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세균 대표가 지난 16일 국회에서 민생버스 출정식을 가진 뒤 당직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 ||
“국민의 억울함을 달래줘야 할 사람들은 바로 우리 민주당입니다. 생활 속으로, 국민과 함께하는 정치를 할 때 그것이 가능할 것입니다. ‘생활정치’의 중심에 서서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 다시 출정하고자 합니다.”
정 대표가 ‘생활정치’를 새로운 화두로 꺼내들었다. “민주정부 10년의 정체성에만 매달리지 않겠다”는 ‘정세균 독트린’에 이은 두 번째 승부수다. 정 대표는 앞으로 ‘민생 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며 매주 2∼3차례씩 국민과 소통을 이어나간다는 복안이다. 민생 버스에 오른 그가 가려는 최종 목적지는 과연 어디일까.
정 대표가 민생버스에 첫 시동을 건 것은 지난 16일. 11월 12일부터 15일까지 일본을 방문해 오자와 이치로 간사장, 오카다 가쓰야 외무장관 등 일본 민주당 실력자들을 만나고 온 바로 다음날이었다. 정 대표는 당시 귀국길 공항에서 “일본 민주당에 비해 우리 민주당은 너무 소심하고 과감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결국 정 대표의 생활정치 선언은 ‘자민당 55년 체제’를 무너뜨린 일본 민주당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개혁 노선과 전략을 벤치마킹해 정권 교체를 실현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셈이다.
다른 한편으론 10%대를 맴돌던 당 지지율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직후 20%대로 회복하고 재보선에서도 승리하자, 수권·대안야당으로서 외연을 확장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기도 했다. 당 관계자는 “(기존) ‘여의도 정치’에 거부반응을 보이는 중간층 유권자의 표심을 얻기 위한 새 전략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당장 한나라당에서도 화답이 왔다. 정몽준 대표는 “정 대표가 찾아가는 정치, 생활정치를 표방한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며 “여야가 생활현장 속에서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길 바란다”고 환영했다.
당내에서도 ‘일단은’ 주목해보자는 분위기다. 미디어법·4대강 사업·세종시 문제 등 핵심현안에 대한 정치투쟁을 전개해오면서 민주당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발목잡기 정당’으로 비춰진 측면이 많았는데, 생활정치를 통해 현장성을 강화하다보면 당 이미지 개선에 도움이 될 거란 분석이다.
그러나 아픈 지적도 없지 않았다. ‘일본 민주당 따라하기’가 과연 국민들 눈에 좋게 보일 수 있겠냐는 비판이다. 실제 정 대표는 오카다 외상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 민주당은 과거 두 차례나 집권했지만 지금은 야당이 돼 일본 민주당을 벤치마킹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 ‘일본통’ 의원은 “정권교체 경험이 우리보다 10년이나 뒤진 일본 정치에서 뭘 배우겠다고 선언하는 건 자존심 문제”라며 “특히 ‘생활정치’라는 일본 민주당의 공식 선거 슬로건을 그대로 베껴 쓰는 것은 당의 ‘상상력 빈곤’을 자인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정 대표 입장에선 당 안팎의 이런저런 구설에 눈 돌릴 여유가 없는 눈치다. 생활정치 선언은 당 못잖게 정세균 개인을 위한 ‘특단의 조치’이기도 했다. 미디어법 투쟁과정에서 단식을 벌이고 의원직을 던져도, 재보선을 승리로 이끌어도 여전히 ‘무명의 야당 대표’로 머물고 있기 현실 때문이다. 대선주자군에 대한 각종 여론조사가 이를 증명한다.
지난 11월 15일 MBC가 코리아리서치에 의뢰해 공개한 예비대선주자 선호도 결과에 따르면, ‘부동의 1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30.1%)에 이어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7.8%)과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6.5%)가 뒤를 따랐다. 문제는 정 대표다. 그의 이름은 등장하지도 않았다. 아마도 유의미한 수치가 아니어서 공개할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 같다는 해석까지 나왔다.
다행히 조금 ‘친절한’ 여론조사가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안 나오느니만’ 못했다. <국민일보>가 지난 11월 8일 공개한 여론조사에서 정 대표는 유 전 장관(5.2%), 정동영 의원(3.2%), 한명숙 전 총리(3.1%)에 이어 ‘0.4%’라는 제1야당 대표로는 ‘경이적인’ 지지율을 얻었다. 또 11월 19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야권 내 주요세력 호감도’ 조사에선, 유시민 등 친노세력이 24.1%로 단연 1위를 달렸고, 손학규 그룹(18.4%), 정동영 등 비주류그룹(12.4%)이 2위권을 형성했다. 당권을 쥐고 있는 ‘정세균 주류그룹’은 한 자릿수 지지율(8.9%)에 머물렀다.
‘저조한 대중성’은 일본 방문길에서도 ‘굴욕’으로 이어졌다. 정 대표의 방일 일정을 수행했던 한 의원은 “일본 민주당 측에서 오자와 간사장이 ‘정 대표를 잘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문희상 국회부의장의 동행을 강력히 요청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일본 정계에서는 ‘될성부른’ 한국 정치인들과는 전략적으로 친교를 다져오는데, 정 대표는 소장파 시절부터 일본에 잘 알려진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정 대표의 스타성 문제는 사실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본인도 자신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진보성향 언론사들이 주최한 ‘야당 대표 초청 토론회’에서 존재감 부족에 대한 질문을 받고 “모범생 스타일이어서 인기가 없다고 하는데, 아쉬울 때도 있지만 거짓으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며 “국민의 지지보다는 ‘선당후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역시 정치인인 이상 ‘대중성에 대한 갈망’이 없을 리 없다.
측근들의 고민도 깊다. ‘백약이 무효하다’는 것이다. 386 출신 한 측근 의원은 “많은 조언도 하고 전략도 짜봤지만 ‘관리형’이라는 고정된 이미지는 쉽게 변하지 않더라”며 “결국 정 대표 스스로 역량으로 문제를 풀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당내 사정도 간단치만은 않다. 비주류 진영에선 아직 조기전당대회 문제를 본격화하고 있지 않지만, “한나라당이 내년 초 조기전대를 연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더욱이 “지방선거는 새 얼굴, 새 간판으로”라는 비주류의 주장엔 중도파 의원들도 십분 공감하고 있다. 10월 재보선을 통해 손 전 대표는 화려하게 부활했고, ‘무소속’ 정동영 의원 역시 지방선거 전 복당이 사실상 결정된 상황이다. 차기 대선주자로서 자리매김은 차치하고 ‘얼굴 알리기’가 급선무인 정 대표에겐, 일반 국민들과 접촉면을 크게 넓힐 수 있는 생활정치 행보가 좋은 기회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국민과의 온도 차를 줄일 수 있는 스킨십이다. 서민들 얘기나 몇 분 듣고 악수나 하고 가는 ‘민생투어’라면 오히려 정 대표에게 독이 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양원보 세계일보 기자 wonbosy@segye.com