 악성 우륵의 나라이기도 했다. 기우는 대가야를 뒤로하고 신라로 떠난 우륵. 이곳에는 그를 기리는 우륵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우륵이 오른손으로 맨 윗줄을 튕겼다. 소리는 아득히 깊었고, 더 깊고 더 먼 곳으로 사라져갔다. …우륵이 오른손이 다음 줄을 튕겼다. 소리는 넓고 둥글었다. …우륵의 몸이 소리 속으로 퍼져나갔고 소리가 몸속으로 흘러들었다….”(김훈 소설 <현의 노래> 중)
가야금 환청이 우륵박물관으로 발길을 이끈다. 가야금을 닮은 박물관. 그 내부에는 멋들어진 가야금들이 수십 점 전시돼 있다. 박물관 건물 바로 옆에는 우륵국악기연구원이 있다. 이곳은 가야금 제작 중요무형문화재 제42호로 지정된 김동환 명인의 공방이다. 문은 언제든 열려 있어 제작 모습을 직접 볼 수도 있다. 명인의 작업은 외롭다.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가야금을 지키는 일은 숙명이지만 고행이다. 어스름 푸른 새벽부터 일어나 인두로 나무를 지지고 그 나무 위에 현을 거는 일. 그는 수도를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우륵을 좇는 심정으로 가야금을 만든다.
▲ 지산리고분군 입구에 자리한 왕릉전시관. 내부에는 왕릉에서 발굴된 유물과 석관 등을 전시하고 있다. | ||
조선시대의 모습은 개실마을에 남아 있다. 영남사림학파의 창시자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후손이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는 마을로 350여 년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점필재 종택, 도연재 등의 문화재가 있다.
대가야를 몸소 체험하고 싶다면 대가야문화학교로 가면 된다. 이곳은 토기와 가야금, 판각 등을 손수 만들며 체험하는 문화공간으로 고령여행을 계획한다면 시간을 비워두고 찾아가 볼 만한 곳이다.
여행 안내
★길잡이: 중부내륙고속국도 옥포분기점→광주 방면 88고속국도→고령IC→왕릉전시관 방면 직진.
★잠자리: 잘 곳은 그다지 마땅치 않은 편이다. 대가야박물관에서 읍내로 넘어가는 지산리에 ‘제우스모텔’(054-955-5115)이 있고 읍내 외곽 고아리에 ‘로얄장’(054-955-8660)이 있다. 시설은 최근에 지은 제우스모텔이 낫지만 목욕탕을 겸하는 로얄장에서는 공짜로 목욕을 즐길 수 있다.
★먹거리: 고령 여행길에 특별한 맛집을 발견했다. 고령IC에서 지산리고분군을 거쳐 읍내로 달리면 헌문리. 이곳에 ‘대통대맛’(054-956-3012)이라는 쇠고기 샤브샤브 음식점이 있다. 통대나무를 육수와 함께 끓여 산뜻한 맛을 낸다. 1인분 1만 원. 특별한 음식은 아니지만 ‘시장표’ 국밥도 추천한다. 고령 읍내 시장골목에 국밥집이 몰려 있다. 돼지국밥이 싸고 맛있다. 4000원짜리 한 그릇이면 속이 든든하다.
★문의: 고령군청 문화관광포털(http://tour.goryeong.go.kr), 문화체육과 관광진흥담당 054-950-6060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