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금물결이 일렁이는 손바닥만 한 다랭이논들(위). 마천 다랭이논은 이 가을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선사한다. 아래는 상림을 붉게 수놓은 꽃무릇. 꽃무릇은 잎이 나기 전에 꽃이 먼저 피어 ‘상사화’로도 불린다. | ||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는 남해 가천마을과 같은 다랭이논(계단식 논)들이 곳곳에 펼쳐져 있다.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마천면은 평야가 거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이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것이다. 고단한 삶의 증거인 다랭이논들은 그러나 요즘 이 지역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멋진 볼거리가 되고 있다.
88고속국도 지리산 나들목에서 빠져나와 20분쯤 달리면 다랭이논마을에 닿는다. 이곳으로 가는 길에는 어느새 가을이 조용히 내려앉아 있다. 60번 국도를 타고 실상사를 바로 지나면 코스모스가 들판 가득 피어 있다. 아무리 감정이 메마른 사람일지라도 꽃을 보면 마음이 동하게 마련. 가던 길을 멈추고 바람 따라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를 보며 가을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이곳에서 5분쯤 더 길을 가면 마천으로 들어선다. 첩첩이 진한 녹색의 산이 이어지는 가운데 갑자기 오른쪽으로 노란 사면이 시야에 들어온다. 다랭이논이다. 산 아래서부터 중턱에 이르기까지 마치 삼각주처럼 깎아내고 논을 만들었다. 따사로운 가을 볕 아래 곱게 익어가는 벼이삭들이 일렁이며 장관을 연출한다. 다랭이논 오른편에는 30여 채의 가옥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빨갛고 파란 슬레이트지붕들이 노란 논과 어우러져 아름답다.
이 다랭이논마을은 1995년 문화재청 지정 국가명승지 후보로 올랐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국가명승지로 지정될 경우 개발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개발과 보존이라는 딜레마는 요즘 함양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이런 시끄러운 사정과 상관없이 다랭이논마을의 모습은 평화 그 자체다. 마을 아래에 전망대가 있지만 보다 더 잘 관망하려면 금대암 쪽으로 난 길로 올라가야 한다. 전망대를 지나 조금 가다보면 왼편으로 금대암 가는 길이 있다. 이 길로 500m쯤 올라가면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지점이 나온다.
이 뷰포인트에서 1.5㎞ 정도 더 올라가면 금대암이 있는데 이곳도 들러볼 만하다. 금대암은 신라 태종 무열왕 3년(656년)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해인사의 말사로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다시 지은 것이다. 이 절은 지리산의 주봉들을 마주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봉, 중봉, 천왕봉, 촛대봉, 칠선봉, 백소령, 형제봉 등이 어깨를 맞대며 지리산의 너른 품을 이루고 있다.
▲ 마천면 다랭이논 가기 전 만나는 코스모스 들판(위). 다양한 돌조각상들을 감상할 수 있는 서암정사. | ||
마애여래입상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추성리 벽송사는 신라 말기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절은 조선시대의 선맥을 빛낸 8명의 고승들이 수도 정진한 도량으로 유명하다. 특히 이 절은 한국전쟁 당시 빨치산 루트로 사용되는 등 비극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이 절 역시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을 다시 지었다. 전란으로 소실되기 이전에는 30여 동의 전각과 상주하는 승려들만 해도 300명이 넘었지만 지금은 그 규모가 크게 줄었다.
절 앞에 일제시대 때 세워진 목장승 한 쌍이 있는 게 특이하다. 오른쪽에 있는 호법대신(護法大臣)은 보존 상태가 양호하지만 왼쪽에 있는 금호장군(禁護將軍)은 크게 훼손된 상태다. 이 장승들은 불교와 민간신앙이 어우러진 걸작품으로 사찰에 들어오는 악귀를 퇴치하고 사찰 경내에서 행해지는 불법 어로와 사냥 등을 경계하는 목적으로 세워졌다. 벽송사 뒤편에는 신라시대양식을 계승한 조선시대 탑으로 알려진 삼층석탑이 미인송, 도인송이라는 두 그루의 소나무와 어우러진 채 비바람을 견디고 있다.
벽송사와 이웃하고 있는 서암정사는 역사가 깊지 않은 절이다. 벽송사를 다시 지으면서 창건한 이 절은 사찰 건축학적으로 독특한 곳이다. 거의 대부분을 돌을 이용해 지었다. 보통 일주문에 그려지게 마련인 사천왕도 바위에 조각돼 있고 법당도 석굴 안에 있다. 서암정사에서는 추성리 일대가 다 내려다보이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추성리의 모습이 아름답다. 마천 초입의 다랭이논마을 말고도 마천면에는 가흥, 군자, 의탄, 삼정리 등의 다랭이논마을들이 있는데 추성리도 그중 하나다. 오른편으로 칠선계곡이 흐르고 왼편으로 다랭이논들이 펼쳐진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
요즘 상림에는 꽃무릇(수선화과의 식물)이 지천이다. 상림공원 주변으로 꽃무릇이 숲 가득 피어 있다. 잎이 나기 전에 꽃이 피는 식물로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고 서로를 그리워한다고 해서 ‘상사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 꽃무릇 군락지로 전북 고창의 선운사와 전남 영광의 불갑사, 함평의 용천사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곳 상림의 꽃무릇도 그에 견줄 만하다. 천년 숲 아래 빨갛게 피어난 꽃무릇은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꽃무릇은 지금이 한창으로 10월 중순이면 거의 다 진다. 함양의 가을을 느껴보고 싶다면 어서 서두르자.
여행 안내
★길잡이: 대전-통영 간 고속국도→함양분기점→88고속국도 광주 방면→지리산IC→37번 국도→60번 국도→실상사→마천다랭이논
★먹거리: 마천면은 흑돼지바비큐로 유명하다. 추성리 마을이 끝나는 ‘칠선계곡휴게소’(055-962-5494)가 유명하다. 기름기가 없어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마천파출소 옆 ‘지리산소문난짜장면집’(055-963-3799)도 명물이다. 외팔로 면을 뽑아내는 그 기술도 기술이지만 맛 또한 쫄깃하니 일품이다.
★잠자리: 마천면 추성리 칠선계곡 주변이 민박마을이다. 인근에 서암정사와 벽송사 등이 있고 대부분의 집에서 민박을 놓는다. 마을대표 김종현 씨(055-963-3427, 016-9669-3427)에게 연락하면 된다.
★문의: 함양군 문화관광포털(http://tour.hygn.go. kr) 055-960-5555
김동옥 프리랜서 tou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