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디어법 처리에 이어 세종시 문제로 대립 중인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 | ||
과연 박 전 대표는 세종시라는 외나무다리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친이 측은 박 전 대표가 ‘책임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결국에는 수정안에 동의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박 전 대표가 수정안을 받아들인다면 최대의 수혜자는 대권 라이벌인 정운찬 총리가 되기 때문에 자구 하나 고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저항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점입가경으로 접어들고 있는 세종시 전쟁에서 ‘박근혜의 선택’은 무엇이 될지 따라가 봤다.
“박근혜는 이명박의 영원한 봉이다.”
여의도의 한 전략 관계자는 공격적인 말투로 이번 세종시 전쟁에서 펼쳐지고 있는 여권 넘버 원·투의 미묘한 권력 함수관계를 설명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 이후 최대의 현안을 해결하려 할 때면 꼭 박근혜 전 대표를 끌어들여 정치적 실리를 챙겼다는 것이 그 요체다. 지난 미디어법 처리 과정이 그런 현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미디어법은 사실 박 전 대표보다는 야당인 민주당이 정치적 사활을 걸어야 하는 중요한 이슈였다. 보수층을 대변하는 ‘메이저 신문’ 조·중·동은 그렇다 치더라도 진보성향의 방송마저 이명박 정권의 입맛에 맞게 재편될 경우 자신들의 재집권은 더욱 난망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의 존립을 걸고 미디어법 처리를 막아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다.
하지만 극단으로 치닫던 여야의 미디어법 공방은 엉뚱한 곳에서 실마리가 풀렸다. ‘딴죽’을 걸던 박근혜 전 대표가 막판에 “그만하면 국민들도 이해할 것”이라며 이명박 대통령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의 존재감은 극히 미약했고 결국 미디어법은 이 대통령의 의중대로 해결됐다. 비록 이 대통령은 친이-친박 간의 갈등으로 리더십에 상처를 입었지만 종국에는 미디어법 통과라는 정치적 실리를 획득했다. 반면 박 전 대표는 야당과 주파수를 맞추면서 원칙론을 고수하다 막판에 이 대통령의 손을 들어줘 ‘권력 앞에 박 전 대표도 어쩔 수 없다’라는 비판을 받았고 결국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지는 정치적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결과론적으로 따지고 보면 이 대통령은 박 전 대표를 ‘내세워’ 야당과의 미디어법 전쟁에서 승리한 꼴이 됐다. 앞서의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이명박 정권이 야당과의 직접적인 대결은 피하면서 ‘용병’ 박 전 대표를 통해 야당과의 대규모 전투에서 이기는 전략에 재미를 들인 것 같다. 대중적 인기가 없는 야당의 역할은 국민들 성에 차지 않지만, ‘미래권력’인 박 전 대표가 이 대통령과 치고받는 상황이 관심을 끌면서 정국이 이명박-박근혜의 양자 구도로만 굳어지고 있다. 이 대통령으로선 손해 볼 것이 없다. 민주당과의 직접적인 대결은 피하면서 박 전 대표를 적당히 달래고 몰아세워 정치적 실리를 챙기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세종시법 문제도 미디어법 공방 때와 비슷한 패턴으로 흘러가고 있다. 세종시 문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충청 기반의 자유선진당은 물론, 거대 야당인 민주당도 이번 전쟁에서 그 존재감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오로지 최종 선택지는 박 전 대표의 손에 들려 있는 모양새다. 앞서의 전략 관계자가 “박근혜는 이명박의 봉”이라고 말한 대목도 친이그룹이 야당 탄압이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들과 직접적인 대결을 하기보다는 박 전 대표와의 ‘대리전’을 통해 수정안을 관철시켜나가려 하는 전략과 맥이 닿는다.
일각에서는 이번 세종시 문제가 박 전 대표의 ‘꽃놀이패’라고 해석한다. 이번 정국을 통해 박 전 대표는 야당 지지성향의 중도층을 흡수하고 있고, 다음 대선에서 충청도의 확실한 지지를 보장받는 등 적잖은 정치적 실리를 챙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이그룹은 이런 해석에 대해 경계한다. 친이그룹 관계자들은 “지난 대선 후보 경선 과정에서 패배한 박 전 대표가 그 결과를 깨끗하게 승복한 배경에는 ‘현 정권에 대한 협력과 지지 의사’가 녹아들어 있다고 봐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정두언 의원이 최근 “(지난 경선 과정에서 친박계가 이명박 후보를 그렇게 공격했음에도) 그걸 문제 삼았다면 출마도 못할 사람들이 많았지만 결국 용서했고 심지어 내각에 등용했다. 집권해서도 야당 의원들이 혀를 찰 정도로 친박이 대통령을 공격하고 험한 말을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 대목의 이면에는 ‘친박의 자세’에 대한 친이그룹의 공통된 인식과 정서가 담겨 있는 셈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세종시 수정안 협조 요구는 국가 최고 권력자의 통치행위에 적극 협조하라는 당연한 요구로 여겨질 수 있다.
그 때문인지 최근 친이그룹의 분위기는 “박 전 대표가 결국 세종시 수정안에 찬성을 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과 낙관론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친이그룹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 본인이 퍼스트레이디로서 국가 경영에 참여한 적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당시 목숨을 건 야당의 저항을 겪으면서도 정책을 추진해나갔던 어려움을 왜 박 전 대표가 모르겠는가. 막판 미디어법에 찬성한 것도 결국 여당의 책임 있는 지도자로서 행동했고 결단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그때와 지금이 다르다고 하지만 당이 쪼개지지 않는 이상 박 전 대표도 마냥 뒷짐 지고 이명박 대통령의 통치력 훼손과 여당의 몰락을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친이그룹의 분위기는 향후 정부의 세종시 수정안이 최대한 박 전 대표의 정치적 명분을 살려주는 쪽으로 고려될 것임을 말해주고 있다. 비록 일각에서는 “세종시 논란이 감정적이고 권력투쟁 수단으로 변질되면서 솔로몬의 지혜와 같은 완벽한 안이 나오기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여권 주류는 여전히 자신 있는 모습이다.
▲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세종시 질의에 답하는 정운찬 총리. | ||
애초 정부는 행정부 이전을 완전 배제하는 ‘기업도시’ 건설을 선호했지만 박 전 대표의 원안 고수 명분을 살려주기 위해 행정부 3곳에서 최대 5곳(앞서의 3곳에 문화관광부와 보건복지부가 더해짐)까지 이전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알려진다. 여당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가 전향적 자세로 행정부 3~5곳을 포함한 대폭 양보의 수정안을 제시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선의를 거절할 경우 책임 있는 지도자로서의 위상이 추락하는 것은 물론 정치적 부담도 커진다는 점에서 결국 여권의 마지노선을 수용할 것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이런 여권의 ‘낙관적인’ 기류 이면에는 ‘분당 불가능론’도 자리 잡고 있다. 여권의 책사 윤여준 전 한나라당 의원은 이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분당은 쉽게 안 일어난다. 성공한 역사가 별로 없다. 옛날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 같은 사람들은 확고한 지역기반이 있었다. 분당을 해도 얼마든지 생존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은 박근혜 전 대표의 영남 지지세가 있다고 하지만 왕년의 양김과 같은 강고한 기반은 없다. 그리고 박 전 대표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당을 회생시켜서 당에 애착이 많을 것이다. 박 전 대표가 쉽사리 분당을 생각할 거라고는 안 본다”라고 전제하면서 “이 대통령과 박 전 대표가 나라 생각, 당 생각을 많이 하지 않겠나. 대통령도 정권 재창출을 중시할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서 국가의 미래를 위해 다시 협력 관계로 돌아서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친박 측과 여의도 일각에서는 “사람들이 박 전 대표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며 “이번에는 박 전 대표가 세종시 건설 원안의 자구 하나도 고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런 주장에는 “원칙을 접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패배하는 게 낫다”는 박 전 대표 특유의 가치 지향적 사고관이 녹아 있다. 앞서의 윤 전 의원은 이에 대해 “박 전 대표의 평소 언행이나 행동을 보면 상당히 가치 지향적이고 원칙과 신뢰를 중요시한다. 실제로 그렇다면 한국 정치계에서 특출한 사람이다. 목전의 이해관계를 중시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대의를 찾으려고 하고 사보다 공을 찾으려는 훈련이 철저히 돼 있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 특유의 원칙주의 가치관과 함께 차기 대권 구도를 봐도 그는 이번 전쟁에서 후퇴를 할 수 없다. 친박 진영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박 전 대표가 여권 주류의 소망대로 자신의 가장 큰 자산인 원칙을 버리고 이번에 다시 한 번 이명박 대통령의 손을 들어줄 경우 일부 보수층의 찬사를 받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후퇴는 곧 정운찬 총리의 정치적 승리를 의미한다. 오로지 세종시 하나만 가지고 대권 판에 뛰어든(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일부 의원들이 ‘정 총리는 세종시 말고 아는 게 뭐가 있느냐’라고 몰아붙인 대목을 상기해 보자) 정 총리가 세종시 수정안을 관철시킨다면 일거에 여권의 대권 주자 반열에 뛰어오를 수 있다. 박 전 대표가 왜 자신의 경쟁자를 위해 원칙이라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까지 버려가면서 희생을 해야 하나. 그리고 그 후유증이 대선 후보 경선과 본선에까지 이어져 무슨 낭패를 당할지도 모르는데 왜 그런 비전략적인 사고를 하겠는가. 내가 볼 때 박 전 대표는 이번 전쟁에서 단 한 발짝도 뒤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급한 쪽은 이 대통령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실 친박 진영의 정운찬 총리에 대한 반감도 박 전 대표의 투쟁심을 높여주고 있다. 한 관계자는 “사사건건 박 전 대표를 몰아세워 정치적 실리를 챙기는 이 대통령도 밉지만, 세종시라는 대도박으로 한꺼번에 대권 후보로 뛰어오르려는 정운찬 총리의 얄팍한 술수도 국가 지도자감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표의 대변인 격인 이정현 의원이 대정부 질문에서 정 총리에게 “이 정권을 만들기 위해서 얼굴에 칼 맞고 희생한 사람이 누구인데, 누가 어디서 잘 먹고 잘살고 편하게 지내다가 정권 만들어놓으니까 나와서 이러느냐”라고 일갈한 것도 정 총리의 대권가도 ‘무임승차’를 힐난하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박 전 대표의 ‘복심’으로 통한다는 이정현 의원의 말을 통해서 최근 정 총리에 대한 박 전 대표의 ‘심중’을 유추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가 이번 전쟁에서 쉽게 물러서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 대통령은 지난번 미디어법 처리 때 박 전 대표를 ‘봉’으로 내세워 톡톡히 재미를 봤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세종시 문제도 그와 비슷한 양상으로 흘러가고 있다. 친이세력의 ‘기대 반 협박 반’에 박 전 대표가 결국 주류와 막판 대타협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가치를 목숨보다 중시하는 원칙적인 정치관에, ‘칼부림’까지 맞으며 지킨 당의 대권후보 자리를 ‘애송이’ 총리에게 덥석 넘겨주지 않겠다는 투지가 박 전 대표를 쉽사리 대타협의 테이블로 이끌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